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운수 나쁜 날 (1)
그날 아침은 유독 날씨가 좋았다. 하지만 퍼스는 날씨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인공적으로 기후 능력자가 조절한 날씨이므로. 조금 더 맑고 흐리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햇빛은 중요했다. 리아가 처음 만났을 즈음 선물했던 식물이 이제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웬만한 봄꽃은 다 피고 지는 시점인데 아직 안 핀 것으로 보아, 초여름쯤 피는 꽃인 듯했다.
원래 식물의 생장 따위 전혀 관심 없는 그이지만, 그 식물은 달랐다. 태어나 처음 선물 받은 식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가 준 식물이었으니까. 적어도 시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퍼스는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늘 그렇듯 단정한 모습의 남자가 서 있었다. 비틀어진 옷깃을 바로 하고 방을 나가려 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흰 장갑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원래 같았으면 하지 않을 고민이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않기 위해 이 장갑을 착용했다. 최근, 리아의 일도 있어 하이버 지역에서 돌아올 때까진 맨손으로 다녔다. 하지만 사람 접촉이 많은 왕궁에서 맨손으로 타인의 생각에 노출되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장갑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달그락.
“아.”
장갑을 집어 들자 옆에 있던 브로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축제 때 리아와 함께 커플 대회에 출전해 받아낸 상품이었다. 나름 지역 축제를 위해서 준비한 상품치고는 부실했다. 고개를 숙여 브로치를 집으려고 보니, 일부 조각이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부실하게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조각까지 함께 주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봐야겠군.”
하루의 시작이 별로 좋지 않았다.
***
“입궁을 환영합니다, 페르디난드 영애.”
“별말씀을요. 알폰스 왕자님께서 무사히 하이버 지역에 다녀오셔서 기쁩니다.”
“다 영애가 걱정해주신 덕분이죠.”
언제나와 같이 겉으로만 완벽한 커플을 보며, 퍼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정략이라고는 하나, 저렇게까지 완벽하게 사이좋은 척할 필요 있을까 싶었다. 이번 아비게일의 방문은 왕비의 초대 때문이었다. 명목상은 그랬지만, 사실 왕비는 알폰스와 아비게일이 진짜로 친해졌으면 해서 부른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미리 알폰스 측에 일정을 전달하지 않아, 그는 다른 일정이 잡힌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영애. 영애께서 기껏 입궁해주셨는데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네요.”
“전 괜찮습니다. 바쁘신데 제가 미리 연락도 없이 입궁한 게 잘못이죠.”
“아닙니다, 영애. 저녁까진 돌아올 테니 식사라도 함께하시죠. 그동안 후원이라도 둘러보는 건 어떠실까요?”
퍼스는 왕자 궁의 후원을 떠올리고 살짝 인상을 썼다. 알폰스의 이상한 꽃 알레르기 때문에 후원은 꽃 한 송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예전에 딱 한 번 존재하기는 했지만, 현재는 모두 지고 없는 상태였다.
“아까 왕비 마마를 뵈었을 때, 온실을 꼭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괜찮으시다면 온실 구경을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온실 쪽으로 가시면 관리인들이 잘 안내해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온실로 가는 길을 몰라서요.”
그렇게 말한 아비게일은 퍼스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왜 저를 바라보나 하는 생각으로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이럴 때만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알폰스가 퍼스를 추천했다.
“그럼 제 보좌관인 퍼스를 따라가시면 되겠네요. 퍼스, 페르디난드 영애를 온실까지 안내해드리게.”
“아, 네. 알겠습니다. 영애,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실 궁의 안내 따위 아무나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비게일이 자신을 지목한 이상,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이렇게 산더미처럼 일이 많은 날 기타 업무가 생기다니, 조금 재수가 없었다. 게다가 혼자 보낸 알폰스가 걱정이었지만, 준비는 철저하게 시켰으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었다. 퍼스는 온실로 가며 리아를 떠올렸다. 그녀는 과연 고민 끝에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케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혹시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을까. 그녀에 대해 생각하니 목이 조금 칼칼한 느낌이 들었다.
“퍼스 님,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온실은 예쁜가요?”
그때, 아비게일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원래도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라 퍼스는 묵묵히 길 안내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길고 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었다. 온실은 예쁘냐는 질문에 퍼스는 고민했다. 그는 무엇을 예쁘다 안 예쁘다는 기준으로 판단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특히 사물이나 공간에 대해서는 더욱. 그 순간, 언젠가 리아가 웃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왕비 마마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이렇게 예쁜 온실을 만들 생각을 하시다니. 덕분에 저는 희귀한 식물을 정말 많이 보게 되어서 좋아요.
솔직히 그에게 온실이 어떻냐고 물어보면, 쓸데없이 크다고밖에 말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거였다. 완벽하다고 하면, 완벽한 거였고. 퍼스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배었다.
“네, 예쁩니다.”
처음으로 보는 진심 어린 미소에 아비게일은 넋을 놓고 황홀해했다. 역시 그의 얼굴은 완벽하게 제 타입이었다. 사람들은 냉정하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저는 그 안에 다른 모습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저렇게 웃는 걸 보니, 그 또한 제게 마음을 연 게 틀림없었다. 저도 모르게 우쭐해서 그와 팔짱이라도 끼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궁이었다. 이렇게 공공연한 장소에서 그와 접촉하려면 핑계가 필요했다.
“후후후.”
아비게일은 쥘 부채로 입을 가리고 살며시 웃었다. 웃는 그녀를 보며 퍼스는 뒤돌아 인상을 썼다. 어째서 저렇게 이상하게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온실에 대한 기대겠거니 싶어 무시하기로 했다.
***
“어디부터 보시겠습니까?”
“사막 기후 관리 부서라는 곳에 왕비 마마께서 가장 아끼는 식물이 있다던데요?”
사막의 기적 이야기였다. 자연히 따라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담당자가 와서 안내할 겁니다.”
그 담당자로는 달갑지 않은 얼굴이 나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지만. 상대방도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사막 기후 관리 부서장, 케빈 아크우드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페르디난드 영애.”
“저도요.”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의 눈에선 살짝 불쾌감이 드러났다. 영애는 케빈의 이름을 듣고 그의 신분을 추측한 모양이었다. 그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여기 모래가 정말 걷기 힘드네요. 죄송하지만 제 손 좀 잡아주시겠어요?”
영애는 온실 안에 들어오자 제대로 걷질 못했다. 고작 그거 걷고 다리에 힘이 풀린 건 아니겠지. 의심을 거두며, 퍼스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오늘 흰 장갑을 끼고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들은 오아시스 지역으로 먼저 향했다. 여기 어딘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만나니 퍼스는 내심 반가웠다. 하지만 그녀는 퍼스의 옆에 있는 아비게일에게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냈다.
“만지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심지어 퍼스가 잘못해서 화가 났을 때도 그렇게까지 냉정한 어투는 아니었었다.
“그랬군요?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독이 있다니. 의외성이 있네요. 그렇죠, 퍼스 님?”
“네, 그렇네요.”
아비게일은 퍼스의 가까이에 와서 섰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영애,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안에 있는 어떤 식물도 관리자가 아니면 함부로 손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함부로 만지면서 훼손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케빈 또한 아비게일의 태도가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듯했다. 두 사람의 적대적인 태도에 아비게일도 겁을 먹었는지 퍼스에게 몸을 기대려 했다.
“어머, 정말 몰랐어요. 퍼스 님, 이분들께 제가 고의로 한 행동은 아니란 걸 설명해주시겠어요?”
노골적인 무시였다. 주변에 있던 자들이 제대로 표정을 관리하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이 정도 무시는 퍼스에게는 익숙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알폰스의 약혼녀인 그녀의 심기를 함부로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페르디난드 영애께선 온실의 규칙에 대해 잘 모르십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저 없이 대신 고개를 숙였다. 숙였던 고개를 드는 순간, 빨개진 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아비게일의 편을 들으면서 자신을 무시했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해였지만, 지금 당장은 풀 재간이 없었다.
“앗!”
“조심하십시오.”
그 순간, 아비게일이 발을 헛디뎠다. 퍼스는 자연스레 그녀를 부축했다. 애초에 이런 복장으로 사막 기후 관리 부서를 구경한다고 했던 것부터가 문제 아니었을까? 그는 저도 모르게 아비게일의 드레스 하단을 노려보았다.
“아주 인기쟁이시네.”
작은 소리였지만, 청력이 좋은 퍼스는 똑똑히 들었다. 케빈이 자신을 비꼬는 말이었다. 자신은 업무를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기분 나쁜 오해는 그만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케빈은 모른 척 돌아섰다.
***
“다음에는 사막의 기적을 보고 싶어요.”
“아쉽지만 영애, 그 식물을 보러 가려면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 지역을 건너가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차림으로는 좀 어려우실 듯하네요.”
“퍼스 님…?”
케빈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를 표하자, 아비게일은 퍼스에게 찬성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음에 가시는 게 어떨까요, 영애?”
아비게일은 빤히 퍼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어떻게든 해보라는 압박이었다. 하지만 그가 업고라도 가지 않는 한, 평지에서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이 영애는 갈 수 없을 게 뻔했다. 그가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않자, 아비게일도 모처럼 마음을 써 물러나기로 했다. 퍼스가 아니라면 당장에 그녀의 시선이 곱지 않아졌을 터였다. 그 증거로 케빈을 보는 표정은 벌써 일그러져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왕자님의 후원이라도 구경 가도록 하죠.”
“다른 부서는 안 보십니까? 후원엔 영애께서 볼만한 꽃은 한 송이도 없는 걸로 알아서요.”
케빈이 물었다. 온실에는 다양한 기후를 기반으로 한 부서가 존재했다. 그중 사막 기후 관리 부서는 그다지 식물이 다양하지 않은 부서에 속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사막 기후 관리 부서만 지목했고, 다른 부서는 돌아보지도 않겠다고 하고 있었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녀의 목적이 뭔지는 분명했다. 케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겠습니다. 가죠, 퍼스 님.”
“네.”
다른 부서까지는 케빈이 담당할 필요가 없기에, 그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며 퍼스와 케빈의 눈이 마주쳤다.
“당신, 정말 바보군.”
케빈이 퍼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퍼스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한마디를 남겼다.
“태어나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