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혹한기 (5)
퍼스가 하이버 성에 들어와서 제일 놀랐던 것은 식당에 차려진 메뉴였다. 서민들은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하나, 성 안의 손님맞이는 화려했다. 눈치 없는 알폰스는 성에서 먹었던 식단보다는 소박하다고 뒤로 불평했다.
하지만 퍼스가 보기엔 충분히, 과분했다. 성 내부 또한 소박한 외관과 달리 화려했다. 알폰스를 맞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꾸민 것이라고 해도, 지나쳤다. 퍼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야만 했다.
“왕자님, 음식은 어떠십니까?”
“아주 훌륭합니다.”
다행히 사교적 멘트란 걸 할 줄 아는 알폰스는 속마음을 겉으로 티 내진 않았다. 퍼스는 벽 쪽에 서서 슬쩍 하이버 백작을 바라보았다. 호탕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들어오면서 본 풍경과 메뉴 때문인지 썩 호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앞의 사람들보다 다른 게 더 신경 쓰였다. 아직도 화나 있을 리아. 그 이후로 틈을 낼 수 없어 사과하러 갈 수조차 없었다. 안 그래도 어색해진 사이에 자신이 실수까지 해버렸으니. 더욱더 목이 탔다.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자꾸만 초조해졌다. 모두에게 화를 내는 모습까지 보이다니.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리아가 없어졌을 땐 시야가 흐려졌다. 그 바람에 두서없이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스. 퍼스!”
“아, 네.”
딴생각하다가 상관인 알폰스가 부르는 것도 못 듣고 말았다. 정말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알폰스도 같은 생각인지 눈을 좁혔다.
“자네 요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백작과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내내 다른 생각을 하는 눈치더군.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아나?”
눈치란 게 있긴 했군.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퍼스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시정 하겠습니다.”
“아닐세. 내 친우와도 같은 자네가 무슨 고민이 있는 모양인데.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친우도 아닐뿐더러 고민도 말하고 싶지 않은데. 퍼스는 눈을 깜빡였다. 알폰스는 제 침대 옆 탁자에 앉으며 반대편 좌석을 가리켰다. 하지만 퍼스는 거절하고 그의 옆에 가 섰다.
“괜찮습니다.”
“다 알고 있네. 자네 고민. 리아 페넬로페 영애에 관한 거지?”
정곡을 찌르는 대답에 퍼스는 숨을 들이켰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표정이 깨지지 않게 조심했다. 알폰스에게 제 감정을 들켜서 좋을 일이 없었다.
“제가 페넬로페 영애에 관한 일로 왜 고민하겠습니까.”
그는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외부 인사와 만날 때 주로 짓는 미소였다. 알폰스도 하루 이틀 그와 같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의 위선적인 미소를 금세 알아챘다.
“거봐. 그렇게 금세 얼버무리려고 하니까 티가 나는 걸세. 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엇이든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이었다. 표정은 일관되었지만, 퍼스는 긴장해서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그렇게까지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알폰스에게 들켰다면 꽤 충격일 듯했다.
“리아 양 말일세. 사실….”
알폰스는 말하다 말고 턱을 괴었다. 일부러 말을 끄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각도로 일부러 고민하는 척까지 했다. 그가 자주 쓰는 수법이라 퍼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주로 여성을 꼬실 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씀해주시죠.”
하지만 퍼스에게 통하지 않자,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없게 구는군.”
“전 재미없으니까요.”
“알았네, 알았어. 리아 양이 자네에게 무리한 부탁이라도 했나?”
뜬금없는 소리에 퍼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쓸 뻔했다.
“무리한 부탁이라뇨?”
그런 부탁을 받은 적도 없을뿐더러, 그녀는 그런 부탁을 할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퍼스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는 듯 알폰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맞군. 자네에게 역시 말을 타고 여행하니 힘들다고 다시 마차에 타게 해달라고 부탁한 게 아닌가? 그러니 자네가 답지 않게 화를 내기까지 한 거고.”
소설이었다. 그는 알폰스가 그나마 눈치가 자랐다는 생각을 모두 취소했다.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으면 저렇게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만 가능할까.
“아닙니다.”
“난 괜찮으니 돌아갈 때는 마차에 타라고 하게.”
“아닙니다!”
더 강하게 답변한 후, 퍼스는 이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폰스에게 인사한 후, 방을 나서버렸다.
“그럼 푹 쉬십시오.”
“내 말 명심하고 괜한 고민하지 말게!”
두통이 밀려오는 듯해, 그는 문을 닫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하루빨리 하이버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왕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궁을 떠나면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리아….”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새 그녀를 친근하게 부르고 싶다는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복도에 아무도 없기에 망정이지, 지금 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감정을 눈치챘을 터였다.
빨리 화해하고 예전과 같이 자신에게 웃어주는 미소를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자신의 능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능력에 의지하는 건 싫었지만 가장 빠르게 정답에 다가가는 방법이기도 했으니까.
***
차르륵. 커튼을 걷으며 리아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맑아서인지 떠 있는 달과 별이 잘 보였다. 창문에 손을 대기만 해도 에일 듯한 추위가 느껴졌다. 가까이 서니 그녀의 입김으로 창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잠시 후 다시 투명해지길 반복했다.
다른 이들은 벌써 잠든 후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알폰스를 모시는 이들을 제외하곤 여인숙에 묵거나, 노숙을 하는 일정의 반복이었다. 다들 피로가 축적되어 있었다. 몇 명은 벌써 코를 골았다.
하지만 리아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은 퍼스와 싸운 그 날 이후로 쭉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걱정해줘서 화낸 거였다. 하지만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게 화부터 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는 가라앉고, 그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자라났다. 하지만 알폰스를 옆에서 보좌하느라 그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말을 걸 틈조차 없었다. 성에 온 후는 더욱 그랬다.
‘퍼스 님이 제게 화를 낸 게 서운해서 그랬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게 사과의 말을 연습했다. 막상 눈앞에 닥쳤을 때, 말을 더듬거나 잘못할까 봐. 하지만 내일부터는 실제로 바빠지는 건 리아 쪽이었다. 그에게 사과를 하러 갈 시간이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내일은 만날 기회가 있기를. 리아는 밝은 달을 보며 기도했다.
***
작업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몇 시간 자지 못해 졸린 눈을 비비며, 리아는 성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경작지를 둘러보며 주요 경작물에 대한 설명을 듣는 날이었다.
“주로 녹은 땅을 위주로 개간하고 있습니다. 다만 눈이 녹지 않을 때는 불 능력자가 눈을 강제로 녹여 사용하긴 합니다. 다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어 땅이 차가워지면 다시 작물이 얼어 죽기도 하고요.”
설명을 들으며 리아는 현재 심어진 작물을 관찰했다. 모두 시들시들하고 생기가 없었다. 이대로는 얼마 안 가 죽을지도 몰랐다. 살짝 손가락으로 땅을 파봤다. 흙이 얼어 조금 딱딱하긴 해도, 완전히 건조하진 않았다. 리아는 조사한 모든 것을 적어 내렸다. 케빈은 이것저것 담당자에게 물으며 이따금 생각에 빠졌다. 당장 성에서 키운 작물들도 이 상태인데, 서민들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오히려 상태가 더 나쁠지도 몰랐다.
“일단 저희 쪽에서 식용 가능한 냉대 기후 식물 묘목과 씨앗들은 모두 챙겨왔습니다. 이 중 적합할 만한 걸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냉대 기후 관리 부서가 주축이 되어 의견을 나누었다. 결국은 전체적인 상황 파악이 우선이라는 결론이었다. 당장 지역민들의 경작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각자 팀을 이루어 따로 행동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리아는 케빈과 한 팀이었다. 그와 같은 부서였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시장을 향하기 전, 케빈은 뒤를 돌아보았다.
“뭐가 있어요?”
“있어.”
“뭔데요?”
하지만 리아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케빈이 쳐다보고 있는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용기 없는 자의 발악이지.”
“네?”
“아무것도 아니야. 일이긴 하지만 저번 축제 때 함께하지 못했던 걸 만회하기로 하자고.”
축제 얘기를 꺼내자 리아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뒤끝이 기시네요.”
“그럼. 내 뒤끝은 끝이 없지.”
성 안 관리인에게 받은 지도를 참고하며, 둘은 하이버 성을 나갔다. 성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하산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려가는 동안 케빈과 리아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케빈은 이 지역에 있던 경험이 있는 만큼, 하이버 지역에 대해 잘 알았다.
“이 지역 주민들은 능력을 이용해서 경작하려고 안 하나요?”
“여기 주민들은 능력이 약해. 사이키델리아의 시조는 너도 알다시피 이주민들이야. 토착민들은 원래 능력이 없었잖아.”
“그거야 알지만요.”
사이키델리아의 역사를 공부했던 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현재는 모든 국민들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토착민들이 남긴 유산 및 유물들이 그 증거였다.
“아주 드물게 능력이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 아무튼 이들에게 제대로 된 능력자는 매우 귀한 존재고,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능력을 통한 경작은 어렵지. 그래서 더 농업이 어려운 거고.”
처음부터 능력이 약한 사람들만 존재한다니. 당연히 능력으로 수월하게 경작하는 게 어려울 만했다. 하다못해 능력이 출중한 자가 나왔다 하더라도, 왕궁에서 기가 막히게 선별해갔을 터였다. 그렇다면 리아로서는 더더욱 도와주고 싶었다.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이곳은 자신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와 있는 동안만이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역시 제 능력을 쓰면 어떨까요?”
“그런 바보 같은 소리 다신 하지 마. 우린 그렇게 일시적인 해결책을 주러 온 사람들이 아니야. 만약 그 방법을 쓸 거였으면 왕궁에서 식물 능력자들만 모아서 보냈겠지. 그리고 위험하다고 했잖아. 알았어?”
“…알겠어요.”
사실 전혀 납득하지 않았지만. 리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하는 동안 두 사람은 금방 마을에 도착했다. 수도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을은 제법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것 좀 드셔보고 가세요!”
“가죽으로 만든 물건 싸게 팝니다!”
상인들은 목청껏 호객행위를 했다. 줄줄이 늘어선 가판에는 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물건도 많이 있었다.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장이 서는 날인가.”
“네. 사람이 무척 많네요.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 줄이야.”
“사람이 적을 줄 알았어?”
“…아무래도 척박한 땅이라고 하니까요. 살기 힘들 것 같아서.”
리아에게는 처음 만난 아이의 인상이 강하게 새겨졌다. 하이버 지역의 주민이라면 모두 그렇게 어렵게 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은 화려했고, 마을 주민들은 생각보다 어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도시든 뒤를 봐야 진정한 면모가 보이는 법이야.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건 아주 작은 앞면일 뿐이고.”
조금 더 가자 케빈이 말한 ‘뒤’가 보이는 골목길이 있었다. 그곳에는 굶주린 듯한 아이들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작고 앙상한 몰골을 보며 리아는 가슴이 아파졌다. 너무 빤히 쳐다보면 싫어할 것 같았다. 리아는 금세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말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한 아이가 리아에게 다가왔다.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