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혹한기 (3)
응접실 안에 있던 페르디난드 영애는 턱을 괴고 리아가 사라진 빈자리를 노려보았다.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자각이 없는 것이리라.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믿었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감이 맞았으니까.
“들어와.”
그녀가 부르자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응접실에 들어섰다. 공작가에서 부리는 이였다. 시키면 무엇이든지 해내는.
“저 건방진 애의 기를 좀 눌러줘야겠어. 약점이 될 만한 건 모두 알아와.”
“네, 알겠습니다.”
페넬로페 백작가에 대한 유감은 없었다. 다만 리아와 같이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닌 자가 고작 백작가 영애라는 이유로 자신의 약혼자와 자신이 마음에 둔 퍼스를 사이에 두고 저울질하고 있다는 게 아니꼬웠을 뿐이었다.
특히 아무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는 퍼스와 친구 사이라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나보니 아니나 다를까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게 집안 빼면 뭐가 남냐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 태도까지. 공작가 영애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 건방진 자였다.
“거슬린단 말이지.”
거슬리는 건 치워버리는 게 그녀의 신조였다. 그럴만한 힘이 있었고, 지금껏 그게 당연했으니까.
***
식사를 위해 돌아왔지만 당연히 이미 치워지고 난 후였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잠잘 방으로 들어가던 그녀에게 퍼스가 찾아왔다.
“리아 양.”
“퍼스 님.”
평소라면 활짝 웃으며 반겼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당한 모욕을 모르고 있는 그를 보니 괜히 속이 뒤틀렸다. 분명 퍼스가 한 잘못은 아무것도 없는데.
“잠깐 짬이 나서 만나러 왔는데 페르디난드 영애와 차를 마시러 갔다고 하더군요.”
“네. 방금 풀려난 참이에요.”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리아는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은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녀는 성으로 부르는 점이랄까. 그녀보다야 리아가 더 친근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걱정되어 다시 와봤습니다. 영애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너요. 눈앞에 있는 바로 네 이야기요! 이렇게 당장에라도 쏘아주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리아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알폰스 왕자님께 특별대우를 받는 것 아니냐고요.”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본론은 따로 있었을지언정, 알폰스에 관한 내용을 말한 것도 사실이었다. 핑계였다고는 하지만, 알폰스에 관해서도 꽤 자존심이 상했을 터였다.
“아, 저런. 죄송합니다.”
“왜 퍼스 님이 죄송해하세요?”
“따지고 보면 알폰스 왕자님을 소개한 제 잘못이니까요.”
평소라면 그냥 사과를 받아들이고 말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리아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왜 그러셨어요? 약혼자도 있는 분인데.”
“하지만 소개한다고는 해도 당사자도 모르셨고, 알폰스 왕자님은 평소에도 여러 여성분과 함께하시니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원래 어떤 여성분과 만나도 영애가 화내시는 일은 없었는데….”
그는 왜 자신의 예측이 틀어졌을까 고민에 빠졌다. 리아는 그에게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당신이 계산에 빼먹은 변수는 영애의 마음이라고.
“아무래도 리아 양이 페넬로페 백작가 영애라서 그랬을까요. 다른 여성분들과 다르게 리아 양은 실제로 결혼할 수 있는 가능성도 매우 높으니까요.”
“제가요?”
“예. 실제로 공작가에서 대대로 왕가와 약혼하는 게 관습처럼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리아 양 또한 후보로 거론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페르디난드 가만큼 유서 깊고 힘 있는 가문 출신 영애이시니까요.”
퍼스의 입장에선 자신도 공작 영애만큼 권력 있는 영애라는 칭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리아는 결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또 자신의 집안이 문제라는 이야기였다. 리아는 그저 자신이 ‘리아’였으면 했다. ‘리아 페넬로페’가 아니라.
“집안이 어쨌다는 거야.”
불쾌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짜증을 내는 리아의 모습에 퍼스는 크게 당황했다.
“리아 양…?”
“결국 퍼스 님도 집안, 권력, 돈, 외모 이런 게 다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예?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요! 전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잘게요. 돌아가 주세요.”
“리아 양!”
리아는 퍼스가 뭐라고 덧붙이기도 전에 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들어갔다. 자신이 왜 화내는지 그는 영문을 몰라 할 게 분명했다. 저번처럼 의미 없는 사과를 계속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 화를 내냐고 물어도 곤란했다. 자신조차 제대로 된 정답을 몰랐으니까. 그가 잘못한 건 정말 하나도 없는데. 이건 화풀이가 분명했다. 영애를 만나고 불쾌한 감정이 들어서. 그리고….
“저녁을 못 먹어서 그래….”
***
일행은 아침 일찍부터 채비를 서둘렀다. 하이버 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까지 멀진 않았지만, 약속한 날짜가 있어 서둘러야 했다. 페르디난드 공작가에서도 식량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식량을 지원해주라고 한 건 아비게일일세. 제 약혼자라고 어찌나 챙기는지, 원.”
“왕자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드려야죠.”
다음 날이 되자, 아비게일은 완벽하게 수줍음 많은 약혼녀 역할로 돌아와 있었다. 언제 오만한 얼굴을 보였냐는 듯했다. 이번엔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는 바람에 목소리도 잘 들렸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저 정도의 연기력이 있어야만 알폰스의 약혼녀가 될 수 있나 싶었다.
고개를 젓던 리아와 아비게일의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는 리아를 찌릿, 하고 노려보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찰나였다. 금세 다시 상냥한 미소를 띠어서 리아만이 그녀의 시선을 알 수 있었다. 대단한 연기력이었다.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왕자님.”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르디난드 공작님.”
“퍼스 님도 몸조심하세요.”
“네.”
일견 보좌관까지 신경 쓰는 상냥한 레이디로 비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에 사심이 담긴 걸 리아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시선을 정면에서 맞고 있는 본인만 모를 뿐이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준비된 페르디난드 공작가의 마차에 알폰스가 오르자, 일행은 선두부터 천천히 출발했다. 리아는 말에 올라탔다. 마지막까지 서슬 시퍼렇게 노려보는 아비게일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작가에서 나오자, 바로 궁금함을 참지 못한 케빈이 리아에게 물었다.
“어제 티타임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저 영애가 널 잡아먹을 듯이 봐?”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유능해서 질투 나는 게 아닐까요.”
아무렇게나 한 대답에 케빈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결단코 아니잖아….”
하지만 리아는 뻔뻔한 표정으로 일관할 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 다시 그 일을 꺼내 봤자 그녀의 기분만 상할 뿐이었다.
퍼스 또한 알폰스와 함께 마차에 타지 않고 말을 탔다. 알폰스에게는 편히 주무시며 가라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가는 내내 그의 수다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그는 절대로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어 퍼스에게 말을 거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조용해서 좋았다. 고민에 빠지기가. 퍼스는 어제 리아가 자신에게 왜 화를 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새 고민했지만, 알폰스를 소개했다는 것 하나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리아는 그런 것 가지고 화낼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것 말고 자신에게 화낼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사과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사과한다 한들 지난번처럼 진심 없는 사과만 계속한다고 화낼 게 분명했다.
그는 틈만 나면 리아에게 말을 걸려 시도했다. 하지만 리아도 리아였다. 그가 보일 때마다 열과 성을 다해 그를 피했다. 그가 솔직하게 사과하고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화풀이였어요’ 말고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요즘 얌전하네?”
“제가 언제는 무척 날뛰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설마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지?”
결국 하이버 지역에 가는 내내 두 사람은 어색한 채였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케빈은 리아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농담을 던질 때만 잠깐 웃을 뿐, 리아는 계속 기분이 안 좋은 채였다.
하이버 지역에 가까워질수록 기온이 떨어졌다. 일행은 준비해온 겨울옷을 하나둘씩 꺼내 입기 시작했다. 리아도 가방을 열어서 겨울옷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재클린이 챙긴 옷은 누가 봐도 귀한 집 딸인 게 티가 나는 옷이었다.
“재클린은 왜 옷을 이런 걸 준 거야!”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요. 다만… 옷이 너무….”
케빈은 리아의 어깨 너머로 옷을 보고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곤 자신의 털옷 하나를 꺼내 리아에게 던졌다.
“이거 입어. 그런 옷을 입었다간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케빈이 준 옷에선 그의 독특한 체취가 났다. 빨래를 해도 오래 입은 옷에 배어 있는 특유의 냄새였다. 털옷이 워낙 커서 리아가 옷에 파묻혀 있는 수준이었다. 털 뭉치 사이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귀엽네.”
케빈은 차가운 바람에 볼이 빨개진 리아를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게다가 그녀가 자신의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묘했다.
“네?”
바람 때문에 자신의 중얼거림을 못 들었는지 리아가 되물었다. 빨개진 귀 끝과 볼을 손으로 만져 녹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었으니 자제해야만 했다.
“빨리 되고 싶다.”
“뭐가요?”
이번엔 제대로 들은 모양이었다. 리아가 되묻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케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빨개진 네 볼에 손대도 되는 사이.”
그의 말을 듣던 리아의 볼이 더욱더 빨개졌다. 방심하고 있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주위에 다른 직원들은 바람 소리 때문에 두 사람 대화가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리아도 귀여웠다. 케빈은 자신도 중증이라 생각하며 슬그머니 몸을 리아 쪽으로 기울였다.
“내 손 따뜻해. 잡아볼래?”
그러면서 케빈은 손을 리아에게 내밀었다. 말을 타면서 손을 잡자고 하다니!
“위험해요!”
“그럼 안 위험하면? 땅바닥에선 잡아줄 거야?”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을까. 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케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찰싹 소리가 나게 그의 손을 내리쳤다.
“아니요!”
“여기서 쉬어 가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선두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하이버 지역에 가는 길 모두가 마을은 아니었기에, 야영은 필수였다. 그래도 이 산만 넘어가면 곧 하이버 성이었다.
“리아, 주변에서 불을 피울 만한 마른 가지 좀 주워와.”
기사 출신이라서 케빈은 야영에 익숙했다. 주변 사람들을 지시하며 능숙하게 야영을 준비했다. 리아 또한 놀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멀리 가지는 말고.”
“네.”
지나가듯 걱정하는 케빈의 말이 스쳤다. 그녀 또한 괜히 멀리 나갈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일행에 피해가 될 수 있었으니까. 숲속으로 들어서니 역시 일부러 치운 길 말고는 눈이 없는 곳이 없었다. 두꺼운 신발을 신었는데도 발이 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왕궁에서 준 신발은 더러워지진 않았지만, 온도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이 정도면 될까.”
품 안 가득 마른 가지를 모은 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추워도 계속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털옷 안쪽은 땀이 나려고 했다.
“엄청 따뜻한 옷이네.”
케빈의 털옷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다. 새삼스럽게 감탄하던 중이었다.
바스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