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걱정 말아요
조금씩 리아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본심을 내보이기 싫었다. 하지만 그가 추궁하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퍼스 또한 그녀의 본심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매일을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그러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리아 양.”
그는 잡은 손을 당겼다. 리아가 힘없이 끌려와서 안겼다. 몸이 닿자, 더욱 그녀의 감정이 강하게 밀려왔다. 슬프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하지만 안 되잖아요. 슈슈 같은 아이가 안 나오려면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와야 하잖아요. 제가 화난다고 모두가 바라던 도움을 망치면 안 되잖아요….”
그녀의 안에서 이성과 진심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이 지역을 도와야 한다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전혀 돕고 싶지 않아 했다. 오히려 자신이 당한 것을 복수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자꾸만 머릿속에서 누가 속삭이는 것 같아요. 억울하다고.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했냐고.”
퍼스는 말없이 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그 작은 위로가 자신의 본심을 받아들여 주는 듯했다. 그래서 리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속죄하듯,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하지만 한 가지만은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불길 속에서 식물을 키웠을 때, 어떤 생각이었는지. 무섭도록 자라난 식물에 어떤 비밀이 있었는지. 대신, 퍼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가 미처 꺼내지 못했던 말을.
“그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았나요?”
꼭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귓가가 간지러운 동시에 뜨거웠다. 동시에 본심을 들킨 리아의 동공이 커졌다. 쿵 하고 가슴 한쪽이 가라앉는 듯했다. 사시나무 떨듯이 리아의 몸이 떨렸다.
“생전, 처음이었어요. 능력으로 누군가를 해치고 싶다고 생각한 것. 그 사람들을 당황시키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사실, 사실….”
죽이려고 했어요. 마지막 그 한마디는 꺼내지 못한 채, 리아는 눈물을 흘렸다. 흐느끼는 그녀를 퍼스는 그저 다독일 뿐이었다. 알폰스에게 회의를 요청한 것도 사실 퍼스였다. 그들에 대한 리아의 분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 또한 그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냉정하고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는 자신이었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은 함부로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 손을 댄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가 너무 싫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벌하길 거부했다. 아이에 대해 남은 일말의 동정 때문인 듯했다. 그러고선 자신의 마음속 어둠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가졌다.
“이런 제가 너무 한심하시죠?”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인간다웠다. 퍼스는 자신의 진심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일부러 몸을 살짝 뗐다. 그러곤 눈물로 엉망이 된 그녀의 볼을 양손으로 닦아 주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살짝 눈물이 맺혀 떨리는 속눈썹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걱정 마세요.”
당신의 바람은 모두 제가 이뤄드릴 테니까. 리아는 퍼스의 말을 오해했다. 자신이 그녀를 싫어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라는 말로. 그 말도 틀리지 않기는 했다.
***
“미쳤나 봐.”
리아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믿기지 않았다. 몸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오늘부터 다시 일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제 워낙 많이 울어서인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미쳤지, 미쳤어. 왜 거기서 울어, 울기는-?”
머릿속에서 계속 어제의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소용없었다. 밤새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이유 없이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감정이 격해졌다고는 하나 저도 모르게 퍼스에게 안겼던 것도 생각이 났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무리 둔한 리아라도 이게 친구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아니, 친구 사이니까 가능한 건가?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생각하기 힘들었다.
“리아, 언제까지 잘 거야!”
참지 못한 케빈이 결국 그녀의 방까지 쫓아왔다. 집합 시간은 벌써 한참 지나 있었다. 나오지 않은 건 리아뿐이었다. 혹시 몸이 안 좋나 걱정했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 아침에 멀쩡한 리아를 봤다고 했다.
“네, 네! 나가요!”
성질 급한 상사 덕분에 상념에 빠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감사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리아는 모자를 써서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그 모자는 뭐야?”
“낮에 바깥에 나가면 피부가 상해요.”
“사막 기후에서는 그냥 일하던 사람이? 언제부터 그렇게 피부 관리를 했어?”
“따지지 마세요.”
장난스레 밀쳤는데, 케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마 다친 부위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사실 온몸이 다쳐서 안 다친 곳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리아의 표정에 죄책감이 서렸다.
“네 탓 아니야. 내가 약한 탓이지.”
“그래도요.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능력을 썼으면….”
“자책하지 마. 그랬어도 아마 결과는 같았을 거야. 네 능력을 한계까지 시험해보려고 했겠지. 오히려 내가 능력이 멀쩡했더라면….”
케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에서 뒷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처음부터 리아와 자신이 납치되지 않게 했거나, 금세 탈출했을 거란 이야기였다.
“그럼 이렇게 해요. 누구의 탓도 아닌 걸로.”
리아는 케빈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이 말을 하는 그녀도 죄책감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만약 이렇게 했더라면…. 저렇게 했더라면…. 생각의 늪에 빠지기 일쑤였다. 가볍게 말했지만, 어려운 결론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겠지만, 마음을 써주는 게 고마웠다. 케빈은 주저하다 리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고맙다.”
그들은 반복해서 드는 생각을 의식의 밑으로 가라앉혔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구황작물의 수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전수했다.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최대한 많이 수확할 수 있도록. 더불어 추운 지역에서 잘 자라는 식물 중 먹을 수 있는 작물 몇 가지도 지역 특성에 맞게 자랄 수 있도록 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조금이라도 하이버 지역의 식량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하이버 백작은 그들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그래서 왕궁으로 출발하기 전날은 모두를 위해 연회를 열기로 했다. 안 좋은 일은 잊고, 좋은 기억만 가지고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 지역의 술은 독했다. 그런 술을 부어라 마셔라 마시다 보니, 다들 금세 취해서 해롱거렸다. 케빈은 상처가 덧난다는 리아의 만류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취해서 갑자기 성격이 밝아진 그는 하이버 성 사람들과 친구가 된 상태였다. 리아는 술주정뱅이들을 피해 정원으로 나왔다. 밖은 추웠지만, 한두 잔 마신 술이 올라와서 딱 적당했다. 리아는 일부러 눈이 쌓인 곳만 골라 밟고 있었다.
“리아 양, 그러다 감기 걸립니다.”
어느샌가 다가온 퍼스가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살짝 취한 리아는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를 열심히 피해 다녔다. 사실은 얼굴을 보는 게 쑥스러웠을 뿐이었지만. 하지만 오늘은 취기 덕분에 용기가 나서인지 리아는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봤다.
“퍼스 님도 해보세요. 돌아가면 못 하잖아요.”
끊임없이 눈을 밟으며 리아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자, 퍼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풀렸다. 자신의 얼굴 상태를 자각도 못 한 채 그녀가 밟은 자국을 따라갔다. 흰 눈을 밟는 게 왜 기분 좋은 일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아마 그녀의 마음을 읽어서 이해한다 하더라도, 같은 감정을 느끼진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좋다면, 그게 뭐든 자신도 좋았다.
“이리 와보세요!”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밖에 나와 차가워진 그녀의 손이 퍼스의 손에서 온기를 빼앗아갔다. 그는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이 손이 닿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엿볼 수 있을지. 만약 안다고 하면 이렇게 주저 없이 손을 내밀 수 있을 리 없었다. 쑥스러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며칠 동안 퍼스를 피해 다녔던 그녀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쉽게도 그에게 들켜버렸으니까. 뭐, 지금의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 같아 보였지만.
“너무 뛰지 마세요.”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잔소리뿐이었다. 아직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제 입으로 능력에 대해 밝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꼭 잡힌 손을 놓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어!”
“조심하세요!”
결국 리아는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재빨리 손을 당겨 퍼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듯한 자세가 되자 리아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미 술을 마셔서 취했다는 변명이 통한다는 것이었다.
“죄송….”
“리아 양.”
“네?”
퍼스는 진지한 목소리로 리아를 불렀다. 벗어나려던 리아는 안긴 상태 그대로 퍼스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하던 그는 리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심장 박동도 엄청났다. 물론 자신의 것도 만만치 않게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는 긴장하는 리아를 보고 한 번 봐주기로 했다.
“왕궁에 돌아가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은 안 되고요?”
“지금은 안 될 것 같군요.”
주로 당신이. 낮게 웃는 그를 보며 리아는 멍해졌다. 언제 이렇게 잘 웃게 되었을까. 게다가 언제 이렇게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흰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다니게 된 걸까.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퍼스 님 손은… 몰랐는데 엄청 길고… 예쁘네요.”
그녀는 이제 퍼스의 맨손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손바닥과 손등을 문질러 촉감을 느끼고, 마디 길이를 재보기도 했다. 그러다 제 손을 뻗어 크기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재보았다. 퍼스의 손바닥이 훨씬 커 그녀의 손이 감춰질 정도였다.
“와, 퍼스 님 손 되게… 커….”
리아가 놀라는 사이, 퍼스는 손을 살짝 틀어 깍지를 꼈다.
“이렇게 접어도 큽니다.”
그러곤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리아는 고개를 숙이곤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표정 관리를 하기 어려웠다. 흐물흐물한 표정을 보면 퍼스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그게 뭐든.
“왜 이렇게 능글능글해졌어요…?”
리아 나름 최선을 다한 항의였다. 쑥스러움을 숨기려 일부러 불퉁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퍼스에겐 그마저도 귀여워 보였다.
“리아 양이 사라졌을 때 정말로 놀랐습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굴려고 애썼다. 겉으로는 충분히 이성적으로 행동했고,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속은 불안함에 들끓고 있었다. 혹시 이대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사라져 버린다는 공포에 비하면 공정함 따위, 신념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닿기를 꺼렸던 건 접촉이 싫다기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예의에 가까웠다. 아무도 제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진흙탕에 손을 넣을 수 있었다. 그게 그녀를 상처 입힌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제 곁에 둘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