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의문
불길이 타고 있었다. 뜨거웠다.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웠다. 몸은 묶여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 누구 없어요!
눈에서 끊임없이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아무리 흐느끼고 소리 질러도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았다. 이제 끝났다, 생각했을 때 희미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면. 내가 당신을 오해했다고, 당신이 날 걱정해서 화낸 건 줄 정말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꼭 말해 주고 싶었다. 왠지 자신을 미안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그에게.
“퍼… 스… 님?”
“리아 양, 정신이 드십니까?”
리아는 눈만 두어 번 깜빡일 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실제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 심정을 충분히 아는지, 퍼스가 먼저 설명을 했다.
“리아 양은 지금 꼬박 이틀을 이렇게 누워 있다 일어나신 거예요. 충분히 혼란스러우실 만합니다.”
시선을 내려보니, 퍼스가 맨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꼭 쥐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무의식적으로 리아 또한 퍼스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의식이 돌아오자, 손에 힘을 뺐다.
하지만 퍼스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은 성의 의무실 같은 곳에 누워 있는 듯했다. 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살폈다. 퍼스 외에 다른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올수록, 쓰러지기 전 기억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케빈 님은요?”
그제야 자신보다 케빈이 더 다쳤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무리하게 일어서려는 리아를 퍼스가 말렸다.
“그분이라면 아주 건강하십니다. 축복받은 신체를 가지고 태어나셨어요. 그 정도 상처인데 흉터만 조금 남고 모두 금방 치유될 거랍니다.”
“정말인가요? 다행이네요.”
안심하면서 동시에 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케빈의 상처는 모두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다쳤더라면 덜 괴로웠을지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리아 양.”
사과의 말은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리아는 퍼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퍼스 님이 사과하세요?”
“제가 조금만 더 빨리 갔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마 자책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저희를 구하러 온 게 퍼스 님 아니신가요? 마지막에 퍼스 님 얼굴을 본 것 같은 기억이 드는데요.”
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를 위로해주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누워 있어서인지 손이 가 닿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행동을 눈치챈 퍼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손끝에 온기가 닿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퍼스 또한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맨손이시네요.”
그의 얼굴을 만지며 리아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보다도 접촉을 싫어했던 그가 직접 얼굴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고 심지어 맨손으로 그 손을 덮고 있었다.
“네, 이제 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이렇게 닿아 있는 순간에도 리아의 안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이 날뛰고 있었다. 얼마나 강렬한 기억이었는지 그녀가 쓰러져 있던 내내 계속해서 눈앞에 반복되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벌이기도 했다.
왜 좀 더 빠르게 그녀를 구하러 가지 못했을까. 심지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면 그녀가 당할 고통을 예측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건 그동안 자신이 계속해서 능력을 거부해온 대가일지도 몰랐다.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는 게 무슨 말인지 리아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변화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일단 하이버 성 지하에 있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처분은 하이버 백작님께서 알아서 하시기로 했습니다.”
“처분….”
아직도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생생했다. 악의에 찬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이 심란했다. 처분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 같은 건 함부로 꺼내기 싫었다. 그때, 슈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슈슈… 그 저희를 납치했던 남자의 아이는요?”
“공범으로 지목되어 찾고 있습니다.”
“아직 아이인데요?”
“아이여도 납치에 가담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 말을 하는 퍼스는 더없이 냉정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이 협상의 여지는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아인… 고의가 아닐 거예요. 아버지에게 속았거나 협박당했을지도 몰라요.”
물론 퍼스는 전말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길바닥을 전전하다 아버지라고 사칭하는 자에게 거둬졌다. 알코올 의존증인 그는 친절하게 대하는 척하면서 아이에게 식량이며 돈을 구걸해올 것을 종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이에게는 없는 아버지라는 가족이 생겨 아이는 기쁘기만 했다.
모두 그자의 얼굴을 움켜쥐며 알아낸 것이었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해 온갖 더러운 짓을 해온 자였다. 리아의 능력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식물 능력자가 있다는 걸 알자마자 팔아 치우려는 생각부터 한 자였다.
리아가 아이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고작 아이가 자신이 하는 일이 범죄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였을 터였다. 그럼에도 퍼스는 아이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이가 저지른 모든 잘못은 차치하더라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으니까. 리아, 그녀의 능력을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에서도 아이에게까지 가혹한 처벌을 내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려면 아이가 필요하니까요.”
그 말에 리아는 안심했다. 하이버 백작도 사건의 전말을 들으면 아이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란 건 금방 알 수 있을 터였다.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잠드는 약을 먹인 슈슈가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아직 아이였다. 애초에 비밀을 만든 자신이 잘못이었다.
“케빈 님을 뵙고 싶어요.”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한참 누워 있었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갈 겁니다.”
“하지만….”
리아의 고집에 퍼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케빈의 상태를 직접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갔다.
“그럼 대신 제가 케빈 님의 상태를 직접 보고 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여러모로 감사해요, 퍼스 님.”
자리에서 일어나는 퍼스의 등에 대고 리아가 인사를 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열고 나섰다.
***
사실 퍼스도 성으로 돌아온 이후 케빈을 보러 가는 건 처음이었다. 갖은 핑계를 대고 리아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퍼스였다. 어떤 이상한 소문이 나든 상관하지 않았다.
똑똑.
“네.”
자고 있길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방 안 사람은 깨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퍼스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병문안 온 사람 얼굴 맞습니까?”
“무척 건강해 보이시는데요.”
“온몸에 붕대 안 보이십니까?”
얼마나 맞았는지, 몸에서 멀쩡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불길을 앞서 걷는 바람에 곳곳에 작은 화상도 입었다. 하지만 정작 다치길 바랐던 입만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입이 안 다쳐서 유감인 표정입니다?”
“저런. 마음을 읽는 능력도 있으십니까?”
케빈은 턱짓으로 침상 옆 의자를 가리켰다. 퍼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발걸음을 옮겨 그 의자에 앉았다.
“리아는 어떻습니까?”
퍼스는 조금 울컥했다. 물론 다친 게 두 사람뿐이니 서로를 걱정하는 게 맞았지만, 눈 뜨자마자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게 아니꼬웠다.
“방금 눈을 떴습니다. 연기를 너무 들이마신 것과 능력을 한꺼번에 많이 써서 탈진한 것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뿐, 몸에는 큰 상처는 없다고 합니다. 쇠사슬에 묶인 자국 정도밖에는.”
별로 아프지 않다고 전달했는데, 리아의 상태가 안 좋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케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군요….”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퍼스가 장난스레 말을 꺼냈다.
“이제 반말은 안 하십니까?”
케빈은 의아해하다가 그가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기억해냈다. 불에서 나온 직후, 자신이 원망스레 내뱉었던 한마디를 가지고 저러는 것이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도 제가 연상 아닌가요?”
연상이라는 말에 퍼스가 대놓고 비웃었다. 지위로 치면 그가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위인지 아래인지 따위 퍼스에겐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아, 그래? 그럼 앞으로 반말하지, 뭐.”
주저 없이 바로 말을 놓는 게 그다웠다. 퍼스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더 트집을 잡기도 귀찮았다.
“근데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씀하시죠.”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퍼스는 케빈을 바라보았다. 이 질문을 던지는 게 어떤 의도인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두 눈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부분은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우연히 마을로 나가는 두 사람을 봐서요.”
“처음부터 미행했잖아. 우연은 무슨.”
부정하기 어려웠다. 이미 눈치챘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퍼스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네. 아무튼 미행했으니까 알았죠.”
“그러다가 중간에 돌아갔잖아.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고. 리아와 내가 있던 지하실을.”
끈질겼다. 미행했단 사실로 대강 넘어갔으면 했는데. 하지만 거짓말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성의 경비병들이 어떻게 그곳을 알았냐고 물어봤었으니까. 하지만 경비병들에게는 솔직하게 미행했다고 말할 순 없었다.
- 우연히 골목에 있던 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웬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슈슈라는 아이의 집으로 갔는데, 보통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이 돌아오는 걸 못 봤다고요.
경비병들에게 한 말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단지 ‘우연히’라는 단어를 넣었을 뿐이지. 물론 아이들에게 직접 소리 내어 답변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약간의 유도신문으로 정답을 ‘본’ 것뿐.
“성에 와보니 두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퍼스는 머리를 굴려 최대한 거짓말을 짜 맞췄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 골목길 아이들에게 물어 판잣집을 찾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뒷부분이었다.
“그 남자는 공간 이동 능력자였어. 자기 말로는 지하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들밖에 없는 데다가 공간 이동 능력을 써서 이동했기 때문에 흔적이 남지도 않았다던데.”
“그건 그 남자의 완벽한 착각입니다.”
공간 이동 능력을 쓴다고 해서 흔적이 남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모든 사물에 기억이 남았으니까. 퍼스만이 알 수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