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비보 (1)
리아는 이대로 케빈의 호감을 이용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확실하게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도저히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휴식 시간에는 다른 사람들 모두 같이 있었다. 잠시 그가 혼자 멀어지는 때를 노렸지만, 금세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잡을 수 없었다. 일이 완전히 끝난 후에도 바람같이 모습을 감춰서 잡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딜 가신 거야?”
결국 하루를 헛되이 보냈다. 종일 케빈의 동향에 신경 쓴 데다,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까지 쓰느라 힘이 없었다.
“리아.”
터덜터덜 걷는 리아의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
저녁을 일찍 먹었는지 동료들과 식당을 나오던 길이었다. 그들에게 인사한 후, 리아와 함께 메이도 식당에 들어섰다.
“오늘은 그분이랑 같이 안 먹어?”
“오늘은 일이 있다고 하셔서요.”
그리고 오늘은 아마 얼굴 보기 민망하실 것 같으니까요. 웃으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리아의 머리를 맴돌았다.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난 그녀의 볼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왜 얼굴이 달아오르실까?”
발그스름해진 볼에 메이의 검지가 콕 와 닿았다. 그녀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 표정은 뭐예요?”
“표정을 보아하니 둔탱이인 리아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나 본데?”
역시 메이는 속일 수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피해 보려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받으러 갔다. 하지만 옆에서 따라다니며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무언의 압박이라는 걸 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마자 메이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나한테 거짓말할 생각 마. 언제 나한테 숨기는 거 성공한 적 있어?”
“…아니요.”
리아는 빵을 잘게 쪼갰다. 자꾸만 추궁당하니 입맛이 떨어졌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을 보던 메이가 강제로 그녀의 입에 빵 몇 점을 쑤셔 넣었다.
“빨리 먹고 말해줘.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어떻게 말하라고 이렇게 많이 밀어 넣는지. 리아는 가자미 눈으로 메이를 노려보면서도 시킨 대로 빠르게 먹었다.
***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리아의 방이었다. 항상 그렇듯 모든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그곳에서 둘만 나눴다. 그리고 자신의 방이어서 그런지 리아가 더 솔직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고백! 드디어 그 사람이 해냈구나!”
“메이, 조용히 말해요! 그것보다…. 알고 있었어요?”
“그럼. 모르는 건 너뿐이지. 그렇게 티 나게 하고 다니시는데 어떻게 모르니.”
주변 사람들은 모두 눈치채고 있었지만, 리아만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원래 자신은 연애 방면으로는 둔했다. 케빈 때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퍼스의 고백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왜? 이번에도 케빈 님처럼 한 달 동안 유예를 달래?”
“아뇨.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퍼스 님이 저를 온실에 데려다주고 가셨어요….”
다시 생각해봐도 스스로가 한심했다.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얼마나 우스운 장면이었을까.
“아유, 이 바보. 이번에도 거절할 거야?”
“모르겠어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어쩌다 하필 절…?”
리아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떠올리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그래서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쩌다 하필이라니. 네가 뭐 어때서 그래. 내가 보기엔 충분히 매력적인 아가씬데.”
“하지만 퍼스 님이? 전 잘 모르겠어요….”
“하긴 그분 자체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놀랍긴 하지. 나도 그랬으니까.”
메이는 몇 번 퍼스를 떠보려고 시도했던 걸 떠올렸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냉랭한 반응이었다. 애초에 살가운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사이였다. 그랬던 그가 리아에게 고백이라니. 메이로선 퍼스가 고백하는 장면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다만 전 퍼스 님 취향이 아닐 것 같았달까요.”
“하지만 그분 취향이 뭔지 알고는 있니?”
“아뇨….”
“근데 뭐 그리 단언해.”
그녀가 생각하기에 퍼스의 취향이란 건 따로 없는 게 분명했다. 단지 알에서 막 깨어난 오리가 처음 본 상대에 각인하듯, 리아라는 존재가 취향 그 자체일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제 감정을 깨닫기 전에도 맹목적으로 리아를 좇았겠지.
“그래서 케빈 님은 잘 거절했어?”
“아직이요. 오늘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둘만 있을 기회가 생기질 않아요.”
직속 상관인데 둘만 있을 기회가 없다라. 말만 들어도 케빈이 일부러 피하는 게 티가 났다. 하지만 둔한 리아는 이마저도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 좀 시간이 걸리겠네. 퍼스 님도 같이 거절해버리지그래?”
메이는 일부러 떠보듯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리아는 솔직하게 어두운 표정을 했다. 퍼스를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에 저항이 있는 게 분명했다.
“거절하면… 사이가 어색해지겠죠?”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럼 언제까지고 유예하게? 기다릴 상대방을 생각하면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야.”
“지금까지도 좋은데 왜죠? 왜 그런 관계가 되어야만 하죠?”
리아는 괴로운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페넬로페 저택을 떠나던 어머니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 그것만큼 덧없는 게 있던가. 금세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감정에 어째서 익숙하고 편안한 관계를 걸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잘못되면 널 잃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할 수 없었던 거지. 가슴 안에서 피어나는 감정이란 꽃을.”
어차피 질 걸 알면서도 꽃을 피우는 것처럼. 어쩌면 찰나를 보내고 스러질 걸 알기에, 더 소중히 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지. 이미 피어난 꽃은 외면할 수 없기에.
“알겠어요. 저도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두 사람과 마주하겠어요.”
“그래야 우리 리아지.”
메이는 리아를 꼭 껴안았다. 리아의 마음이 조금씩 자라나는 걸 지켜보는 게 좋았다. 서투르지만 순수한 그 마음이 누구를 향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리아 또한 메이를 마주 안았다. 서투른 자신을 보살펴주는 친구이자 언니 같은 존재였다. 궁에서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리아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중 많은 게 메이가 알려준 것이었고. 그녀에겐 항상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로 감사하고 있었다.
내일은 드디어 그녀가 솔직해지는 날이었다.
***
아침 식사를 하고 식당을 나설 때 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침 일찍은 역시 퍼스도 바쁜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리아는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며 온실로 향했다. 출근하고부터는 케빈 찾기에 몰두했다. 그는 유난히 리아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말을 걸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리아도 만만치 않았다. 오늘에야말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거의 케빈의 뒤를 새끼 오리처럼 따라다녔다.
“알았어. 무슨 일인데?”
이쯤 되니 케빈도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는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세 번째 달이 되었고, 자신이 제시한 유예기간은 끝나 있었다.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요.”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는 확인사살이었다. 이쯤 되면 대충 눈치챘으니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연한 리아의 표정을 보니 통하지 않을 듯싶었다. 케빈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먼저 천막으로 향했다.
“말해.”
그는 일부러 바쁜 척 등을 돌렸다. 부산히 움직이는 케빈의 모습을 보며, 리아는 잠시 말을 골랐다.
“휴식 시간은 아주 짧아. 빨리 말해.”
이 잠깐이 끝나면 다시 업무로 복귀해 상사와 부하 관계가 되어야만 했다. 자신이 그걸 할 수 있을까? 케빈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결연했던 의지치고는 나약한 도입부였다. 모진 말을 하지 못하는 게 그녀다웠다. 저도 모르게 케빈의 입가에서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케빈 님이 저를 좋게 봐 주셨던 건 감사합니다. 하이버에서 절 구해주셨던 것도요.”
하이버 지역 얘기는 오히려 그를 더 아프게 했다. 자신도 기사단 출신이니 어느 정도 그녀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함께 납치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녀의 약점이 되기만 했다. 정작 그녀를 구해낸 것은 분하게도 다른 사람이었고.
“구해준 건 아니지. 지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전 케빈 님이 함께여서 정말 마음이 든든했어요. 물론 저 때문에 상처를 많이 입으셔서 정말 죄송하고요.”
“그만. 그 얘기는 이제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짜증을 냈다.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어서였다. 마지막까지 구질구질한 제 모습이 한심했다.
“됐어. 계속해.”
리아도 케빈의 신경질적인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매일같이 일해서 익숙한 천막이 낯설었다.
“어…. 그러니까 케빈 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지만, 제가 부족해서 케빈 님이 해주신 말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무의미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며, 리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분명 케빈은 상처받았을 터였다. 그런 잔인한 말을 하면서 이전으로 돌아가 달라고 하는 건 이기적인 부탁이었다.
“그래.”
케빈에게서 나온 대답은 김이 빠질 정도로 싱거웠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뒤돌아서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그 자식은?”
“네?”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리아는 어리둥절했다. 케빈은 이를 꽉 깨물며 한 번 더 말했다.
“퍼스 베르시에. 그 자식은 네가 받아들이기에 어떻냐고.”
생각지 못한 질문에 리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메이가 지난밤에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둔해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 주변은 다 알고 있었다고. 그중 하나가 케빈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 퍼스 님은….”
“그 자식은 뭐가 그렇게….”
달라? 특별해? 뒤에 이어질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제 질문으로 리아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감정에 불이라도 지필까 봐. 사실, 퍼스가 고백했다는 건 어제 아침 온실에 출근하면서 알았다.
온실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긴장하고 있는 그의 표정과 넋이 나간 리아의 표정.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엿듣고 말았다. 그래서 알았다. 리아의 답은 거절이라는 것을. 아니고서야 퍼스가 세 번째 소개 상대라는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퍼스의 얼굴을 떠올리니 참고 있던 화가 올라왔다. 하지만 리아가 자신을 거절했다고 해서, 자신이 그에게 화낼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몇 번의 심호흡을 거듭한 케빈은 낮게 말했다.
“돌아가기 전에 사막의 기적 상태나 한 번 더 보고 와. 요즘 관리에 소홀했으니까.”
“네, 네?”
“되묻지 말고 빨리!”
얼핏 명령하는 듯했지만, 그 목소리에서 언뜻 괴로움이 묻어났다. 리아는 머뭇거리다가 천막을 나섰다.
“…알겠습니다, 케빈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