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혹한기 (1)
리아는 페넬로페 저택에서 준비해준 겨울옷을 단단히 챙겼다. 왕궁에서 지급한 겨울용 근무복이 있었지만, 출장은 눈에 띄지 않게 사복으로 간다고 했다. 화려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재클린이 엉뚱한 겨울옷을 넣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최대한 실용적인 것들로 보내라고 했으니 그랬으려니 하고 짐을 확인해보지도 않았다.
“그거 사복이야?”
출발하기 전 옷은 얇은 봄옷이었다. 축제 때 이후로 사람들 앞에서 사복을 입은 것은 처음이었다.
“네. 케빈도 사복이네요?”
축제 날 함께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케빈의 사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사복이라고 하기도 미묘했다. 그는 용병들이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한쪽에는 검까지 찼고.
“제 실력은 안 나오지만, 그래도 검 정도는 휘두를 수 있어.”
리아의 시선이 검에 닿자, 변명하듯 케빈이 말했다.
“검이 필요한가요?”
복장이라기보다 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수도를 돌아다니면서 무기를 차고 다니는 사람은 용병과 기사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호신용 단검 정도는 차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하이버 지역은 치안이 좋지 않다고 했잖아. 언제 무슨 일이 닥쳐도 모른다고.”
이럴 때 리아는 순진한 귀족 아가씨라는 게 티가 났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보호받고 자랐기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 자신을 한심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리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니….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내가 지켜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뒤로 숨으라는 거야.”
하지만 리아는 케빈의 말을 듣지 않고, 먼저 말에 올라탔다. 오냐오냐하며 자란 귀족 아가씨라도 승마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 모습이 의외였는지 케빈은 멍하니 놀란 눈을 했다.
“약간의 호신술이라면 익혔어요. 오라버니들이 가르쳐주셔서요.”
어릴 때 오라버니들과 놀고 싶어서 검을 조금 배우기도 했다. 성미에 맞지 않아 금방 관두긴 했지만. 그때, 두 오라버니는 검은 관두더라도 몇 가지 호신술을 알아두라고 했다. 덕분에 리아는 사람의 급소 정도는 재빠르게 칠 줄 알았다. 의기양양해하는 리아의 모습을 올려다보던 케빈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자신이 그녀를 만만히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아 양.”
그때였다. 말을 타고 있는 리아에게 알폰스가 다가왔다. 그의 뒤엔 당연히 퍼스가 서 있었다. 눈짓으로 그와 인사를 나눈 후, 알폰스에게 인사하기 위해 말에서 뛰어내렸다.
“알폰스 왕자님.”
리아가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왕자는 손을 들어 말렸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깍듯한 인사를 하십니까.”
우리가 무슨 사인데.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굳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알폰스는 리아에게 웃어 보였다.
“페넬로페 가의 영애씩이나 되는 분이 말을 타고 가셔야 되겠습니까. 제 마차로 함께 가시지요.”
대놓고 특별대우였다. 한동안 조용하다고 했더니 왜 이러는 건지. 알폰스의 특별대우 덕분에 그동안 다른 동료들에게 뒷말을 듣기도 했다. 혹시나 이것도 퍼스가 생각한 건가 싶어 리아는 퍼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퍼스가 고개를 살짝 저어 부정했다. 이번만은 알폰스 본인의 생각으로만 일어난 게 맞았다. 그는 결백했다.
“전 괜찮습니다.”
리아는 단칼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데 여기서 더 눈에 띌 순 없었다. 특별대우 같은 걸 원한다면 처음부터 궁에 들어왔을 리 없었다.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알폰스는 당황했다. 가는 내내 마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와 친해질 예정이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단호한 표정이었다. 더는 권하지 못하고 물러서야만 했다.
“불편하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저는 일개 왕궁 근로자인 것을요. 이렇게 왕자님께서 몸소 신경 써 주시니 과분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자존심을 구겼지만 알폰스는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모두 앞에서 자신과 함께하는 게 쑥스러운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과 며칠이나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퍼스는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폰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스스로 되뇌며 정신승리를 일궈내고 있겠지. 어쨌든 뒤처리는 모두 그의 몫이었다. 먼저 사라진 알폰스를 보며 리아에게 속삭이듯 사과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전 정말로 괜찮아요.”
퍼스와 리아는 서로를 마주 보며 살며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케빈이 말을 걸었다.
“안 가시나요?”
“가야죠.”
마지막까지 그는 퍼스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원래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아는 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케빈 또한 리아와 같이 말에 올랐다.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은 여정의 시작이었다.
***
공식적인 방문이라고 해도, 적은 인원이었기 때문에 만일에 대비해야 했다. 일국의 왕자가 포함되었기에. 일행은 일부러 페르디난드 가를 거쳐 귀족이 외출하는 것처럼 꾸미기로 했다. 때문에 하루는 저택에서 묵게 되었다. 축제 때와는 달리 인원이 적은 편이었기 때문에 리아와 케빈 역시 저택에 묵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왕실의 후원자 역할이라 이거지.”
정치에 별 관심 없는 케빈도 이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보는 건데도 저택은 여전히 위압적이었다. 역시 왕궁 다음으로 큰 공작가다웠다. 리아는 다시금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알폰스 왕자의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약혼자인 아비게일을 모욕하는 일이었을 테니까.
그녀는 이번에도 알폰스를 마중 나왔다. 멀리서도 두 남녀는 잘 어울렸다.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약혼. 그 약혼을 배반하고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예쁜 약혼녀를 두고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구나. 저 정도 되면.”
“복잡한 사정이 있대요. 자기 말로는.”
변호하는 듯했지만 리아의 표정엔 그에 대한 불편함이 서려 있었다. 알폰스의 뒤에 있던 퍼스 또한 아비게일에게 인사를 했다. 대부분 세 사람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 퍼스 님도 참!”
그녀가 크게 웃으며 퍼스의 팔을 때렸다. 그 바람에 입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모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비게일은 선 채로 퍼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퍼스가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녀는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환하게 웃었다. 아무리 둔한 리아라도 그 정도면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명백히 태도로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혹시 저 약혼녀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거 아니야?”
심지어는 케빈도 눈치챌 정도였다. 이 정도면 숨길 마음이 없는 것 아닐까. 약혼자인 알폰스는 겉으로의 의례만 중요할 뿐, 그녀의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 보였다.
“혹시 신경 쓰여?”
“제가요?”
알폰스와 아비게일의 관계가 어떻든 그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약혼자들끼리 서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든, 자신에게 피해만 안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신경을 쓸 리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세게 쥐어?”
케빈의 말에 리아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가방끈을 세게 쥐어 손바닥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구경하다가 저도 모르게 그만. 별로 신경 쓰는 건 아니에요.”
“그래? 정말 신경 쓰는 건 아니란 말이지?”
“그럼요. 제가 왜 알폰스 왕자님과 페르디난드 영애 신경을 쓰겠어요.”
“왕자와 약혼녀 말고. 약혼녀가 저 보좌관을 좋아하는 게 신경 쓰이는 거 아니야?”
리아는 대답 대신 잠시 눈가를 좁혔다. 저택에 들어가는 내내, 퍼스는 외부 인사를 만날 때 쓰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데도 웃고 있다는 게 왠지 모르게 걸렸다.
“아뇨. 그것도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죠. 친구로선 솔직히 상관의 여자와 적절치 못한 관계가 되는 건 반대하고 싶네요.”
아비게일이 멋대로 좋아하는 건 괜찮았지만, 퍼스가 거기에 응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래도 상관의 약혼녀와 관계를 맺는 건 부적절하다는 생각 때문인 게 틀림없었다.
케빈은 말없이 리아를 내려다보았다. 한껏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는 퍼스에 대한 감정을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걸 자각시켜 줄 이유는 제게 없었다. 그녀가 끝까지 부정하고 싶다면 오히려 도와줄 셈이었다.
“리아, 난 바람 같은 건 안 피울 거다.”
갑작스러운 케빈의 선언이었다. 리아는 깜짝 놀라 주위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괜히 두리번거렸다.
“그런 말을 이런 곳에서 하시면 어떻게 해요!”
부끄러워하는 표정조차 케빈에겐 귀엽게 느껴졌다. 중증이었다.
“알아두라고. 나랑 만나면 좋은 점.”
정말 여정 내내 끊임없이 어필할 셈인 듯했다. 리아는 쑥스러움을 감추려 일부러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바람을 피울지 안 피울지는 가봐야 아는 거 아니에요?”
“그럼 일단 만나보든가.”
“너무 쉽게 얘기하시네!”
“넌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잠깐 진지하게 어필하던 케빈은 금세 평소의 장난기 많은 그로 돌아왔다. 리아는 평소의 그가 좋았다. 사이좋은 상관으로서 있어 줬으면 하는데 그는 자꾸 더한 관계를 바라니 부담스러웠다. 그 점을 잘 알아서 케빈도 자꾸 농담으로 분위기를 푸는 것이었다. 의식해줬으면 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여정을 앞두고 마지막 만찬이 시작되었다. 리아는 근무자 입장인지라 이번에도 주요 인사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소에 기숙사 식당에서 먹을 수 없었던 식단이 나오자 반가웠다.
“페르디난드 가문은 얼마 전 축제 때도 생각했지만 참 돈이 많은 것 같아. 이렇게 근무자들한테도 고기를 풀 정도인 걸 보면.”
고기는 한두 푼이 아니었다. 이 정도 인원에게 풀 정도면 서민 가족의 일 년 치 생활비와 맞먹을 터였다.
“너희 집은 어때?”
“저희 집이요?”
“너도 나름대로 백작가 영애잖아. 이 정도는 우습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동료의 물음에 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성이 생겨서 다행히 큰 타격은 없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태연히 고기를 찢어 입에 넣었다.
“할 수 있든 없든 너한테는 안 주지 않겠냐?”
동료와 리아의 사이를 케빈이 가르고 들어왔다.
“케빈 님! 여기 제 자린데요?”
“응. 알아. 네 얼굴 보고 밥 먹으면 체할 거 같으니까 저-기 끝자리로 가라.”
동료는 순순히 케빈이 가리킨 자리로 가 앉았다. 온실 근무자들은 모두 케빈을 무서워했다. 기사단 출신인 데다 험악한 인상까지 더해졌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리아는 만만했던지 그가 없을 때마다 종종 이렇게 괴롭히고는 했다.
“평소처럼 쏘아주지 그랬어?”
“저런 타입은 제가 상대해주면 더 재밌어하니까요.”
이미 일상이 된 듯 익숙한 태도였다. 그녀가 이들에게 지위를 이용해 보복을 하지 않으니 더욱 만만하게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가만히 참는 건 케빈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순간 상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페넬로페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