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63)화 (63/75)

#63. 비보 (2)

사막의 기적에게 가는 길 내내 리아는 뒤를 돌아봤다. 이대로 케빈을 두고 가는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을 보고 싶지 않을 터였다. 리아는 어떻게 하면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마지막에 그렇게 화를 내는 케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까칠했지만 자신을 인정한 이후 항상 다정하게 대해줬으니까. 자신이 받고 있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원래대로 돌아가자고 말할 순 없었다.

울지 말자고 다짐해도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정작 슬픈 건 케빈일 텐데 왜 자꾸만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케빈을 상처 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리아 님.”

막 사막의 기적을 만나러 가던 차에, 그녀를 대신해 사막의 기적을 맡아주었던 사람과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리아는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이미 상대방은 봐버린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그녀는 억지로 방긋 웃어 보였다. 방금 그 눈물은 네가 잘못 본 거라는 듯이. 그러자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담당자가 물러서서 제 갈 길을 갔다. 리아도 그를 지나쳐 자신이 담당하는 사막의 기적 쪽으로 다가갔다.

다른 사막의 기적들과 달리 리아가 담당하는 아이만 생생했다. 안개처럼 물을 주는 게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안개처럼 물을 뿌려주던 케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할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을 응원해주던 그였다. 리아는 턱을 괴고 살짝 사막의 기적을 만졌다. 보들보들한 촉감이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좀 더 쑥쑥 자라라.”

휴식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금세 다시 일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리아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오후에도 일하는 내내 리아는 케빈의 기색을 살폈다. 다행히 그는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활기차게 일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전처럼 그에게 말을 걸 틈을 찾기는 어려웠다. 괜찮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리아는 얌전히 노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 노동을 반복하자 머리가 말끔히 비었다. 몸이 힘든 만큼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좀 일찍 돌아가도록 하죠.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허리가 끊어지겠구나 싶을 때쯤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평소의 저녁 시간보다 일렀다.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사실 몸이 지치니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니 뼈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몸이 두 배는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내디뎌 기숙사로 향했다.

“리아 양!”

눈이 돈다 싶더니, 눈앞에 갑자기 퍼스의 모습이 꽉 들어찼다.

“어떻게 여기에…?”

“지나가다가 갑자기 휘청거리셔서요. 괜찮으신가요?”

“아, 잠깐 현기증이 나서….”

몸이 기울어져 있는 리아를 퍼스가 바로 세워줬다.

“어쩐지 매번 넘어지시는 것 같군요.”

그러면서 퍼스는 헝클어진 리아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의 손길이 퍽 다정해서 그녀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놀라서인지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오늘 좀 일을 많이 해서요.”

“들었습니다. 오늘 농업 부서를 도우셨다고요.”

“네. 저는 겨우 이틀 했는데 이 모양인데 항상 하시는 분들은 힘드시겠더라고요.”

그는 손을 뻗어 리아의 얼굴에 묻어 있는 흙도 닦으려 했다.

“괜찮아요. 흰 장갑인데 더러워지겠어요.”

리아는 재빠르게 손을 저으며 물러섰다. 묘하게 거리를 두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퍼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갑 정도는 더러워져도 됩니다.”

점점 더 능글거리는 것 같은데. 처음의 무심했던 퍼스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찾을 수 없었다. 원래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놀랄 터였다.

“제 말은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는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던 질문을 가지고 훅 들어왔다. 설마 이 타이밍에 그가 이런 걸 물어볼 줄 몰랐던 리아는 어버버 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그게….”

“저는 케빈 님과 달라서 한 달 여유를 두고 천천히 날 봐달라 그런 거 안 합니다. 빨리 결정 내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는 일부러 한 걸음 가까이 서며 리아를 압박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 하지만 제게도 고민할 시간은 주셔야죠!”

“이건 고민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왜 고민할 문제가 아니에요? 충분히 고민해보고 대답해야죠.”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좋은지, 아닌지.”

“어떻게 좋은지가 다를 수 있잖아요. 친구로서 좋은 걸 수도 있잖아요!”

퍼스가 지나치게 다그치자, 리아가 역으로 화를 냈다. 그녀의 말을 듣고 퍼스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생각에 빠진 퍼스의 옆모습을 보며, 리아도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너무 다그쳐서 오히려 더 제대로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가 좋냐 아니냐고 물으면 당연히 좋았다. 그게 어떤 ‘좋음’인지가 문제였지만. 왕궁에 와서는 거의 매일같이 그를 만나고 있었다. 그가 저택에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가까워질 줄 몰랐다. 익숙해져서 좀 둔감해졌다고는 하지만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외모였다.

“리아 양?”

어느새 리아는 넋을 놓고 퍼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낀 퍼스는 시선을 내려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눈은 초점이 풀려 있었다. 이럴 때마다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퍼스는 살짝 몸을 내려 얼굴을 가까이했다. 숨결이 닿을 정도가 될 때까지 리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퍼스는 속눈썹도 잘생긴 것 같다는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귓가에 도착한 그가 장난스레 숨을 후 불어넣었다. 간지러우면서도 묘한 감각에 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하시는 거예요!”

“빈틈이 너무 많습니다, 리아 양은.”

퍼스는 천천히 몸을 세우며 말했다. 퍽이나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장난스레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눈앞의 순진한 영애를 방심하는 사이 다른 이가 채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죠. 그냥 앞으로도 계속 제가 보고 싶은지 아닌지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슨 말이에요? 거절하면 앞으로 안 본다는 것 같잖아요.”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차이고서도 리아 양 앞에 나타날 만큼 뻔뻔하지 않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자신을 차면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말은 리아에겐 협박에 가까웠다. 그와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옆에 있어 줬다. 그가 없는 자리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차올랐다.

“치, 치사해요.”

벌써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는 리아를 보며, 퍼스는 그녀의 얼굴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네, 전 치사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마음을 완전히 엿보지는 못했지만, 두 번 다시 안 본다는 자신의 말에 약해질 거라는 것 정도는 쉽게 예상이 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의 반응에 대해서는 예민한 그였으니까. 기다렸다가 흐르는 눈물을 살짝 닦아주면 될 뿐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대로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자신은 케빈처럼 좋은 사람인 척하고 싶지 않았다. 리아는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래서는 좋은 사람으로만 끝난다는 걸 충분히 잘 아니까 더욱. 치졸하고 비겁한 방법이라도 일단 그녀를 옆에 두고 싶었다. 그녀의 진심은 천천히 제게 돌리면 된다. 그 정도로 퍼스는 리아가 절실했다.

“저는….”

“퍼스 님!”

막 리아가 입을 여는데, 퍼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아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험악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큰일입니다. 온실에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온실이라는 말에 리아도 관심을 보였다.

“온실에 문제요? 그럼 온실 관리자에게 가셔야지 왜 제게 오십니까?”

“그, 그게 하필 ‘사막의 기적’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신이 관리하는 사막의 기적 이름이 나오자, 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이 낮에 보고 왔으니까.

“왕비 마마가 사막의 기적을 보러 산책을 나오셨는데, 하필 사막의 기적이 뽑혀 있었다고 합니다.”

직원의 말에 퍼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왕비가 관련되어 있다면.

“뽑혀 있다고요?”

“리아 양, 일단 온실로 가보시죠.”

말을 전하러 왔을 뿐인 직원을 리아는 무서운 기세로 추궁했다. 퍼스는 그녀를 달래 온실로 향하게 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사태는 더 나빠졌다. 그냥 사막의 기적에 문제가 생긴 거면 모르겠는데 하필 그 발견자가 왕비라고 했다.

처음 리아를 데려왔을 때, 사막의 기적은 핑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왕비가 사막의 기적을 아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온실 전체가 그녀의 소유였는데, 가장 아끼다시피 하는 식물에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니. 당연히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터였다. 퍼스는 힐끔 리아의 표정을 보았다. 앞날을 대강 예감하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떤 문제든 담당자인 리아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리 없었다.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

온실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아마 문제가 생기자마자 관리자들이 모두 소집된 모양이었다. 오늘은 하필 모두가 일찌감치 해산한 날이었다. 온실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사막의 기적이 있던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곳에 케빈의 모습도 보였다. 이미 사건의 전말을 파악했는지, 골치 아픈 표정이었다.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아가니, 사막의 기적 바로 옆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은 복장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왕비 마마를 뵙습니다.”

“왕비 마마를 뵙습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인사했다. 하지만 순순히 인사를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왕비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옆에 있던 시녀가 재빠르게 왕비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아마 리아의 신분을 알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표정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페넬로페 영애. 영애가 사막의 기적을 담당하고 있는 것 맞죠?”

“네, 맞습니다.”

“게다가 현재 담당하고 있는 게 이 뿌리. 맞나요?”

리아는 왕비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정확히 그녀가 키우던 사막의 기적이 따로 보관된 곳이었다. 물을 주는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에 한 뿌리만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확히 그 뿌리가 뒤집혀 있었다. 잎이 아래로, 뿌리가 하늘로 향해 있는 모습이었다. 누군가 억지로 뽑고 그 자리에 돌려놓은 게 분명했다. 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뱉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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