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61)화 (61/75)

#61. 세 번째 사람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나. 리아는 날짜를 꼽아보며, 출근길을 서둘렀다. 그 옆으로 퍼스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언제 말을 꺼낼지 몰라 그의 시선이 리아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물어보려고 아침부터 오셨군요?”

초조한 퍼스의 마음과 다르게 리아는 대답을 쉽게 해주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급하게 따라잡는 걸음이 그의 초조함을 보여줬다.

“네,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저는 약속은 칼같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밤새 기다리기가 힘들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눈 밑도 그늘이 져 있었다. 하지만 리아는 시선을 피했기 때문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아침이 되자마자 식당 앞을 서성거렸다. 밤새 준비한 변명거리를 가지고.

“하루라도 어기면 백작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요.”

계속해서 말하며 퍼스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제의 장면을 보고,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나빠진 게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비게일에 대한 찬사 대신 험담이라도 잔뜩 늘어놓을 걸 그랬다며 내심 후회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어제의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함부로 꺼냈다가는 리아의 기분을 더 망칠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둔한 만큼, 남의 감정에도 관심 없었던 게 지금까지의 퍼스였다. 이렇게 남의 신경을 쓰는 건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알아주든 아니든.

그녀의 침묵이 몹시 길게 느껴졌다. 일부러 무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나 케빈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아닐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대답이었다.

“혹시 케빈 님을 받아들이시려는 겁니까?”

제일 피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도 입이 겁 없이 내뱉고 말았다. 스스로 내뱉고 스스로 상처 입었다. 빠르게 걷던 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퍼스를 바라보았다. 평소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는데, 지금 그녀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다. 놀람? 당혹? 화? 섣부른 마음에 금방이라도 손이 나갈 것 같았다.

“퍼스 님은.”

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목울대가 위로 올라갔다 내려가는 찰나가 영원처럼 길었다. 퍼스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페르디난드 양을 받아들이시려는 건가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퍼스는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그 잠시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리아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정말이에요? 그분은 약혼자도 있으시다고요!”

그제야 퍼스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대답했어야 했다. 잠깐의 유예로 리아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오해십니다.”

“오해는 뭐가 오해죠? 어제 제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요. 그분에게 한참 동안이나 찬사를 늘어놓는걸요!”

“아니, 정말로….”

그건 리아가 도망을 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아니면 당장에라도 들킬 게 뻔했고, 그러면 아비게일에게도 리아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리아는 그에게 오해를 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알폰스 님이 아무리 그런 분이라고 해도, 퍼스 님은 그러시면 안 되죠!”

“제 말을! 들어주시죠.”

그는 리아의 양어깨를 잡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옷 위에 손이 닿은 거라 그녀의 솔직한 감정은 알 수 없었다. 세게 잡힌 건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접촉에 리아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일단 전 페르디난드 영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제 영애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건 리아 양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뿐이었고요.”

“하지만 영애는 퍼스 님을 좋아하잖아요….”

“절 좋아한다고 해서 저도 꼭 좋아해야 하나요?”

밤새 고민했던 게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엉뚱한 일로 화를 냈다는 걸 깨달은 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부끄러워진 그녀는 퍼스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겠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태도를 퍼스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머리에서 제멋대로 그걸 긍정적인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의 손에 잡힌 어깨가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 작은 몸짓도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이제 제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해주시겠습니까?”

“질문이요?”

너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해서, 퍼스가 제게 뭘 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하니 되묻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케빈 님을 계속 만나실 겁니까?”

“아, 그거.”

이미 결론이 나 있는 문제였다. 그러니 말하기 쉬워야 할 텐데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웠다. 당사자에게 먼저 말하기로 결정해놓고, 그에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망설이는 사이, 퍼스는 다시 재촉해왔다.

“…그럼 세 번째 소개는 필요 없으신가요?”

물론 필요하진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원한 거래가 아니니, 이 질문은 잘못된 거였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케빈을 거절하려고 하고 있었다.

“…부탁드려요.”

그녀의 시선은 완전히 발끝을 향했다. 원하지도 않는 소개를 받는 것도, 왕궁에서 수습으로서 일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세 번째 사람은 누구일까? 사막의 기적을 온전히 키워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만날 세 번째 사람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리아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두 사람은 온실 근처까지 와 있었다. 지금 당장 소개하는 거라면, 저번 케빈을 소개한 것처럼 자신의 주변에 있는 동료 중 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앞을 보세요.”

퍼스는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뒤에서 잡고 있는 것도 아니라, 리아의 고개는 자연히 눈앞에 있는 그에게로 향했다.

“퍼스 님밖에 없는데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그녀의 표정도 귀여웠다. 퍼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녀의 두 눈에 온전히 자신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이 순간이 못 견디게 좋았다.

“네, 저입니다.”

리아는 너무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손가락질로 퍼스를 가리켰다. 말없이 입만 벌리고 놀라는 그녀를 위해 퍼스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요? 퍼스 님 처음부터 생각했는데 실례가 될까 봐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었지만…. 혹시 궁에 아는 사람이 그렇게 없으세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안 그래도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친구가 자신이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그러니 궁에 소개해줄 만한 미혼 남성도 아는 이가 적었던 게 분명했다. 세 후보를 놓고 보니 영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고.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그럼 왜요?”

“좋아합니다.”

드디어 밤새 벼르고 벼르던 말을 할 수 있었다. 언제 꺼내야 할지 계산하고, 또 계산한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었다. 결과가 어찌 되든 그는 세 번째 상대로 다른 남자를 소개할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은 두 번째에 충분히 느꼈으므로.

리아는 연달아 충격적인 말을 듣자, 정신이 어딘가로 나가버렸다. 쓰러질 뻔한 걸 퍼스가 잡고 있어서 겨우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던 퍼스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속 입을 벌리고 있으면 먼지 들어갑니다.”

퍼스는 팔로 그녀의 입을 닫아 주었다. 맨손으로 그녀의 머릿속을 엿보고 싶었지만 이건 정말 반칙인 듯했다. 이번만은 온전히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얼이 빠진 그녀를 데리고 직접 출근까지 시켜주었다.

옆에서 에스코트하며 사막 기후 관리 부서까지 데려다주는 그의 모습을 보며 모두가 수군거렸다. 하지만 리아는 정신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고, 퍼스는 알았지만 일부러 더 티 나게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여러 번 경험한 바로는 내일 정오 이후면 궁에 웬만한 이들은 모두 이 소문을 들을 터였다. ‘그렇게 친구라고 우기더니 결국 두 사람, 다시 만난다며?’ 만나고 헤어졌다는 모든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적극적으로 사실로 만들어볼 셈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비로소 정신을 차린 리아가 외쳤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의 일터 한복판이었다. 퍼스의 모습은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퍽.

“아얏!”

“너야말로 그게 도대체 무슨 태도냐. 일이나 해.”

냉혈한 상관, 케빈이 뒤에서 리아의 뒤통수를 때렸다.

“왜 때리세요?”

“하루 종일 멍하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놓고 방금은 별 헛소리까지 하고. 생각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손을 움직이시지?”

현재 그들은 농업 관련 부서에 파견을 나온 참이었다. 항상 일손이 부족한 부서였기에, 정기적인 파견이라고 했다. 복잡한 전문 기술이 아닌, 단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쉼 없이 몸을 움직이면 안 그래도 멍하던 머리가 더 깔끔하게 비워졌다. 다만 잠시 허리를 들어 올릴 때마다, ‘사람이 일하다 죽는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구나’ 싶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잠깐 휴식!”

구령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이 어기적어기적 걸어 한군데로 모였다. 농업 관련 부서에서 준비한 음식들이 차려진 상태였다.

“먹고 쉬지도 말고 짐승처럼 일하라는 거지.”

“뭐가 됐든 난 식당으로 못 갈 거 같아.”

여기저기 곡소리가 울렸다. 리아도 다를 바는 없었다.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을 쓰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장 멀쩡한 사람은 역시 케빈이었다.

“다들 약해 빠져서는.”

그는 평소의 작업복과는 다르게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게 노동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덕분에 한참 일하고 난 뒤 성난 그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기사단을 그만둔 지 꽤 되었지만, 근육질 몸매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잡일이 많아 잔근육이 발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리아의 눈에는 그런 게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에 준비된 간단한 참을 들고 연구라도 하려는지,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인데?”

케빈은 평소에도 그랬듯 리아가 이상한 상태인 걸 금세 알아챘다. 그 점은 고마웠지만, 이번 일만은 말하기가 어려웠다. 퍼스가 저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말하려면, 그가 세 번째 대상이라는 것도 말해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두 번째 소개 대상이었던 그를 거절했다는 걸 밝히게 되는 셈이었다. 직접 케빈에게 말하기로 결정했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일하다 잠깐 식사를 하는 이런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리아는 말없이 입에 빵을 우걱우걱 밀어 넣었다.

“어이, 체해. 천천히 먹어.”

케빈은 어미 새처럼 리아를 챙겼다. 그 모습에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일까, 케빈은. 그를 거절하려고 하는 자신이 못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가 상처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이성적인 의미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아주 잘해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외면하기 위해 더욱더 많은 빵을 씹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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