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51)화 (51/75)

#51. 혹독하게, 잔인하게

파스락. 발밑에서 돌이 굴러가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이렇게 긴장한 건 평생 처음이었다. 자신조차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지금 난생처음 미행이란 걸 하고 있었다.

우연히 성 밖으로 나가는 케빈과 리아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후는 생각해서 움직인 게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성에 있던 누군가에게서 검은 로브를 빌렸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도록 로브를 뒤집어 썼지만 케빈은 대충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용기 없는 자의 발악이지.”

그 말에 울컥해 뛰어나갈 뻔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어디로 갈지, 둘이서 뭘 할지 궁금해서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왕궁 근처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누구도 우연히 자신을 알아볼 리 없을 테니까. 퍼스는 어리석은 선택의 대가로 두 사람이 함께 걸어 다니는 모습을 계속 봐야만 했다. 상관과 보조라는 관계답지 않게 두 사람은 친밀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엔 업무적 관계가 저렇게 가까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리아는 케빈이 뭐라고 말을 할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걸까. 한동안 제게는 보여주지 않은 미소였다. 물론 화나게 한 건 자신이었지만, 사소한 것조차 서운했다. 따라다닐수록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옆에 당당히 서 있고 싶었다. 리아가 돌아오면, 그때는 꼭 빼지 않고 솔직하게 사과하리라. 그렇게 결심했다.

“꼬마야!”

케빈과 리아는 웬 꼬마 하나를 발견했다. 슈슈라고 하는 이름인 듯했다. 퍼스가 화냈던 원인 제공자인 듯했다. 몰래 훔쳐보다 골목길 안쪽에 있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처연한 눈빛이 그의 기억 저편을 찌르는 듯했다. 자신은 저렇게 못 먹고 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버려졌다는 것. 갑작스레 토기가 올라왔다.

- 누가 저런 걸 낳은 거야?

머릿속에 앙칼진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대로 아이들을 보고 있을 수 없어, 퍼스는 몸을 돌렸다. 깨질듯한 두통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아, 제발…. 그만…!”

그는 한참 심호흡을 한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느새 케빈과 리아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래도 슈슈라는 아이와 함께 어딘가로 간 듯했다. 리아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 미행은 그만해야 할 듯했다. 무엇보다 퍼스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

퍼스가 하이버 성에 도착한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다. 두통이 좀처럼 멎지 않아 성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야만 했다. 비로소 머릿속이 잠잠해질 때쯤 성의 모습이 보였다.

“퍼스 님.”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낯익은 인영이 그를 찾아왔다. 왕궁에서 함께 온 냉대 기후 관리 부서 담당자였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온실 관리인 중 케빈 아크우드 님과 리아 페넬로페 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라면 마을에 나간 것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그 뒤를 미행한 게 자신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퍼스는 짐짓 모른 체하며 대답했다.

“우연히 성문 밖으로 나가시는 걸 봐서요. 설마 아직 안 들어오신 겁니까?”

곧 하이버 성이 닫을 시간이었다. 게다가 해질녘 이후 밖을 돌아다니는 건 매우 위험했다. 추위도 추위일뿐더러,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라 어떤 위험 요소가 있을지 몰랐다. 리아는 몰라도 케빈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네. 심지어 연구진들끼리 회의할 시간이 이미 지났습니다. 케빈 님은 약속 시간에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분이라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분명 케빈은 기사단 출신인 데다 몸을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성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건 신체를 운신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이 생겼다는 걸지도 몰랐다. 다시 쫓아야 했다. 판단을 내린 순간, 퍼스는 몸을 돌려 성 밖으로 뛰어나갔다.

“퍼스 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냥 끝까지 쫓아야 했어…!”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앞에 리아의 미소가 아른거렸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상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퍼스는 쉬지 않고 달려 그들을 마지막으로 봤던 골목길까지 달려갔다.

땀이 나고 숨이 찼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아까 눈이 마주쳤던 아이들이 있었다. 다시금 머리가 아파오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약하게 두통 따위에 시달릴 때가 아니었다.

“슈슈, 라는, 아이…. 헉. 집, 좀…. 알려줘…!”

헉헉거리느라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퍼스는 말하면서 한쪽 손에 있는 장갑을 벗었다. 지금은 능력을 사릴 때가 아니었다. 멋대로 아이의 볼에 손을 얹었다. 아이가 더듬거리며 뭐라고 대답했지만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슈슈라는 아이의 집으로 가는 길을 ‘보았다’.

“고마워.”

두 사람이 그 집으로 간 장면까지 아이가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적어도 슈슈라는 아이의 집은 제 발로 들어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슈슈라는 아이의 집을 떠올리던 작은 아이가 느꼈던 감정이 마음에 걸렸다.

‘무서워.’

두 사람이 사라질 만한 일은 도대체 뭐였을까. 퍼스는 숨을 죽이며 보였던 판잣집으로 향했다. 판자 하나만 치워도 무너질 것 같은 집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입구로 보이는 판자를 던졌다. 안에는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침대로 보이는 곳이 있었다. 손을 대니, 눈앞에 최근까지의 그들이 보였다.

- 아빠, 언니는 어디로 갔어?

- 말했잖아. 언니는 우리를 도와주러 간 거야.

- 아빠, 언니 아프게 안 할 거지…?

아이는 아버지의 다리에 매달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힘껏 다리에 매달린 아이를 뿌리쳤다. 아이가 날아가 벽에 처박혔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곤 테이블에 놓인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이내 술병이 비자, 성질을 내며 빈 병을 벽에 던져버렸다.

- 구석에서 벌벌 떨지 말고 가서 술이나 가져와!

아이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몸을 떨었다. 그러다 다시 아버지의 팔이 올라가자, 도망치듯 판잣집을 빠져나갔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온화하다가도 술만 먹으면 인격이 변하는 족속이었다. 잠시 후, 아버지 또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확인차 눈을 떴는지라도 봐야겠군.

그리고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공간이동 능력자였던 것이다. 이래서야 어디로 갔는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더 힌트가 없는지 퍼스는 판잣집의 곳곳을 만지며 기억을 더욱 뒤로, 뒤로 당겼다. 능력을 쓸수록 그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바닥에 떨어진 물컵에 손을 대자, 리아가 사라질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쓰러져 눈을 감는 리아의 모습이 보인 순간, 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웃음을 잃어버린 것조차 마음 아팠던 존재다. 그런 존재를 함부로 손댄 것에 대해 그들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기다려요, 리아…!”

***

떨어지는 물방울이 잠을 깨웠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차가운 감각 때문에 정신이 맑아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한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리아, 괜찮아?”

다행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손을 뻗어 대답하려고 했다.

철그럭.

하지만 들리는 건 쇠사슬 소리뿐이었다. 의아함에 몇 번이고 팔을 당겨보았지만 똑같았다. 비로소 제대로 눈을 떠 앞을 보니, 케빈 또한 양쪽 팔다리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감옥처럼 생긴 공간이었다.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더라면 케빈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을 듯했다.

“이게… 뭐예요?”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인지 쉰 듯한 목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팔다리가 묶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너무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움직이다간 팔다리가 쓸려 상처가 날 테니까요.”

리아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또 다른 목소리가 났다. 슈슈의 아버지였다. 다리가 불편한 줄 알았던 그는 멀쩡히 두 다리로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을 작정하고 속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쓰러지기 전 상황이 기억났다.

“당신! 우리한테 뭘 먹인 거야?”

케빈은 팔다리에 있는 쇠사슬이 팽팽히 당겨질 정도로 발버둥 쳤다. 리아는 그러다가 그의 팔이 다칠까 무서웠다.

“나쁜 건 아닙니다. 그저 약간 잠이 오는 약이지요.”

그는 판잣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더 이상 좋게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대체 뭐 때문에 우리에게 약을 먹인 거지?”

“그쪽 귀한 아가씨에게 재밌는 능력이 있더군요. 게다가 우릴 돕겠다면서요? 그래서 도울 기회를 주는 건데. 나쁩니까?”

“사람을 이렇게 가둬놓고 나쁘냐고요?”

리아 또한 그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났다. 의식하자 묶인 팔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식물을 키우는 능력이 있다면서요? 그 정도면 저희 식량난 해결에 바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어디, 능력 좀 봅시다.”

그는 리아의 앞에 작은 화분 하나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내보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 혹시 손이 묶여서 능력을 쓰지 못하는 겁니까?”

“당신에게 제 능력을 써줄 것 같나요? 어림없어요!”

리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발이 묶여 있지만 않다면 화분을 발로 멀리 차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식물을 보고 이렇게 화가 난 적은 처음이었다.

“아가씨가 지금 상황을 잘 모르는가 본데.”

남자는 바닥에서 굵은 나뭇조각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케빈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휘둘렀다.

“욱!”

최대한 신음을 억눌렀지만, 케빈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갔다. 나뭇조각이 부러지기까지 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무슨 짓이에요!”

“아가씨가 자꾸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굴잖아요. 이 사람은 누군가요? 애인?”

“그런 사람 아니니까 제발 놔줘요!”

“그럴 수야 없죠. 능력을 써줄 귀하신 아가씨 몸에 손을 댈 순 없으니 대신 인질이라도 잡고 있는 수밖에.”

남자는 다시 화분을 가리켰다. 리아가 머뭇거리며 움직이지 않자, 다시 부러진 나뭇조각을 들어 올렸다.

“리아, 난 괜찮으니까 능력은 쓰지 마….”

맞은 자국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케빈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능력이 약해져서 지금 상황에 도움이 안 되는 게 분했다. 계속해서 묶은 쇠사슬 쪽에 힘을 줬지만, 어찌나 튼튼한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발 놓아주세요. 저희는 모두를 돕기 위해 온 거란 말이에요….”

리아는 이제 울며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이 납치범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는 애초에 슈슈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계획을 짰을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를 납치 계획에 동참시킨 것만 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갔다. 남자는 리아의 눈물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활짝 웃으며 나뭇조각의 부러진 부분으로 케빈의 복부를 내리쳤다. 이를 아무리 꽉 깨물어도 비명이 새어 나왔다.

“으아아악!”

“케빈 님!”

아무리 울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리아는 어리석은 자신을 탓했다. 함부로 능력을 내보이는 게 아니었다. 퍼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뼈저리게 후회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케빈은 고통 때문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계속해서 탈출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방법은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자신들을 쫓아오던 어리숙한 미행범.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 리아를 찾아낼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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