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58)화 (58/75)

#58. 뜻밖의 재난

메이에게 상담한 이후, 리아는 밤새 고민에 시달렸다. 그녀가 말해 준 조건에 맞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새벽이 넘어가 결론이 났을 때는,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야, 넌 어제 쉬었는데 얼굴이 왜 그래?”

“어제 사막의 기적을 어떻게 하면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요….”

“새삼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야?”

자연스레 거짓말이 나왔다. 케빈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리아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느라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한 달 남았는걸요.”

“그래. 아직 한 달이나 남았잖아. 미리 걱정하지 마.”

리아는 빤히 고개를 들어 케빈을 바라봤다. 케빈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처져 있으면 이렇게 위로도 해줬다. 처음의 까칠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케빈은 리아의 인사에 살짝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를 보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지난밤, 끈질긴 고민의 결과는 ‘아니오’였다. 리아는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랐다. 죄책감 때문인지 그는 전보다 리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덜 하게 되었다. 덕분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전달하려면 먼저 말을 꺼내야만 했다.

“케, 케빈 님….”

“응?”

되묻는 케빈의 목소리가 묘하게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리아를 구원하듯 천막을 걷고 참견인이 나타났다.

“케빈 님, 온실에 손님이 오실 것 같습니다.”

“손님?”

그의 인상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그는 별로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낯선 사람이 찾아온다는 소식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왕비 마마께서 직접 초대한 손님이시라고 하는데요.”

“그런가? 누구지?”

이 온실의 주인은 왕비였다. 명실상부 이 온실이 생길 수 있던 것도, 이 온실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왕비 덕분이었다. 아무리 케빈이라도 왕비의 손님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아비게일 페르디난드 공녀라고 합니다.”

익숙한 이름에 리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케빈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뭘 준비하면 되지?”

“온실을 안내해주었으면 한다고 합니다.”

“여기부터?”

“네. 특이하게 영애가 여기부터 보길 희망했다고 하는군요.”

알 만도 했다. 케빈은 슬쩍 고개를 돌려 리아를 보았다. 썩 유쾌해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지난번 페르디난드 저택 방문 때로 보아 둘 사이가 좋지는 않은 듯했다. 그는 슬쩍 리아를 떠보았다.

“괜찮겠어?”

“뭐가요?”

하지만 리아는 짐짓 모른 체했다. 자신은 온실에서 일하는 근무자일 뿐이었다. 지금은 페넬로페 영애로서 그녀를 맞는 것도 아니므로, 그녀가 직접 안내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직장에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오는 건 기분이 나빴다.

“정말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야.”

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눈치를 보는 건 오히려 케빈이었다.

“오늘은 내가 봐 주질 못하니까 오아시스 쪽에 가 있어.”

“네, 알겠습니다.”

***

사실 케빈은 남에게 둔한 편이었다. 하지만 리아를 좋아하고 나서, 자신도 남의 기분을 미리 알아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그녀의 행동을 보며,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낯선 손님의 방문이 조금은 달가웠다. 하지만 리아를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이라면, 안 오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발밑 조심하시지요.”

“감사합니다, 퍼스 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왕비가 초대한 손님을 퍼스가 안내하고 있었다. 그녀는 온실에서 걷기 정말 부적합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구두도 얼마나 불편한 걸 신었는지 열 번 걸으면 한 번은 퍼스 쪽으로 쓰러지려고 했다.

“여기 모래가 정말 걷기 힘드네요. 죄송하지만 제 손 좀 잡아주시겠어요?”

그 많은 수행인을 제치고, 아비게일은 굳이 왕자의 보좌관인 퍼스를 선택했다. 심지어 약혼자인 왕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퍼스는 평소처럼 답답한 흰 장갑을 낀 손을 아비게일에게 내밀었다. 아비게일이 살며시 손을 올려놓으며 수줍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케빈은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짐작했다. 아마 신분이 높으신 어떤 아가씨가 왕자의 보좌관 수행으로 온실을 보고 싶다고 떼를 쓴 모양이었다. 퍼스는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사막 기후에서 식물이 잘 자라는 곳은 오아시스입니다. 그쪽으로 먼저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네, 물론이에요. 오아시스라니 책으로밖에 본 적이 없는데 기대되네요.”

완벽하게 교육받은 영애였다. 방금 그 말도 모두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꺼낸 말이 분명했다.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딱 케빈이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러 사람의 앞에서 굳이 자신의 혐오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사막 기후 관리 부서의 관리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고작 식물에 무지한 영애 안내역이라는 사실이 통탄스러웠을 뿐이었다.

“와, 이곳이 오아시스군요.”

오아시스 구역은 근무하는 사람이 제일 많은 곳이기도 했다. 낯선 손님의 방문에 대해 미리 언질을 들었는지, 일하던 자들은 아비게일이 지나가면 일어나 인사했다. 그녀는 상냥하게도 모든 이들의 인사를 웃으며 받아줬다. 케빈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리아를 찾았다.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아비게일을 보면 기분이 나빠질 게 분명했다.

‘그냥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천막에 있으라고 할 걸 그랬나?’

그는 티가 나지 않게 눈으로만 리아를 찾았다.

“이쪽이 꽃이 제일 많이 피는 지역입니다.”

“사막에도 이렇게 많은 꽃이 필 수 있군요!”

아비게일은 진심으로 많은 꽃에 놀란 듯했다. 사막에서는 꽃 한 송이 피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눈앞의 꽃송이를 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만지시면 안 됩니다.”

그때, 조금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 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듣자마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페넬로페 영애.”

리아는 여전히 아비게일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퍼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걸 일부러 보여주려고 사막 기후 관리 부서에 제일 먼저 들른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이러려고 입궁한 건가 싶기도 했다.

케빈은 슬쩍 퍼스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리아의 등장에도 언제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등장한 이후로 그의 시선은 계속 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리아는 퍼스에게 인사하는 대신 아비게일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아까의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꽃은 독성이 있습니다. 맨손으로 만지면 안 되는 꽃이어서요.”

역시나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아비게일을 만난 게 불쾌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비게일은 다른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군요?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독이 있다니. 의외성이 있네요. 그렇죠, 퍼스 님?”

“네, 그렇네요.”

그녀는 꽃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면서 일부러 퍼스의 가까이에 섰다.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닿을 듯한 거리였다. 리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영애,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안에 있는 어떤 식물도 관리자가 아니면 함부로 손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함부로 만지면서 훼손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케빈 역시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함부로 손을 대는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기도 했지만, 그녀가 리아의 기분을 나쁘게 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케빈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아비게일은 살짝 겁먹은 척했다.

“어머, 정말 몰랐어요. 퍼스 님, 이분들께 제가 고의로 한 행동은 아니란 걸 설명해주시겠어요?”

순간 자제심을 잃고 케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케빈과 직접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약간의 경멸이 느껴졌다.

“페르디난드 영애께선 온실의 규칙에 대해 잘 모르십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퍼스는 순순히 아비게일이 부탁한 대로 사과했다. 그가 대신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리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 반응을 보고 케빈은 확신했다. 리아가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했든 안 했든 지금 그녀는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아닙니다. 충분히 모르실 수 있죠. 그럼 계속해서 이쪽으로 오시죠.”

케빈은 일부러 일행을 리아가 일하고 있던 곳에서 다른 쪽으로 유도했다.

“앗!”

“조심하십시오.”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아비게일은 몸을 휘청였다. 퍼스는 익숙한 듯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아챘다. 오는 길 내내 발걸음도 제대로 못 옮기는 그녀를 지탱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죄송해요….”

“아닙니다, 영애.”

부들부들 떨던 리아는 아비게일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하던 일을 하려 쪼그리고 앉았다. 퍼스는 이 모든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똑똑한 줄 알았던 그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케빈은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인기쟁이시네.”

***

푹. 푹.

“리아.”

“…….”

“리아!”

“네!”

넋을 놓고 땅만 파고 있던 리아는 제 이름이 몇 차례 불리고 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왜 땅을 그렇게 깊게 파고 있어? 아예 거기에 씨앗부터 심을 셈이야?”

같이 일하던 선임 담당자가 주의를 줬다. 리아는 순순히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그러곤 재빠르게 흙으로 바닥을 덮었다. 지금 리아가 심고 있는 식물은 땅을 아주 조금씩만 파서 심으면 되는 식물이었다. 리아는 자신이 왜 이렇게 동요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비게일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기분이 더 나빠진 건 그녀의 옆에 퍼스가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손을 잡고서. 그는 분명 스킨십을 꺼리는 사람이었다. 물론 에스코트 정도야 흰 장갑 위로 할 수 있었지만. 거리낌 없이 넘어지는 아비게일을 잡아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부 제게도 이전에 해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마지막에 넘어지는 척 퍼스의 몸에 기대면서 그녀는 분명 자신을 비웃었다.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었다. 마치 ‘이게 너와 나의 차이야’라고 보여주는 듯했다.

그날 오후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비게일은 사막 기후 관리 부서 외에도 몇 곳을 더 둘러보고 온실을 나간 듯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온통 그녀 얘기뿐이었다.

“정말 예쁘지 않아? 저택에 갔을 때도 생각했지만 인형 같다.”

“퍼스 님과 둘이 나란히 서 있으니까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영애는 알폰스 왕자님과 약혼했는데.”

“약혼자의 보좌관과 금단의 사랑! 어때?”

그들은 마치 그게 재밌는 이야기인 양 킬킬대고 웃었다. 하지만 리아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장난도 농담도 아닌 사실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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