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건 어떻게 아는 거죠
먼 여정의 대가로 꿀 같은 휴가가 하루 주어졌다. 단비와도 같은 늦잠을 자며, 리아는 자신의 방이란 게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그게 비록 저택이 아닌 기숙사 방이라고 할지라도. 기숙사 방 침대에 피할 곳 없이 햇살이 쏟아졌다.
덕분에 눈을 뜨고도 리아는 한참을 빈둥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일하고 있을 때 이렇게 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메이는 지난밤 리아가 으스러지도록 그녀를 껴안았다. 오랜만이라 반가워서가 아니라, 다음 날이 휴일인 그녀가 너무 부러워서. 압사시켜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실패했지만.
“끄으. 좋다아!”
아주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느낌이었다. 아직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개운한 느낌이 좋았다. 리아는 될 수 있는 한 오래 미적거리다가 배가 고플 때가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거울로 확인하지 않아도 머리가 산발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로소 몸을 씻은 리아는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냈다. 배고프지만 먼저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식사 시간까지 기다릴 겸 그녀는 온실에서 사막의 기적 상태를 확인하러 가기로 했다.
“오, 리아 님. 오랜만입니다.”
온실 입구 관리인이 살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받기엔, 하이버 지역에 간 기간이 짧았다. 하지만 리아는 기쁘게 그 인사를 받기로 했다.
“오랜만이에요.”
자연스레 온도 유지를 위한 목걸이를 건네받고, 사막의 기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 대신 사막의 기적을 담당했던 자는 생각지 못한 방문에 깜짝 놀랐다.
“오늘 휴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할 일이 없어서요. 상태만 확인하려고 왔어요.”
“성실도 하셔라.”
리아는 끈으로 머리를 올려 묶었다. 오랜만에 사막의 기적을 보려고 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안녕, 잘 있었니?”
자신이 없는 동안도 담당자가 습도를 잘 유지한 듯했다. 작은 물방울들이 사막의 기적에 잘 안착해 있었다. 썩은 흔적도 보이지 않고, 시들해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안개 분사 방법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부탁하신 대로 안개 형태로 물을 분사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군요. 정말 그런 걸로 물을 흡수하다니. 꼭 뿌리가 필요 없는 식물 같네요.”
담당자는 순수하게 사막의 기적이 물을 직접 주지 않아도 살아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농담과도 같은 말이었지만, 리아는 자꾸만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다른 걸 알아보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페넬로페 영애.”
“그냥 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리아 양. 어느 분야로 연결해드릴까요?”
“식물 관련 분야요.”
“여전히 일에 흥미가 넘치시네요. 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관리인은 웃으며 상자에 손을 얹었다. 몇 바퀴 돌리던 그는 웃으며 입구를 가리켰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리아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여전히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이번엔 불청객이 없길 바라며, 리아는 주위를 먼저 살폈다. 간간이 책을 정리하는 사서 외엔 다행히 방해가 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리아는 사서에게 물어 필요한 책 몇 권을 추천받았다. 천천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곧 식사 시간이었으니까. 리아가 금세 나오자 관리인은 조금 놀라워했다.
“벌써 가시나요?”
“곧 식사 시간이에요.”
“아.”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오세요.”
관리인을 등진 리아는 책을 기숙사에 놓고 식사하러 갈까 고민했다. 두꺼운 책들이라 제법 무거웠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동선이 복잡하니 그냥 들고 식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책을 몽땅 빼앗아갔다.
“굉장히 무거운 책을 선호하시는군요.”
“안녕하세요, 퍼스 님. 잘 쉬고 계신가요?”
거의 매일 봤지만 왕궁에서 보니 왠지 오랜만에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퍼스와 리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었다.
“사실 전 쉬진 않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밀린 일이 많더군요.”
쉬지 않고 일하면 피곤할 텐데, 그에게선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왕자궁은 역시 일이 많나 봐요?”
“네. 제 상관이 제대로 일해준다면 좀 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는 대범하게도 왕자궁 근처에서 상관의 험담을 했다. 리아가 눈치를 보듯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몸을 기울인 퍼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방금 그 말은 비밀입니다.”
“비밀을 그렇게 크게 말하신다고요?”
“솔직히 좀 알아줬으면 하는 본심도 있어서요.”
언제 이렇게 농담도 잘하게 되었을까. 리아는 그와 이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거웠다. 역시 친구 사이라서 그럴까. 그렇게 결론 내리기엔 자신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아주 조금 눈을 피하게 됐다.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기분 때문이었다.
“그럼 오랜만에 후원에서 같이 식사하실까요?”
“예, 당연하죠.”
왕궁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기후 능력자들이 노력해서겠지만, 왠지 그냥 둬도 오늘은 좋은 날씨였을 것 같았다. 날씨도 좋고, 음식도 맛있었다. 게다가 옆에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정하게 웃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리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리아 양이 왕궁에 오신 지 이제 두 달이 되어가네요.”
“네, 그리고 저는 왕궁에 온 지 두 달이 되어가도록 사막의 기적을 살려만 두고 있죠. 쉬는 날 그걸 꼭 지적하셔야 했나요?”
장난으로 리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퍼스는 진심으로 당황하면서 그녀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고.”
“장난이에요. 근데 새삼 그건 왜요?”
장난이라는 말에도 퍼스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지금까지 자신이 제대로 눈치채지 못해서 그녀가 화났던 일이 수두룩했으니까. 하지만 느닷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사실관계를 확인해볼 순 없었다. 다행히 그녀의 기분을 망친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 입궁하실 때 백작님과 했던 계약 때문입니다만….”
“아.”
리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케빈이 자신에게 고백했다는 걸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소개 상대로 있는 이번 한 달 동안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달라고 했었다. 그의 적극적인 어필에도 불구하고, 리아는 그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여전히 몰랐다.
“완전히 잊고 계셨다는 것 같은데요.”
“맞아요. 요즘 정신이 없어서요.”
“이해합니다. 그럴만하셨으니까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사이 리아가 나쁜 기억이라도 떠올릴까 봐, 퍼스는 재빠르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두 번째로 소개해드렸던 케빈 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대충 대답은 짐작이 갔다. 알면서도 일부러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케빈에 대해 제대로 된 결론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스러워하기도 했고. 하지만 빠르게 결론을 내려줬으면 했다. 부정적인 쪽으로. 그게 자신에게 유리하기도 했고. 일부러 몰아붙여서 성급한 결론을 받아내려는 속셈이 있기도 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은 혹시 케빈 님께 가능성이 있다는 뜻인가요? 아, 세 번째 사람을 소개해야 할지 말지 결정하려면 꼭 알아야만 해서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퍼스는 변명을 덧붙였다. 그가 이렇게 말을 빠르게 필요 이상으로 많이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리아는 고민에 빠져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케빈은 좋은 상관이었다. 좋은 남자기도 했다. 위기의 순간에서 그가 없었더라면 리아는 맨정신으로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연 그 이상일까? 그에게 호감이 있는 건 확실했다. 적어도 싫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좋아하는 걸까? 생각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도돌이표와 같은 의문을 반복하며, 리아는 끙끙 앓았다.
“조금만 더 고민해봐도 될까요?”
퍼스는 이해심 많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고민할수록 케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으니까. 될 수 있다면 그녀의 머리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게 자신이었으면 했다.
***
리아가 왕궁에서 만난 가장 완벽한 친구의 유일한 단점은 남의 고민을 듣고 재밌어한다는 점이었다.
“메이, 이 상황이 재밌어요?”
“그래서 퍼스 님이 너한테 빨리 결론 좀 내리라고 재촉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다음 상대를 정하기 위해 정보가 필요하다고는 했어요.”
“그게 그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메이는 다른 의미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웃고 있는 저 입매가 수상했다.
“드디어 행동하기로 했나 보군. 굼뜨기는.”
“제 일인데 저한테 해석해가면서 말씀해주시면 안 되나요?”
메이는 자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아직 어린애는 알 거 없다.’면서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어린애라뇨. 성년식을 치른 지가 언젠데.”
“성년식이 지났다고 다 어른은 아니지. 아무튼, 하이버에서 별다른 진전은 없었고?”
“어린애라 잘 모르겠는데요.”
“너무해!”
잡담을 주고받으니 비로소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계속 장난만 하던 메이도 한참 웃고 나서야 진지하게 고민해주기 시작했다.
“흠. 그럼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현재 상태요?”
메이는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다른 주제로 샐 것 같아서 리아는 꾹 참았다.
“케빈 님을 좋아해?”
“그러니까 그걸 잘 모르겠다니까요….”
리아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퍼스에게 했던 말처럼 ‘그는 좋은 상사고….’로 시작되는 문장만 맴돌았다.
“아, 뭐가 문젠지 알겠어. 일단 넌 좋아하는 마음이 뭔지를 알아야 하는 수준인 거지.”
“그럴지도 몰라요. 메이는 누굴 좋아해 본 적 있어요?”
되레 리아가 물었다. 메이는 거만한 자세 그대로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누구요? 언제요?”
“글쎄. 어릴 때 좋아했던 남자애? 식당 알바 하면서 만난 사람도 하나 있고…. 더 말해?”
“더 있단 말이에요?”
리아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지였다. 갑자기 메이가 엄청 대단해 보였다. 우러러보는 표정을 보더니, 메이는 쑥스러워했다.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아.”
“하지만 적어도 저한테는 대단해 보여요.”
“…뭘.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하잖아.”
리아는 열성적인 학생처럼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도 세차게 끄덕거려서 어지럽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일단, 그 사람을 보면 되게 반갑고, 좋아.”
“매일 보는데 어떻게 매일 반가울 수 있어요?”
“일단 들어.”
“네.”
메이의 엄포에 리아는 얌전히 질문을 멈췄다.
“그리고 항상 그 사람을 보게 되고, 그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지.”
메이의 말을 듣고, 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케빈을 보고 싶어 한 적이 있던가?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완벽한 조건이 있지.”
“그게 뭔데요?”
“그 사람을 좋아하면 만지고 싶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