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혹한기 (2)
“페르디난드 영애.”
저택에서 식사를 하고 있어야 할 아비게일이었다. 깜짝 놀란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 공간에 올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녀를 보며 수군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더 미인이었다. 게다가 왕궁에서 온 손님 맞이를 위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꾸민 상태였다. 우아함이 흘러넘쳤다.
“식사 중이셨던 것 아닌가요? 이곳까진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이곳에 페넬로페 영애가 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 안으로 드시지요.”
“아, 저는 괜찮습니다. 왕궁 근무자 신분으로 입궁하였으니까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리아는 당황했다. 자신과 페르디난드 영애는 평소에도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사교계에 잘 나가지 않는 리아였기에 그녀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아주 드물게 한 번 스치듯 인사를 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 와 리아가 손님인 양 구는 게 영 이상했다. 게다가 자신은 왕궁 근무 중이라는 사실도 알고 온 것일 터였다.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왕궁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리아의 말에 노골적으로 그녀의 복장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으나, 노골적인 무시가 담긴 시선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아, 이게 왕궁 근무복….”
“네. 깔끔하고 좋지 않나요?”
리아는 이런 게 싫었다. 고작 옷차림과 지위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는 것. 그래서 사교계를 멀리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영애가 기껏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 정돈 괜찮지 않으실까요?”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의 분위기가 리아보다 페르디난드 영애에게 더 우호적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도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까지 고기를 준 페르디난드 가의 재력에 감탄한 상태였다.
“가주지 그래. 영애께서 저렇게 원하시는데.”
리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케빈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리아의 신호를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인 케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아비게일은 리아에게 팔짱을 꼈다.
“자, 그럼 가실까요?”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당장에라도 팔을 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모두의 앞에서 아비게일이 무안해질 게 뻔했다. 리아는 아주 소심하게 팔을 빼내려 애썼다.
그마저도 금세 응접실에 도착하는 바람에 소용이 없었지만. 응접실엔 이미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누군가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아무도 없었다. 알폰스와 퍼스는 이미 방으로 올라간 듯싶었다. 그야말로 저를 만나기 위해 아비게일이 시간을 낸 거란 생각이 들자 더욱 의문이 증폭되었다.
“간단한 다과도 있으니 드세요.”
아비게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아는 다과에 손을 뻗었다. 한창 저녁을 먹던 중에 끌려온 참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을 리 없었다. 저녁보다 중요하지 않은 얘기라면 조금 화가 날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사교계에 잘 나오지 않으셔서 이렇게 만나 뵙는 건 두 번째인가요?”
“아, 네.”
정확히는 축제 때도 봤지만, 서로 눈만 마주쳤을 뿐 만났다고 하기는 미묘했다. 리아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게일은 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안부부터 묻기 시작했다.
“백작님은 잘 계신가요? 아버님께 항상 아주 공정하고 좋은 분이시라는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예. 잘 지내십니다. 아주 건강하세요.”
공교롭게도 리아가 페넬로페 백작으로부터 페르디난드 공작에 관해 들은 이야기는 달랐다. ‘영감탱이가 나잇살 처먹은 것도 모르고 고집은 쇠심줄 같아가지고…. 어떻게 모든 일을 폭력으로 해결할 줄밖에 몰라?’. 항상 듣던 백작의 외침을 뒤로 하고, 리아는 웃으며 홍차가 담긴 잔을 집어 들었다.
차마 빈말로라도 ‘저희 아버님도 공작님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몰랐다. 게다가 한눈에 봐도 관심사도 달랐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리아는 말없이 쿠키 몇 개를 삼켰다.
“왕궁 생활은 어떠신가요?”
“힘들긴 하지만 재밌습니다.”
그렇군요.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 한동안의 침묵이 찾아왔다. 리아가 막 이야깃거리가 없다면 이만 돌아가 보겠다고 하려던 참이었다.
“왕궁에서 재미있는 소문이 들려오던데요.”
“재밌는 소문이요?”
아비게일은 얘기하던 그대로 웃는 얼굴이었다. 꽃같이 미소 지은 그 얼굴로 비수를 꽂았다.
“알폰스 왕자님께 특별대우를 받고 계신다면서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초반에 식사 몇 번 한 걸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역시 약혼자가 있는 남성과 잠깐이라도 연관되는 게 아니었다. 괜히 퍼스에게 속으로 불만을 퍼부으며 리아는 미소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특별대우라니요. 그저 궁정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지 왕자님께서 한두 번 상담해주신 것뿐입니다.”
“그냥 상담만 하실 분이 아닌데요. 그분이.”
마치 바람피우는 남편 단속하는 아내 같았다. 필사적으로 거절하며 도망 다닌 게 바로 자신이건만. 리아는 당황을 너머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건만 의심받는 기분은 가히 좋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분께 정말로 이성적인 관심이 없어서요. 번지수를 잘못 찾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무의미한 대화를 계속하기 전에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리아의 입가에선 이미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비게일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상태였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그럼 퍼스 님 쪽인가요?”
이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저도 모르게 리아는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하여간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자신과 퍼스 사이를 의심하기만 했다.
“아닙니다. 퍼스 님과 저는 단순한 친구 사이일 뿐입니다.”
몇 번이나 이 말을 했을까. 이제 숨도 쉬지 않고 이 말이 나왔다.
“친구 사이?”
리아의 대답에 아비게일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그녀는 가식적인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왕궁에는 뭐 하러 들어간 겁니까?”
“일 하러지 뭐 하러 들어가겠어요?”
리아 또한 착하게 말하기를 포기했다. 적의를 드러낸 사람에게까지 친절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따질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알폰스 쪽은 핑계에 불과하고, 퍼스 쪽이 본심인 것도.
“듣자 하니 성인이 다 되도록 약혼자도 없으시다면서요? 입궁한 건 상대를 찾기 위함인가요?”
아버지인 백작의 생각은 아비게일과 일치했다. 하지만 리아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애초에 결혼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약혼자를 찾으려고 뭐하러 혈안이 된단 말인가.
“제 일에 무척 관심이 많으시네요. 아비게일 님 약혼자분에게 더 신경 쓰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알폰스 이야기를 꺼내자, 아비게일은 혀를 찼다. 그런 한심한 자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듯이.
“저희는 어차피 정략이니까요. 서로 누굴 만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가벼운 분보다는 진중하고 농담이라곤 할 줄 모르는 퍼스 님이 더 좋을 뿐입니다. 친구라고 하셨지요? 그럼 방해하지 말아주시겠어요?”
합의 하에 서로 바람을 피운다는 이야기였다. 서로 어떻게 지내든 상관은 없지만, 퍼스는 그곳에 끼지 말아줬으면 했다.
“퍼스 님의 친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퍼스 님께 괜히 요구하지 말아주시겠어요?”
“주제도 모르고 덤비지 마세요.”
비로소 그녀의 가면이 깨졌다.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낸 그녀의 표정은 오만했다. 태어날 때부터 사이키델리아의 정점에 가까운 공작가에서 키워진 그녀였다. 대대로 내려온 외척 세력이기 때문에 왕족조차도 제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해도 용서되는 입장. 그런 그녀에게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고작 백작가 영애 주제에.”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페르디난드 가의 영애다웠다. 게다가 자신의 약혼자는 차기 왕권 후보로 유력한 자였다. 그게 정략 약혼이어서 자신은 마음이 있든 없든. 무엇이든 자기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게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자라온 그녀라고 해도 리아를 함부로 모욕할 권리는 없었다. 자신이 백작가 영애인 것은 맞았지만. ‘고작’이라는 표현으로 매도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영애는 사람을 집안만 보고 판단하시나 보네요. 하지만 영애. 영애에게 집안 빼면 뭐가 남습니까? 영애 스스로는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으신가요? 집안, 권력, 외모, 돈 뭐 하나 영애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건 없지 않나요?”
“집안, 권력, 외모, 돈 빼고 뭐가 필요한데요? 그 정도면 태어날 때부터 다 가진 셈 아닙니까? 이미 다 가지고 있어서 제 힘으로 얻으려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는걸요. 그러는 영애는 뭐가 없어서 그렇게 일하려고 나서는 건데요?”
아비게일은 양쪽으로 손을 펼쳐 보였다. 현재는 비어 있는 그 손바닥 위에 세상이라도 올려둔 듯한 태도였다. 그녀에게 왕궁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하면 코웃음이나 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리아는 더 이상 그녀와 대화하는 게 시간 낭비 같았다.
“그게 원하시는 거였다면 그렇군요. 영애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살면 되죠. 그렇게 다 가지셨으면서 굳이 퍼스 님을 원하시는 이유는 또 뭔가요?”
“잘생겼잖아요. 다들 성격이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 점이 전 좋아요. 고분고분하면 재미없으니까.”
적어도 그녀에겐 외모라는 조건이 중요했나 보다.
“약혼자분도 외모로는 상당하신 걸로 아는데요.”
“어머. 이미 가진 건 관심 없죠.”
그녀에겐 알폰스 또한 수중에 들어온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어릴 때부터 정해진 약혼을 그가 파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반항인지 취미인지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그녀의 앞에서는 충실하게 약혼자 연기를 하는 게 그 증거였다. 인형처럼 완벽하게 약혼자 연기를 해내는 그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따분하다’였다.
반면 왕자와 함께 찾아오는 퍼스는 달랐다. 겉으로는 철저하게 예의가 발랐지만, 모든 일에 무감한 사람이란 걸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심지어 다들 아름답다 칭송하는 아비게일의 외모에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까부터 사람을 장난감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고분고분이라느니, 가지다 라느니 그녀가 쓰는 단어가 거슬렸다. 리아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친구인 퍼스가 누구를 선택하든 자신에게 참견할 자격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아니었으면 했다.
“제가요? 글쎄요.”
아비게일은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그녀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전 왕궁에서 제 능력이 쓸모 있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을 뿐입니다. 연애는 알폰스 왕자님이든 퍼스 님이든 현재로선 관심 밖입니다.”
“정말인가요?”
“네. 그러니 알아서 해주세요. 퍼스 님이 스스로의 의지로 영애와 혹여 만나시겠다면… 말리겠지만 방해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러면 됐을까요?”
“흠…. 일단은요.”
“나가봐도 될까요?”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자신의 저녁 시간을 방해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런 여성과 만난다면 퍼스도 그만큼의 사람일 뿐인 것 이리라. 괜스레 머리가 차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