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60)화 (60/75)

#60. 운수 나쁜 날 (2)

아비게일은 끊임없이 퍼스에게 몸을 붙여왔다. 몇 번은 우연인 척 피했지만, 노골적으로 잡히는 건 피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뭘 잘못 먹어서 제게 이러는 걸까. 사람과의 접촉이 다시 싫어질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온실 구경을 마친 후, 비로소 안도했다. 이제 볼일은 다 봤으니 쉬다 알폰스와 저녁이나 먹겠지 싶었는데 그녀는 갑자기 후원을 산책하고 싶다고 우겼다. 꽃 한 송이 없는 황량한 풍경이라고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곧 저녁 시간입니다.”

“잠깐 산책하는 것 정도는 되잖아요?”

역시 그녀가 우기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퍼스는 입을 꾹 다물고 알폰스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고민했다.

“다들 후원 안으로는 들어오지 말아요. 퍼스 님과 할 얘기가 있으니까.”

“페르디난드 영애…?”

후원에 도착하자마자, 아비게일은 손을 휘휘 저어 모두를 물렸다. 사람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아비게일은 그에게 팔짱을 끼려고 했다. 하지만 퍼스는 자연스레 몸을 피했다. 아비게일은 그런 퍼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모른 척 시침을 떼고 있었다.

이제 저녁 시간이 다 되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꽃 한 송이 없는 후원도 이 시간만큼은 붉게 물들곤 했다. 그렇다고 해도 왕자 궁의 후원은 다른 궁에 비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허전했다. 분수대 근처에 가끔 티 타임 용도로 쓰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워낙 볼 게 없으니 사람도 별로 찾지 않았던 거였고, 그 때문에 리아와 저만이 숨어서 식사를 하기 딱 좋았다.

“날이 찹니다. 후원 구경은 이 정도로 마치시고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아해요, 퍼스 님.”

아비게일은 그렇게 말하며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퍼스를 올려다보았다. 대개 이렇게 자신이 바라봐주면 누구든 얼굴을 붉히곤 했다. 하지만 안경 탓인지 퍼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 아비게일 님.”

하지만 그녀가 놓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사실 퍼스는 냉정한 남자라는 점. 눈앞에서 상관의 약혼녀가 고백했지만 그가 느끼는 거라곤 설렘이나 당황이 아닌, 짜증뿐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대답을 최대한 골랐다. 결론은 하나였지만. 천천히 안경을 올리는 사이, 아비게일의 뒤로 수풀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바스락.

하지만 긴장하고 있어선지, 아비게일은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살짝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니, 익숙한 흰 천 끝자락이 보였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리아의 모습도. 그 순간만큼은 퍼스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깜짝 놀라 굳어버린 그를 보고, 아비게일은 자신의 고백에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퍼스 님? 괜찮으세요?”

리아는 손을 들어 입모양으로만 얘기했다.

‘금방 갈게요.’

그러곤 자신이 한 말에 따라 천천히 기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망했다. 퍼스의 머릿속엔 그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필 고백받는 장면을 그녀에게 들키다니!

“혹시 뒤에 뭐라도 있나요?”

“영애!”

드디어 아비게일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퍼스는 뒤에 있는 리아를 들키지 않게 하려고 저도 모르게 아비게일의 양팔을 붙잡았다. 리아도 들킬까 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비게일은 그저 퍼스가 박력 있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네, 네!”

“지금부터 제가 얘기를 할 테니 저만 보고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시고요.”

특히 바로 뒤라든가! 퍼스는 리아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살짝 눈짓을 했다. 리아는 금세 신호를 알아듣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영애가 해준 말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솔직히 영애와 같은 미인이 고백해주시는데 좋아하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 또한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평소에 잘하지도 않던 아부까지 떨고 있었다. 당황해서 횡설수설했지만 아비게일에겐 다 좋게 들리는 듯했다. 어쩔 수 없다지만 이걸 리아가 다 듣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혀를 깨물고 싶었다.

점점 퍼스의 말은 본질을 잃고 아비게일에 대한 찬양의 말로 바뀌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대단한 위기 대처 능력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을 정도였다. 비로소 눈앞에서 리아가 후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이자, 퍼스는 아비게일을 붙잡았던 팔을 놓았다.

“퍼스 님, 그럼 제 마음을 받아주시는 건가요?”

“안 됩니다, 영애.”

눈앞에 리아가 사라지자마자, 퍼스의 태도는 다시 단호해졌다.

“하, 하지만 지금까지 제 칭찬을 그렇게 많이 하셔놓고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그 ‘다들’에 자신은 들어가지 않지만. 퍼스는 눈앞의 상황보다, 이후에 리아를 만났을 때 상황이 걱정이었다. 한눈에 봐도 아비게일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의 관심은 단 한 사람, 리아에게만 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필 그녀에게 고백을 받는 장면을 들키다니. 운수가 나빠도 보통 나쁜 게 아니었다.

“퍼스 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세요?”

“죄송합니다. 저는 알폰스 왕자님의 약혼녀분과 그런 관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알폰스 왕자님도 마음껏 만나고 다니시잖아요? 보좌관인 당신이 그걸 모른다고 하실 셈인가요?”

하여간 자신의 몹쓸 상관은 매번 걸림돌이었다. 퍼스는 어그러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왕자… 님의 사생활에 관련된 부분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한낱 보좌관이어서요.”

시침을 떼려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비게일은 갑자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퍼스에게 기대려 했다.

“퍼스 님…! 전 왕자님 때문에 너무 속이 상해요!”

하지만 퍼스는 저도 모르게 또 몸을 움직여 피하고 말았다. 덕분에 아비게일이 넘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것까지는 무시할 수 없어, 팔을 뻗어 그녀를 잡아냈다. 그녀는 제 발로 버티고 서서, 퍼스를 노려보았다.

“위로도 안 해주시는 건가요?”

금세 마른 눈물이 거짓 눈물이었다는 증거였다. 단번에 표독스러워진 표정을 보고, 퍼스는 쓰게 웃었다.

“영애는 지금 위로받을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만.”

굳이 장갑을 벗어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알폰스에 대한 복수심, 눈앞의 퍼스에 대한 소유욕, 리아에 대한 질투심. 그 어떤 것들을 놓고 보아도 그 안에 순수한 애정은 없을 게 분명했다.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인가요?”

아비게일의 눈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눈앞의 남자는 고작 보좌관일 뿐이었다. 고작 자작 가의 차남이었고. 자신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알고서 하는 말입니다. 알폰스 사이키델리아 제1 왕자님의 약혼녀인 아비게일 페르디난드 영애.”

단순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페르디난드 가는 왕족 다음으로 사이키델리아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공작 가였다. 대대로 사이키델리아 왕족과 혼인하는 건 페르디난드 가였다. 그에 따라 아비게일 또한 태어나자마자 알폰스와의 혼인이 약속되었다.

단순한 약혼녀가 아니었다. 자신은 미래의 왕비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자신의 신분에 전혀 위축되지 않아 보였다. 방금 전까지 예의상 차렸던 미소는 다 사라지고 냉철하고 무감한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 때문인가요?”

아비게일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녀’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사람이 스쳤다. 하지만 퍼스는 일단 부정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날 거절하고도 무사할 것 같나요? 그녀에게 안부 전해줘요. 앞으로 많이 힘들 테니까.”

그 말만 하고 아비게일은 먼저 뒤돌아섰다. 망설임 없는 뒤태가 아까까지 휘청거렸던 건 다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녀를 바로 따르지 않고, 퍼스는 한동안 후원에 머물렀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그녀도 제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것보단 다른 쪽이 훨씬 걱정이었다.

“뭐라고 말한담….”

그답지 않게 앞머리를 헝클며, 고뇌했다. 자신을 이렇게 한심하게 만드는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뿐이었다.

***

저녁을 먹던 중, 리아는 봉변을 당했다. 아니, 상대방 또한 봉변이었을지 모른다. 결론적으로는 사고에 가까웠다. 양측 모두.

“고백이란 말이지….”

아직 저녁을 다 먹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맛이 뚝 떨어졌다. 눈앞의 장면은 선명하게 새겨져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놀란 퍼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이후에 이어진 찬사의 말도 기억했다. 아름다운 외모를 칭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거에 무감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내용이라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리아는 슬그머니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뭐,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영애처럼 빼어나게 예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정도였다. 자신의 외모가 두 오라버니에 비해 빼어나지 않다는 사실은 어릴 때부터 뼈에 새겨질 정도로 잘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하지…?”

새삼스레 그 사실이 상처가 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기숙사로 온 이후부터 그녀의 기분은 저조했다. 꿉꿉한 공기가 그녀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 듯했다. 아무래도 오늘 아비게일을 마주쳐서 그런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를 차치하고, 상대방에게서 노골적인 악의를 받는 것은 지치는 일이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일단 자는 것도 방법 중 하나였다. 리아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고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

밤새 잠을 설쳤다. 몸은 일어났지만, 정신은 쉽게 깨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피부의 혈색이 돌아오길 바라며, 리아는 눈가를 쓰다듬었다.

“피곤하신가요?”

아침부터 눈앞에 보일 리 없던 적발이 보여 적잖이 당황했다. 매일 어떻게 정돈하는지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이었다. 멍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만 떠올렸다.

“리아 양?”

조심스런 손길이 얼굴에 닿기 직전이었다. 정신을 차린 리아는 서둘러 몸을 뺐다. 갑작스런 접촉에 리아도 놀랐지만, 거절당한 퍼스도 놀랐다. 애초에 자신이 손을 뻗은 적이 몇 없어 거절당한다는 것조차 잊고 살았던 참이었다. 그의 손은 맨손이었다. 사과의 말에 앞서, 약간의 조언만 얻고 싶었다. 그뿐이었는데, 리아는 마치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그의 손을 피했다.

리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퍼스를 바라보았다. 너무 흠칫 놀랐으니 그가 민망할 터였다. 하지만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밤새 자신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은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

“아침… 일찍부터 어쩐 일이신가요?”

부지런하기도 했다. 자신은 아직 정신이 제대로 깨지도 않았는데. 그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제 출근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단정한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부터 쨍한 햇살 때문인지 리아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의 사소한 행동에도 퍼스는 불안했다. 왠지 좋지 않은 징조 같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 곧 두 번째 달도 끝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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