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완벽하지 않은
“특히 그들만이 알고 있다는 게 그렇죠. 저는 판잣집이 비어 있는 걸 보고 두 사람이 어딘가로 납치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특히 떨어져 있던 컵에 미묘하게 흰색 가루 자국이 있던 것도 한몫했죠.”
컵에 흰색 가루 자국이 나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냥 물이었다면 그런 자국이 남지 않았을 테니, 이상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고. 물론 퍼스는 컵에 묻어 있는 기억을 보고 납치를 확신한 거였지만.
“그래서 두 사람을 숨길만 한 곳을 먼저 수색했습니다. 근처 경비대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죠. 지도를 보던 중, 옛날 고문실로 쓰였던 곳을 발견했습니다.”
정확히는 지도의 기억을 ‘읽은’ 거였다. 지도에 표시된 곳을 경비병이라고 모두 아는 건 아니었다. 퍼스는 지도에 표시된 고문실을 짚으며 모르는 척 그들에게 이곳은 어디냐고 물었다. 지하에 있는 옛 고문실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망설이는 그들에게 이런 곳일수록 사람을 숨기기 좋다고 우기며 출동을 명령했다. 모두 어이없어했지만 멀리서 온 높은 분의 명령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나서야만 했다. 퍼스는 가본 적도 없으면서 제일 빨리 장소에 도착했다. 병사들은 헤매지도 않고 바로 목적지로 향하는 그를 보며 감탄했다. 물론 이것 또한 주변의 기억을 읽어서였다.
“한 번에 장소를 특정했다고? 밖에서 보니 그 지하실은 문이 열리지 않으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생겼던데.”
병사들은 ‘위에서 파견된 똑똑한 자구나’라고 대충 넘어갔지만, 케빈은 아니었다. 퍼스는 케빈이 바보가 아니라는 게 불만이었다. 대충 넘어가면 될 일을 꼭 이렇게 짚고 넘어가려 했으니까.
“물론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식물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건 리아 양의 능력이었으니까요. 그 식물을 따라가다 보니 금방 알겠더군요. 아니었다면 시간이 더 지체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사실이었다.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 일대 주변의 모든 기억을 읽어낼 작정이었다. 이유는 대강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케빈은 계속해서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들은 한참을 눈싸움하듯 노려보았다. 먼저 눈을 뗀 것은 케빈이었다.
“그래, 뭐. 알아봤자 뭐하겠어. 중요한 건 넌 리아를 구하고 난 하지 못했다는 거겠지.”
드물게 케빈이 시무룩해졌다. 항상 자신감에 차 있던 그라 낯선 광경이었다. 퍼스는 눈썹 한쪽을 올리며 물었다.
“설마 위로를 바라시는 겁니까?”
“누가. 필요 없어, 그런 거.”
케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계속해서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은 능력이 왜 이렇게 약해졌는지. 어째서 리아를 지킬 수 없었는지. 그런 케빈의 모습을 바라보던 퍼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자신이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리아에게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가지는 게 싫어서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충분히 하셨습니다. 리아 양은… 케빈 님이 함께 있어서 무서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니까요. 마지막에 식물을 키우는 동안 케빈 님이 주의를 돌려주셨기 때문에… 리아 양도 그들을 당황하게 할 수 있었고요.”
마치 그 자리에서 보고 온 듯한 말이었다. 게다가 리아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말에 케빈은 멍해졌다. 그가 지어낸 말인지 리아에게 들은 말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퍼스가 자신에게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넸다는 게 의외였다.
“혹시 너… 의외로 좋은 사람이냐?”
“헛소리하시는 걸 보니 건강하신가 봅니다. 그럼 전 이만.”
퍼스는 케빈의 뒷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쑥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 표정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연속해서 처음 보는 모습에 케빈은 한참을 닫힌 문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제정신을 차린 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무래도 큰일을 겪고 나니 사람의 심경이 이상하게 싱숭생숭해지는 모양이었다.
“못 본 걸로 해야겠다.”
***
왕궁에서 보낸 일행을 납치한 데다 위해를 가하기까지 한 건 커다란 사건이었다. 알폰스는 당연히 이 사건을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처벌이야 당연히 이루어지는 거였고, 문제는 이 지역에 대한 도움이었다.
하이버 지역의 식량난을 돕기 위한 자들에게 위해를 가한 셈이었다. 일행 내 도움 자체를 재고해 봐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있었다. 알폰스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관계자를 모아 작은 회의를 개최했다. 리아와 케빈 또한 사건의 당사자로서 참가하게 되었다.
“아시다시피 며칠 전, 여기 있는 두 사람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알폰스는 좌중을 둘러보며 운을 뗐다. 모두 어두운 표정이었다.
“자세한 일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몰랐다고는 하나, 좋은 일을 하러 온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걸 이해할 수 없군요.”
“송구합니다.”
회의에 참석한 하이버 백작이 마을 주민을 대신해 사과했다. 하필 왕자의 일행에게 문제가 생기다니. 게다가 여자 쪽은 하필 페넬로페 백작의 막내딸이라고 했다. 그런 이가 왜 왕궁에서 일하고 있단 말인가. 여러모로 자신도 완전히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웠다.
“해서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인 하이버 지역에 대한 도움을 거두려고 합니다.”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하이버 백작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때, 리아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만, 당사자로서 발언해도 될까요?”
회의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럼에도 리아는 움츠러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퍼스는 그녀를 보고 살짝 인상을 썼다. 이 타이밍에 손을 들어 올린 것으로 보아, 그녀가 뭐라고 할지 대강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네, 말씀하시죠.”
알폰스는 그녀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몇 번 목을 가다듬은 그녀는 발언을 시작했다.
“저는 이곳에 도움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애.”
“그게 두 번째 피해자를 없애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회의 취지에 반하는 내용이었다. 자연히 알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애초에 도움을 주지 않기로 한 것 또한 리아의 기분이 상했을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혹시 제가 납치당한 원인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계시는지요?”
“영애가 식물 능력자이기 때문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제 능력이 왕궁에서는 얼마나 희귀한 능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알폰스는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 그녀의 능력은 왕궁에서는 아주 희귀한 능력이 아니었다. 식물 능력자는 온실에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능력은 제어력이 완벽하게 증명되지도 않았다. 최근 제어력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알폰스는 거기까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다른 능력자가 없지는 않은… 편이지요.”
“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저를 납치해야 할 정도로 능력자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하이버 지역은 능력이 나타나도 약하거나,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맞나요?”
여기에 대답한 것은 하이버 백작이었다. 그는 주위의 눈치를 보다 대답했다. 그 자체도 토착민의 피를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맞습니다.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능력자들에 대해 무지하고, 환상이 많기도 하죠. 개중에는 능력이 있어도 부작용이 심해 잘 쓰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유는 다들 알고 있었다. 토착민의 피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억지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 때문에 중앙에서는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일은 온전히 그들만의 잘못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능력자가 중앙에 몰린 불평등한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능력자만 있으면 식량난이 해결되리라 생각했겠죠.”
일행이 조용해졌다. 리아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어떤 식으로든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다. 그중 먼저 입을 연 것은 퍼스였다.
“그렇다면 영애께서는 어떻게 해결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식량난을 해결하는 방법을 그대로 전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이 지역에 필요한 능력자들을 파견하는 게 어떨까요?”
기존에 주기로 한 도움에 추가적인 도움까지 주겠다는 말이었다. 주변에 소란이 일었다. 소곤거리듯 말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 도움을 줘야 하냐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시끄러워진 와중에 말을 보탠 것은 케빈이었다.
“저도 다른 한 명의 당사자로서 발언해도 될까요?”
“네, 말씀하시죠.”
“저도 하이버 지역을 돕는 데 찬성합니다. 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주 소수의 지역민입니다. 저희가 이대로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돌아가면 다른 지역민들 모두가 피해를 봅니다.”
결국, 당사자 둘 다 지역민을 돕는 데 찬성하는 셈이었다. 알폰스는 고민이 되는지 잠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사실 그로서도 지역민들을 돕고 돌아가는 게 나았다. 애초에 목적도 그것이었고, 자신의 첫 정치적인 행동이었으니까. 당사자들을 배려해서 일부러 철회하려 한 것이었는데 싫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그럼, 알겠습니다. 당사자들이 괜찮다고 하니, 내일부터 원래 예정했던 일들을 진행해주십시오. 단, 원래 예정했던 일정을 더 연장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정도 손해는, 감수해주시죠.”
“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알폰스 왕자님.”
백작은 진심으로 깊이 머리 숙였다. 며칠이라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리아 페넬로페 양이 말했던 능력자 파견은 왕궁으로 돌아가 차후 논의해보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작과 리아가 차례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대로 회의는 해산이었다. 하지만 퍼스는 회의 결과에 대해 완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해산하는 일행들을 헤치고 리아에게 다가갔다.
“여.”
옆에서 친근한 척 케빈이 인사를 했지만, 무시했다.
“퍼스 님, 왜 그러세요?”
“잠깐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곳 외 다른 곳에서 하자는 말인 듯했다. 말하는 그의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리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은 빈방을 찾아 들어갔다. 손님 접대용으로 쓰는 방 중의 하나인 듯했다. 해가 거의 넘어가고 있어서 방이 조금 어두웠다. 하지만 둘 다 불을 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째섭니까?”
무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조금 전 회의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겠지. 리아는 한 번 웃고서는 대답했다.
“케빈 님도 말씀하셨잖아요. 그들 때문에 지역민들 모두에게 피해를 줄 수는….”
“그게 본심이 아니지 않습니까.”
퍼스는 날카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 적나라해서 리아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리아는 그의 눈을 피했다. 그녀는 자신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래도 영지민들이 잘 되었으면….”
퍼스는 한 걸음 더 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서투르게. 이 정도면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거짓말이라는 것을 들킬 정도였다. 그는 살며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끝을 잡았다. 잠깐 움찔하던 그녀는 얌전히 그에게 잡혔다. 그녀의 손끝을 타고 불안해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사실은, 사실은…. 그래요. 아무도 도와주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