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52)화 (52/75)

#52. 가장 잔인한 것은 누구?

케빈의 몸은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리아는 이제 울고 소리 지르다 지친 상태였다. 애초에 이런 잔인한 장면을 많이 본 적 없는 그녀였다.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남자는 한참 신이 나서 케빈을 때렸다. 그러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그 외에도 이곳을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이! 잘 되어가?”

한 명이 아니었다. 갑자기 구석에서 빛이 쏟아지더니 여러 명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왔다. 역시 지하가 맞는 모양이었다. 케빈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바로 하며 들어오는 이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려 애썼다. 혹시나 풀려났을 때 바로 알아볼 수 있게. 하나같이 평범한 이들이었다. 모두 마을에서 일하고 있을 법한. 범죄자 인상이랄 게 따로 있냐마는.

“뭐야, 이 남자는?”

“인질로 잡아둔 겁니다. 능력을 써줄 귀한 분께 상처를 낼 순 없으니까요.”

“흐음.”

피떡이 된 케빈의 몰골을 보고 그들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 또한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평소에 범죄를 많이 저지른 적 없는 일반인이란 이야기였다. 예외는 슈슈의 아버지, 한 사람뿐인 듯했다.

“자네가 말한 능력은? 확실한가?”

“저희 슈슈가 봤으니 틀림없습니다. 다만 고집을 부리고 아직 능력을 쓰지 않고 있어서요….”

일행 중 대표 격인 듯한 남자가 나와 리아의 모습을 살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 리아는 자신이 상품이라도 된 듯했다.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얼마에 사실 겁니까?”

남자의 의도는 리아를 파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능력이 필요한 것은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는 실제로 일하지 않으니 필요한 것은 돈뿐이었다. 마을 주민들 또한 더러운 일은 그에게 맡기고, 이익만 취하려 했다.

“하지만 실제로 능력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식물을 기르는 능력이 있다는 걸 믿지?”

“음…. 그것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능력을 보여드리지요.”

리아는 전혀 그의 말을 따를 의사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마을 주민에게서 날카로운 칼을 건네받는 걸 보자마자 소리쳤다.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안 돼!”

케빈이 소리 지르며 말렸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었다. 오히려 그가 이렇게 될 때까지 버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죄송해요, 케빈 님…. 죄송해요….”

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다. 자신이 슈슈에게 능력을 내보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태어나 처음 식물을 키우는 능력이 원망스러웠다. 그녀의 눈물을 영양분으로 자라듯, 한 방울씩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조금씩 화분 안에 있는 식물이 자라났다.

“오오, 정말이잖아…?”

“난 태어나 식물을 기르는 능력자는 처음 봐.”

“나도.”

식물은 엄청난 속도로 자라났다. 이윽고 지하실 바닥이 빽빽하게 찰 정도가 되었다.

“이 정도면 매해 식량 걱정은 덜어도 되겠어!”

“좋아. 약속한 금액은 모두 지불하지.”

“아뇨, 두 배로 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

“한 명을 더 가둬야 하니까요. 당연히 두 배를 주셔야죠.”

“이 녀석은 무슨 능력자인지도 모르잖아.”

물론 케빈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마음이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을 타개할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할 뿐이었다. 이 순간에도, 리아의 식물은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당신들 평범한 마을 주민 같은데 이런 더러운 일에 손을 대도 되겠어…? 감당할 자신은 있고?”

도발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모두가 움찔했다. 마을 주민 중 대표 격인 남자가 대답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살지 않겠나. 중앙에서는 능력자도 많이 배출되고, 날씨가 좋아 식량도 많이 보급되어 모르겠지. 우리의 마음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세를 줄여주지도 않고! 너희가 우리 입장을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이런 짓은 저지르지 않아!”

그들이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태어날 때부터 하이버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차별을 겪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엉뚱한 곳에서 당한 분노를 케빈과 리아에게 쏟는 건 온당치 않았다.

“그것참 안됐군. 하지만 이건 기억해둬. 우린 그걸 해결하기 위해 이번에 중앙에서 파견된 자들이야.”

“너희가?”

그들은 리아와 케빈을 번갈아 보았다. 갑작스러운 말에 남자도 혼란스러운 듯했다. 게다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러 왔다는 말이 걸렸다.

“능력으로 해결한다는 건가? 너도 설마 식물 능력자인가?”

“아니. 그녀를 데려가 능력으로 작물을 키워는 데는 한계가 있어. 애초에 능력이란 것도 무한한 자원이 아니거든. 그렇기 때문에 우린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으려 직접 찾아온 거다.”

“근본적인 해결책?”

“그래. 이 지역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작물을 추천하고,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러 온 거다.”

마을 주민들은 케빈의 말에 동요했다. 그의 말인즉슨,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데 자신들이 방해했다는 거였다. 이대로 놓아줘야 하는 건 아닌지 그들끼리 의논이 시작되었다. 둘을 납치한 남자는 당황했다. 식량 문제가 해결되는 건 자신에게 전혀 이롭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납치를 저질렀고, 이들에게 돈을 받는 것만이 목적이었으니까. 그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안 케빈은 한마디를 더 얹었다.

“…게다가 그녀는 귀족이다. 너희가 함부로 건드려서 좋을 사람이 아니야. 중앙 귀족을 함부로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귀족?”

“이 아가씨가 귀족이라고?”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건데?”

“너희들 전부 다 숙청당할 수 있어. 목숨은 내놓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거겠지?”

케빈의 비웃음에 대답한 건 납치한 남자였다.

“당연히 목숨 정도는 내놓았죠! 게다가 여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만 아는 곳인 데다가, 제가 공간이동 능력을 통해서 왔기 때문에 흔적도 남지 않았으니까!”

그랬던 건가. 결국 능력이 없는 척을 했던 것조차 거짓말이었다.

“자식에게 부끄럽지도 않아…?”

케빈은 인상을 쓰며 그를 비난했다. 쓰러지기 전 마신 물은 슈슈가 건넨 것이었다. 약을 탄 게 그 아이라는 소리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린아이까지 이용하는 모습이 역겨웠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주워온 자식인걸요.”

슈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 태도에 화가 치민 건 리아였다.

“…워.”

“뭐라고요?”

“당신… 정말 역겹다구!”

그녀가 소리침과 동시에 식물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식물은 지하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들의 발밑도 예외는 아니었다. 덩굴처럼 자라난 식물은 금세 다리를 휘감았다. 떼어내도, 떼어내도, 다시 자라나 결국 온몸을 지배해갔다.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리아의 두 눈을 가득 메운 것은 분노뿐이었다. 그들의 몸을 모두 휘감은 식물은 그녀의 분노를 드러냈다. 그녀가 당한 것처럼 다리의 자유를 빼앗고, 팔의 자유를 빼앗고, 이내 시야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리, 리아….”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은 소리 지르며 끊임없이 식물을 떼어냈고, 식물은 끊임없이 자라났다. 마치 뱀이 온몸을 꼬며 타고 오르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화가 난 리아는 케빈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을 주민들과 남자가 혼비백산해서 식물을 떼어내는 장면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고작 풀떼기가!”

남자는 분노해서 지하실에 걸려 있던 불을 바닥에 던졌다. 식물은 쉽게 타지 않았지만, 바닥에 있던 마른 잎들 때문에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사람들은 불을 피하기 위해 결국 지하실 문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켈록, 켈록.”

“쳐들어가려고 했는데 알아서들 잘 기어 나와주시네.”

정신없이 빠져나오던 그들은 밖이 포위되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저마다 숨을 몰아쉬기 급급했다.

“퍼스 님, 어떻게 할까요?”

“모두 포박해서 성으로 데리고 가주세요.”

밖에서 기다려도 리아와 케빈이 나오지 않았다. 퍼스는 마지막으로 올라오던 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뭐, 뭐 하는…!”

“납치범 주제에 입 함부로 여는 거 아닙니다.”

그는 남자의 얼굴을 잡고 끌어당겼다. 언뜻 구해주는 듯싶었지만, 완전히 빠져나오자마자 한쪽으로 패대기쳤다. 그러곤 남자의 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빼냈다. 남자의 뒤로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퍼스는 겉옷을 벗어 입가에 둘렀다.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한 발씩 지하실로 들어갔다.

“커흡! 연기… 들이마시지 마, 리아!”

케빈의 목소리가 났다. 연기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퍼스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케빈 님?”

“퍼스? 쿨럭! 왜… 이제야 와!”

“지금 풀어드리겠습니다.”

“아냐, 뒤쪽! 리아를 먼저 풀어줘!”

그의 말에 퍼스는 뒤를 돌았다. 의식을 잃었는지 축 늘어진 리아가 보였다.

“리아!”

그는 망설이지 않고 리아에게 달려갔다. 그녀 또한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서둘러 풀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버벅거렸다. 침착하려 애쓰며 그녀의 팔에 있는 쇠사슬을 먼저 풀어냈다. 기절했는지 그녀는 힘없이 쓰러졌다. 몸으로 받아내며, 다리에 있는 쇠사슬을 풀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업어 메고, 케빈에게로 다시 가 그도 풀어주었다.

“빨리 나가시죠.”

케빈이 앞장서고, 퍼스가 리아를 안아 들었다. 그는 리아가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도록 자신의 겉옷으로 그녀의 입가를 덮어주었다. 그들은 세찬 불길을 뚫고, 가까스로 바깥에 나올 수 있었다.

“리아 양! 리아 양, 정신 차려 보세요!”

퍼스는 나오자마자 리아를 확인했다. 다행히 기절한 듯했다. 그제야 퍼스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는 맨손으로 그녀와 닿아 있었다. 불길에서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느라 외면했던 장면들이 해일처럼 떠올랐다. 퍼스는 능력 때문에 그녀가 당한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느꼈던 두려움과 분노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퍼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당신.”

케빈은 자신이 반말을 쓰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퍼스 또한 그가 자신에게 반말을 써도 상관없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리아를 끌어안으며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사과를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빨리 왔어야 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빠져나가려는 마을 주민들은 모두 묶여 성으로 압송되고 있었다. 퍼스가 재빠르게 성에 연락한 덕분이었다. 다른 마을 주민들이 모여 불길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지하실의 입구는 좁았고, 탈 것도 많아 불길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케빈은 연기를 너무 들이마셔 몽롱한 상태에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불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한두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랑비처럼 내리던 비는 금세 소나기로 바뀌었다. 덕분에 사람들이 노력할 땐 잡히지 않던 불도 금방 꺼질 수 있었다.

“이게 능력자….”

케빈의 힘은 약한 편이었는데도, 마을 주민들은 멍하니 감탄했다. 그들은 능력에 의지한 생활이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비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내렸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공평하게.

케빈 자신에게도 비가 내렸다. 덕분에 상처에 물이 스며들어 쓰리기 시작했다. 퍼스는 제 몸 젖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아를 감싸 안았다. 애틋한 그의 표정을 보니, 케빈은 입가가 썼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능력을 잃지 않았더라면 리아가 다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퍼스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 이상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늦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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