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혹한기 (4)
부스럭 부스럭. 계속해서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났다. 길을 따라 누군가 걷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행인가 싶어 불러보려고 했다. 하지만 왠지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가벼운 듯했다. 산짐승인가? 리아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소리가 나는 쪽을 주시했다. 이윽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거기 누구세요?”
리아가 묻기 전 상대방이 먼저 물어봤다. 다행히 짐승은 아니고 인간이었다. 생각보다 어린 목소리였다. 바스락거리던 소리의 정체는 이제 겨우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그러는 넌 누구니?”
리아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낯선 상대를 경계하지도 않고 제자리에 서서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추운 곳에서 얼마나 한참 걸었는지 얼굴과 손이 빨갛게 된 상태였다. 일행이 야영을 준비하는 걸로 보아 마을이 근처에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 말은 이 아이는 아주 멀리까지 나왔다는 것이었다.
“얘, 너희 집이 어디니? 너무 멀리 나온 것 아니니?”
“원래 먹을 걸 구하려면 멀리 와야 해요.”
아이는 추위에 익숙한지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멀리까지 걸어왔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걸 보니 오히려 리아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 많이 구했니?”
아이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고선 가지고 있던 바구니를 숨겼다. 아마 기껏 모은 먹을 걸 빼앗아 가는 어른이 있었으리라. 다시 마음이 아파 왔다.
“알았어. 걱정되면 안 볼게. 좀 도와줄까?”
야영 장소로 돌아가야 했지만, 나뭇가지를 일찌감치 모아서 조금 시간이 있었다. 아이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국산 풀은 또 공부해본 적이 있어서 잘 알지. 먹을 수 있는 걸로 잘 골라볼게!”
리아는 아이를 안심시키려 괜히 큰소리쳤다. 하지만 눈이 워낙 많이 쌓여 있어서, 식용 식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언니, 찾을 줄 아는 거 맞아요?”
한심해하는 표정에 민망해졌다. 리아는 손이 어는 것도 잊고 더 열심히 눈 속을 뒤졌다.
“찾았다!”
뿌리부터 전부 먹을 수 있는 이 식물의 이름은 아도니스였다.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울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었다. 리아가 찾아낸 곳에서 여러 뿌리가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다 캘 거니?”
“그럼요?”
“한 뿌리 정도는 남겨놓는 게 어떨까? 그래야 다음에 또 자라서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얘 꽃이 피면 정말 예쁘거든.”
“꽃이 피는 애예요?”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아도니스의 꽃을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리아는 웃으며 보통 사람은 눈치채기 힘든 꽃봉오리를 가리켰다.
“이 아이는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울 정도로 정말 강한 아이야.”
“전 이 아이 꽃 본 적 없어요.”
아이는 말똥말똥 눈을 뜨며 말했다. 꽃이 피는 걸 보기도 전에 먹기 위해 모두 캤다는 소리였다. 그래서야 매해 먹을 게 부족해지는 게 당연했다. 다음 해를 위해서 조금은 남겨둬야 했으니까. 식물에게도 안타깝고 아이에게도 안타까운 말이었다.
“얘 이름은 아도니스야. 엄청 작고 예쁜 꽃이 피어. …보고 싶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게 중요하다는 걸 알긴 했지만 아직 호기심이 왕성할 때였다.
“알았어. 그럼 꽃이 피게 해줄게. 대신 여기 꽃이 피었다는 건 비밀로 하기야.”
“네, 약속할게요!”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자 리아의 기분도 밝아졌다. 그녀는 한 뿌리를 향해 능력을 쓰기 시작했다. 이윽고 천천히 봉오리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팍, 하고 터지듯 벌어지기 시작했다. 앙증맞고 노란 꽃이 점점 그 위용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정말 예쁘지?”
“네! 이렇게 예쁜 꽃은 태어나 처음 봤어요!”
아직 나이가 어린데 태어나 처음 봤다는 표현을 쓰는 게 우스웠다. 리아는 아이의 미소를 본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더 오래 돕고 싶었지만, 이제 곧 케빈이 저를 찾을 터였다.
“집으로 갈 수 있어?”
“당연하죠. 전 일곱 살인걸요.”
자랑스레 말하는 모습이 또 귀여웠다. 이제 고작 다섯 살 남짓한 줄 알았는데. 어쩐지 말을 너무 잘한다 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은 후, 리아는 먼저 야영지로 출발했다.
“안녕!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보자!”
“네, 고마워요! 언니!”
***
“리아!”
“리아 양!”
시간이 조금 지체된 모양이었다. 리아가 야영지로 돌아오자 걱정하는 표정의 두 남자가 있었다. 퍼스와 케빈이었다.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오랬더니, 나무 장작이라도 패고 왔냐?”
둘 다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반응이 너무 격했다. 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했다.
“오다가 아이를 만나서요. 조금 도와주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아이? 이 주변에 마을은 없을 텐데.”
“네. 이 주변에 사는 아이는 아닌 것 같고, 멀리까지 식량을 구하러 나온 모양이더라고요. 식용 식물은 제가 잘 아니까 잠시만 같이 찾아봐 줬습니다.”
멀리까지 식량을 구하러 나왔다는 말에 케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만큼 하이버 지역의 식량난이 심하다는 소리였다. 구황작물로는 일반 서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뭘 찾아줬는데?”
“아도니스였어요.”
“아도니스라. 약초라 별로 배가 부르진 않을 텐데.”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케빈과 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퍼스도 다른 의미로 생각이 있는지 말이 없었다.
“리아 양, 혹시 능력을 쓰셨나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퍼스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기도 했다.
“혹시 그 아이가 불쌍하다고 해서 능력을 써서 식물을 자라게 한 다음 식량을 구하게 한 것은 아닙니까?”
“아, 아뇨. 그저 꽃이 보고 싶다고 해서 한 뿌리만 꽃을 피워줬을 뿐인데요?”
리아의 말에 퍼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리아는 자신이 능력을 쓴 게 왜 골치 아픈 일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했나요? 왜 그러세요?”
“리아, 능력을 쓰면 안 되지.”
심지어 케빈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들이면서 이럴 때는 호흡이 척척 맞았다. 둘 모두 그녀를 비난하는 듯했다. 이해할 수 없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능력이 있는데 왜 쓰지 말라고 하시는 거죠? 심지어 저는 누군가를 해치게 하는 능력도 아니라고요! 남용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조금 썼을 뿐인데!”
리아가 흥분하자 역으로 두 사람이 당황했다. 리아는 자신에게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이었다.
“리아, 진정해.”
“리아 양,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케빈은 그녀를 일단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퍼스는 달랐다. 더 단호한 어조로 그녀에게 강조했다.
“더 이상 하이버 지역에서 능력의 사용을 금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뭐라고요?”
“퍼스 님, 당신도 좀 진정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다짜고짜 리아에게 금지를 시키면….”
케빈이 중간에서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퍼스와 리아는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왜 제 능력이 금지되어야 하는 거죠? 저는 선의를 베풀었을 뿐이라고요!”
“그 선의가 문제인 겁니다! 그렇게 아무나 다 도와주려고요? 당신이 신인 줄 압니까? 당신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어요.”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전 딱 한 송이의 꽃을 피웠을 뿐이라고요.”
“자, 자, 그만요.”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리아는 그렇다 쳐도 퍼스는 웬만해선 이성을 잃고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처음이었다. 다들 놀라는 게 당연했다.
“퍼스! 뭐 하는 건가?”
멀리서 알폰스가 퍼스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결국 그는 등을 돌려 알폰스에게 향해야만 했다. 마지막까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찌 되었든, 금지입니다.”
그의 표정과 손짓은 단호했다. 하지만 리아야말로 화가 나는 상태였다. 이유도 모른 채 능력을 금지당한 건 이쪽이니까.
“아니, 왜…!”
“리아.”
화가 난 리아를 말린 것은 의외로 케빈이었다.
“이곳은 식량난이 심한 곳이야. 다들 식물 능력자가 식량을 키우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지. 하지만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게다가 식물 능력자의 도움에 의존하면 여기 사람들이 스스로 살 능력이 되지 않아. 오히려 나쁜 방법만 떠올릴 거다.”
리아는 케빈의 설명을 듣고서야 퍼스의 말을 이해했다. 혹시나 식물 능력자임을 들킨다면 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퍼스는 그 점을 걱정해서 화낸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요. 무턱대고 화부터 내시고!”
“…별로 변명하기는 싫지만. 저자도 널 걱정해서 이성을 잃은 게 아닌가 싶어. 나도 네가 늦어졌을 때, 초조해서 어떻게 되어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절대 혼자 어디 가지 마.”
대답 없는 리아를 보며 케빈은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속삭이듯 ‘네’라고 대답하곤, 자리를 피했다. 퍼스에게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그녀의 뒤에 대고 케빈이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야. 알아서 해보라고.”
리아가 늦는다는 걸 안 후, 케빈은 주위를 찾아야 하나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조금만 있으면 식사 시간이었다. 혹시 숲속에서 길이라도 잃은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이윽고 어떻게 알았는지 퍼스가 찾아왔다. 그녀가 마른 가지를 주우러 갔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표정. 창백해진 표정을 케빈은 잊을 수 없었다. 잠깐 그녀가 없었을 뿐인데 평소의 페이스를 잃고 흥분해 화내던 모습도.
“꽤 진심인가 본데….”
하지만 그렇다고 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도 리아에게 충분히 진심이었으니까.
***
하이버 성까지 가는 데는 예상보다 적은 시간이 들었다. 일행이 이동하는 동안 우려했던 일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경계를 잘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치안이 안 좋다는 건 소문인 듯했다.
하이버 성은 아주 옛날 사이키델리아의 수도가 이곳이었다는 증거였다. 사이키델리아라는 나라가 혹한인 하이버 지역을 시작으로 영역을 넓혀갔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수도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예전 사이키델리아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견고한 성이었다.
이 지역은 대대로 내려오는 하이버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지역의 토착민에게 작위를 내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들은 일반인보다 몸이 조금 작았다. 하지만 기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현 하이버 가문 당주인 장 하이버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1 왕자님!”
그는 하이버 성문 앞까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알폰스 또한 마차에서 내려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하이버 백작님.”
하이버 백작은 다스리는 영지가 먼 탓에 중앙에 잘 나오지 않았다. 원래부터 중앙에서 관리하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곳까지 몸소 와주시니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자,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백작의 말과 함께 성문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