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혹한기 (6)
익숙한 목소리에 리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골목길 안쪽을 살폈다. 비슷한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그녀는 반가운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꼬마야!”
이름을 모르니 꼬마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리아에게 다가왔다.
“언니! 이 마을로 오실 줄 알았어요.”
“아는 아이야?”
옆에서 케빈이 물었다. 분명 하이버 지역에는 처음 와본다고 했는데 아는 사이라니 의아했다. 리아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때 말씀드렸던 식량 구하는 걸 조금 도와주었던 아이예요.”
“아, 그때.”
리아가 사라졌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케빈이 아이를 보는 눈빛이 잠시 날카로워졌다. 이 아이는 그녀가 능력을 쓰는 장면을 목격했을 테니까.
“언니가 찾아주신 풀로 제법 돈을 벌었어요. 돈이 되는 풀이에요!”
아이는 흥분해 리아에게 매달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리아는 아이의 꽁꽁 언 손과 볼을 문질러주었다.
“그래. 거긴 아무한테나 가르쳐주지 마. 내가 말한 것처럼 조금씩 남겨서 꼭 꽃이 피는 것도 보고. 알았지?”
“응. 그럴게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마주치니 아이와의 인연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리아는 아이의 양손을 꼭 잡았다.
“이름이 뭔지 언니한테 알려줄 수 있겠니?”
“슈슈.”
“그래, 슈슈. 아프지 말고, 잘 있어야 해.”
리아가 잡은 손을 슈슈도 맞잡았다. 작은 손으로 아주 약하게 힘을 준 것뿐인데 놓기가 힘들었다. 하고자 한다면 이 아이를 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 뒤 골목길에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능력은 너무도 미약하고 하찮았다. 퍼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일지도 몰랐다. 리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
“리아, 이제 가야….”
“언니,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돼요?”
슈슈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리아는 깜짝 놀랐다. 아이가 울자 재촉하던 케빈도 당황했다.
“무슨 일이야?”
“언니는 마법사잖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도와주면 안 돼요? 네?”
슈슈는 능력에 대해 잘 모르고 오해한 듯했다. 리아가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녀는 고작 식물을 키우는 능력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슈를 도와주고 싶었다. 리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케빈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어린아이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마을의 시찰을 위해 나온 것이었지만, 잠시면 되겠지 싶었다.
“그래. 가보자.”
***
슈슈는 두 사람을 마을 변두리로 데려갔다. 그곳에 아이의 집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린아이가 이끄는 대로 성인 둘이서 걷는 기분이 묘했다. 그나마 활기를 띠었던 마을의 풍경이 점점 적막해지더니, 이윽고 폐허에 가까운 곳이 나왔다.
슈슈의 집은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었다. 집이라기보다는 판자 더미에 가까웠다. 케빈과 리아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일었다. 이곳이 얼마나 오랫동안 버려진 건지 리아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슈슈는 문으로 보이는 판자를 힘겹게 치웠다.
“내가 할게.”
케빈은 쉽게 판자를 한쪽으로 치웠다. 고작 이게 문이라니. 그의 표정은 자연히 어두워졌다. 판자를 내려놓자마자 또 엄청난 먼지 바람이 일었다. 한참을 켈록거리던 두 사람은 슈슈가 들어가는 길로 발을 내디뎠다.
“아빠.”
슈슈가 말을 하고서 한참이 지나고서야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창문이랄 것도 없이 벽이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빛 사이로 하나의 인영이 비쳤다. 그 또한 먼지 때문인지 지병 때문인지 콜록거리고 있었다.
“슈슈.”
움직일 때마다 끼익거리는 침대 위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달려가는 슈슈를 끌어안았다. 그러면서도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걸로 보아 몸이 불편한 듯했다.
“저분들은 누구니?”
그는 두 사람을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들어섰으니 당연했다. 그는 슈슈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슈슈가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쳐 나왔다.
“내가 말한 언니랑 언니 친구야!”
슈슈의 ‘말했다’는 말에 케빈의 얼굴이 굳었다. 아이가 말한 게 단순히 리아가 식량을 구하는 걸 도와줬다는 얘기뿐만이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리아는 그 부분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약속을 지켜줬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안녕하세요, 슈슈 아버님 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 슈슈를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경계를 푼 그는 꽤 자상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리아는 손을 내저었다. 슈슈의 아버지는 손을 뻗어 의자로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슈슈, 손님께 물이라도 좀 내드려주렴.”
슈슈가 물을 따르는 동안, 두 사람은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잘못하면 부러질 것 같이 연약한 의자였다. 여기저기 판자를 덧대 만든 집이라 그런지 바람이 불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가 났다. 천장 또한 혹여 쓰러질까 무서웠다.
“집이 너무 허름하지요?”
리아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슈슈의 아버지는 머쓱해했다. 그제야 리아는 자신의 행동이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태어나 이렇게까지 낡은 집은 처음 보는지라 저도 모르게 집 안을 훑어보고 만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아닙니다. 귀하게 생긴 아가씨 같은데 이런 집이 신기할 수도 있죠.”
“그래도 슈슈는 행운아야. 다른 아이들이랑 달리 아빠랑 집도 있는걸.”
두 사람에게 물을 한 잔씩 내밀며 슈슈가 말했다. 힘든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의 말에 리아는 가슴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감정이 차올랐다.
하지만 괜찮다는 아이를 멋대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실례였다. 리아는 입 밖으로 그 감정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슈슈가 내민 물컵에도 먼지가 떠 있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그녀는 물을 들이켰다.
“고마워.”
케빈 또한 웃으며 물을 마셨다. 슈슈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착하네. 잘 마실게.”
먼지 때문인지 물은 불투명한 색이었다. 케빈은 물 속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생각하며 한 모금씩 마셨다.
“슈슈, 도와달라고 했던 게 뭐야?”
슈슈는 아버지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곤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픈 아버지를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빠가 많이 아파. 그래서 언니가 도와줬으면 해서.”
“슈슈.”
아버지는 슈슈를 꽉 끌어안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딸이 기특한 모양이었다. 그는 확실히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기는 했다. 풍족하게 먹지 못해 삐쩍 마른 상태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은 의사가 아니었다. 식물을 키우는 능력이 있는 사람일 뿐이지. 아무래도 슈슈가 자신에 대해 뭔가 단단히 오해한 듯했다. 곤란해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슈슈의 아버지가 상황을 파악했다.
“저희 아이가 뭔가 오해를 해서 두 분을 데리고 왔나 보군요.”
“아니야! 언니는 아주아주 신기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정말이야!”
아무래도 슈슈는 능력에 대한 개념을 잘 모르는 듯했다. 하이버 지역에선 능력자들이 잘 배출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리아는 슈슈의 아버지를 아프지 않게 해주는 건 자신이 해줄 수 없는 일이라 난감해했다.
반면, 케빈의 표정은 날카로워졌다. 결국 아이가 비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게 드러났다. 아이를 비난할 일은 아니었다. 리아의 탓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가 능력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시키지 않은 것은 자신의 실책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저 아버지는 리아의 능력이 무엇인지 짐작했을 것이었다. 케빈은 그가 혹시나 리아의 능력을 탐낼까 경계했다. 하지만 슈슈의 아버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아이를 달랠 뿐이었다.
“슈슈, 두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병은 고쳐줄 수 없어.”
“어째서? 언니는 꽃도 피울 수 있어!”
“그게 언니의 능력이라서 그래.”
“능력?”
“그래. 사이키델리아의 국민은 모두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대.”
“슈슈는? 슈슈는 왜 능력이 없어?”
“그러게. 우린 왜 능력이 없을까…?”
부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아와 케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리아는 하이버 지역에 능력이 약하거나 없는 사람이 있다고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자조적으로 웃는 슈슈의 아버지를 보는 순간,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아버님은… 능력이 없으신 겁니까?”
“있긴 합니다만 너무 약해서 잘 발휘되지 않습니다. 없다고 봐도 무방한 정도죠. 게다가 보시다시피 이렇게 몸도 약해서 쓸 수도 없고요.”
능력은 체력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몸이 약한 자들은 능력이 약하기도 했다. 케빈 자신도 능력이 약해진 것은 큰 부상을 입고 회복하느라 몸이 약해져서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 슈슈의 아버지가 몸이 약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사이키델리아는 철저하게 능력 위주의 사회였다. 능력만 강하다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왕궁에서 일할 수 있었다. 사이키델리아 국민이라서 가지는 능력은 태어나 처음으로 가지는 자신만의 무기이기도 했다.
그런 무기가 없다면? 신분도 없고, 재산도 없는 서민이라면 당연히 생활이 힘들어질 법도 했다. 하이버 지역민은 날씨뿐만 아니라 능력 부분에서도 힘든 생활을 이겨내야만 했다.
두 사람은 부녀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침묵이 이어지니, 목이 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물잔을 비워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정적을 깨고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태어난 게 저희의 잘못도 물론 아니지만요.”
“예, 물론이죠. 슈슈도 아버님도 잘못하신 건 하나도 없으세요.”
그녀는 태어나 이런 가난은 처음 접했다. 말로만 글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 말했다. 자신의 처지를 감사해야 한다고. 그 말이 뭔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제가 낫게 해드릴 수는 없지만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고 싶어요!”
“리아.”
경솔한 발언에 케빈은 리아를 말리려 했다. 돕고 싶다고 해서 모두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아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슈슈와 그녀의 아버지를 돕고 싶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도와주실 겁니까?”
아버지는 슈슈를 끌어안고 기뻐했다. 슈슈 또한 리아가 도와준다는 말에 웃었다. 환하게 웃는 둘의 미소를 보자 리아도 기뻤다. 하지만 케빈은 불안했다. 그는 리아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가 뭘 도와달라고 할 줄 알고 그녀는 덥석 도와준다고 나선단 말인가. 그래서 한 번 더 말리려고 했다. 그런데.
“리… 아.”
손을 뻗는데 시야가 흐려졌다. 리아가 뒤를 돌아보는데, 케빈이 자신에게 손을 뻗은 채로 스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케빈 님?”
깜짝 놀란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났다.
“그럼 감사히 도움 좀 받겠습니다.”
버티려는 리아의 등에 누군가가 손을 댔다. 뿌리치려 했지만, 이미 어지러운 상태였다. 결국 리아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기 전, 그녀의 귓가에 슈슈가 속삭였다.
“고마워,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