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출장 (2)
갑작스런 이름이 나오자 퍼스는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듯했다.
“왜 갑자기 거기서 그 이름이 나옵니까?”
“원래도 명단에 포함될 확률이 높지 않았는가. 원래 백작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친해지려고 했지만, 요즘 내가 다른 곳에 관심이 있어 조금 뜸했지.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다시 친해지면 좋지 않겠나?”
거절을 당해본 적이 별로 없는 자라 그런지, 알폰스는 완전히 리아에게 거절당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곤 다른 영애에게 관심을 돌리고 그녀를 꼬드기려 애썼다. 아마 그쪽은 리아와 달리 순순히 넘어온 모양이었다. 관심이 다시 돌아온 걸 보니.
“아까 보니 소중한 막내딸에 손을 대면 백작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 막내딸이 날 좋아한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나. 결국 퍼스는 현실을 조금 자각시켜 주기로 했다.
“제가 보기에 영애는 연애 쪽은 별 관심이 없는 듯하고, 왕궁 일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거야 아직 영애가 어려서 그러지. 곁에서 일까지 잘하는 내 모습을 보면 또 반하지 않겠나?”
‘또’라는 단어 선택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이번 하이버 출장 제안을 넣을 때부터 온실에 있는 케빈과 리아는 참여 인원으로 염두에 둔 상태였다. 그녀가 안 따라갈 확률이 적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최선을 다해 알폰스를 도우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야만 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출장이 기대되는군.”
그는 몹시도 하이버 출장이 걱정스러웠다.
***
“하이버요?”
“응. 어딘지 알지?”
당연히 사이키델리아 국사와 지리를 배울 때 들어본 지명이었다. 사이키델리아 외곽이자 혹한 지역인 하이버 지역을 모르는 국민은 아주 어린 아이 말고는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거기 혹한 지역 아닌가요? 저희는 사막 기후 관리 부서인데요.”
“그렇긴 하지만 식물 연구 쪽 관련자들은 부서 관련 없이 전부 출장을 가게 됐어.”
전문 분야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의 분야의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온실도 나름 몇 년을 주기로 부서 간 이동을 하기도 했으니까. 그중 식물을 실제로 돌보는 자들 외 연구자들은 더 소수였다. 냉대 기후 관리 부서의 연구진들로만은 부족하다는 게 윗분들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아마 숫자가 모자란 거겠지. 정치란 보여주기식이 중요하다고.”
그 말을 하는 케빈의 눈엔 혐오가 섞여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남의 눈을 계산하는 자는 정말 질색이었다. 그래서 귀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기도 했다. 기사단 내에서는 신분을 차치하고 실력으로만 계급이 나뉘기 때문에 찰리, 루퍼스와는 친해질 수 있었지만.
“그렇군요. 그럼 케빈 님은 가시는 게 이해가 되지만 저는요?”
케빈은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는 리아를 내려다봤다. 같은 귀족이지만 가식 없는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면 가슴이 간질거렸다.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데도 눈을 마주치니 괜히 쑥스러워졌다.
“아… 너는 내 관리 아래 있는 보조잖아. 당연히 날 도우러 가야지.”
정확히는 주어진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잠시라도 리아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게 본심이었다. 퍼스가 정식으로 제게 선언을 한 이후 더 초조해지기도 했다.
“그동안 제가 돌보던 사막의 기적은 어쩌고요?”
“아, 그건 다른 담당자들이 도울 거야.”
“그럼 다행이네요. 하이버 지역이라…. 전 처음 가봐요.”
“그래? 추운 지역이니 옷 잘 준비해야 할 거야.”
“많이 추운가요?”
“엄청. 눈도 많이 오지.”
케빈은 기사단에 근무했던 시절, 하이버 지역에 자주 갔다. 사이키델리아 국경에서 전쟁이 나면 그건 하이버 지역이었기에 당연하기도 했다. 혹독한 기후와 잦은 전쟁으로 지역 주민들의 민심이 흉흉한 곳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도 버려지기 일쑤였고,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고아도 많았다. 혹한으로 인해 식물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항상 식량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있는 자들은 조세를 줄이지 않았다. 그곳에 있다 보면 저절로 중앙에 있는 자들에 대한 혐오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케빈 님?”
다른 생각에 빠져서 케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리아가 부르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찌 됐든 치안이 좋지 못한 곳이란 건 확실했다.
“별로… 안전하지 못한 곳이니 몸조심하고.”
“네.”
“내 옆에 웬만하면 딱 붙어 있어.”
말해놓고 보니 이상했다. 당황한 케빈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손을 저었다.
“아니, 이상한 의미가 아니고! 위험하니까! 이래 봬도 기사단 출신이잖아, 내가?”
“네. 게다가 제가 케빈 님 보조이니 당연히 옆에 있을 텐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아는 전혀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태연한 그 표정이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증거 같았다. 그래서 더 의식하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 열심히 어필할 거야. 가는 내내.”
일부러 꺼낸 말에는 다행히 반응을 보였다. 당황해서 화르륵 불타오르는 리아의 얼굴을 보자, 짓궂은 마음이 샘솟았다. 살며시 손을 뻗자, 그녀가 주춤 얼굴을 뒤로 뺐다. 그 반응에 케빈은 조금 상처 입었다.
“하지만 너무 싫어하지는 말아줘….”
씁쓸해하는 케빈의 표정에 리아는 당황했다. 케빈이 싫은 건 아니고, 다만 갑작스러운 접촉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그를 피한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겠다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소매를 당겨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가렸다. 케빈은 그녀가 이 상황을 몹시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이렇게 말한 이상, 하이버 지역에 가는 내내 불편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불편해하길 바랐다. 그게 자신을 의식한다는 증거라면.
***
하이버 출장 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바로 얼마 전, 축제로 정신없었던 온실이 이번엔 출장 준비로 분주했다. 리아도 자신이 맡은 사막의 기적을 다른 담당자에게 인계했다. 안개처럼 물을 뿌리는 방법은 케빈의 도움을 받아 매일 하고 있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사막의 기적이 썩거나 시들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케빈과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안개처럼 물을 분사해달라고 다른 담당자에게 부탁했다.
처음 알폰스가 이 출장의 인솔자인 것을 알았을 때, 표정이 굳어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퍼스도 함께한다고 했다. 그는 알폰스가 제게 허튼 짓거리를 하려고 하거든 철저하게 막아주겠다고 선언했다. 자연스럽게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케빈도 이번 출장으로 자신과의 거리를 확실히 좁혀볼 모양이었다.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얘기를 상담했더니, 다행히 퍼스가 케빈과 분위기가 어색하면 최대한 끼어들어 주겠다고 했다. 여러모로 퍼스는 제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도움이 되든 안 되든.
퍼스가 저를 도와주기로 했다는 말을 했을 때, 메이의 표정은 미묘했다.
“너를 누구와도 안 되게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그 두 사람 모두 퍼스 님이 소개한 사람 아니야?”
“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영원히 이 분야에 관해서는 멍청한 줄 알았더니 이제 좀 감이 잡히나 보네. 그 사람도.”
“퍼스 님이 멍청하다뇨?”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지했잖아. 적어도.”
그 점에 관해서는 부정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자신도 퍼스에게 상처받았던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의 퍼스는 제 마음을 아주 잘 알아주었다. 마치 들여다본 것처럼.
“하지만 요즘은 정말 잘 알아주세요. 꼭 듣고 싶은 말만 해주시는걸요.”
“너에 관해서만 도가 텄나 보지.”
“제가 정보를 아주 많이 드려서 그런가 봐요. 배우시는 건 빠르니까.”
그런 이유가 아닐 텐데. 아마 관심사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성격인 게 분명했다. 퍼스는. 리아가 그의 관심사 한가운데 있다는 걸 그녀만 알지 못했다.
이제 퍼스마저 눈치챘으니 남은 건 리아였다. 이렇게 주변에서 난리를 피우면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한데 그녀는 철옹성처럼 둔함의 벽이 단단했다. 어쩌면 일부러 외면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가끔 그녀는 연애 자체를 거부하려는 것처럼도 보였다.
“메이는 가끔 혼자 생각할 때 제 머리를 쓰다듬더라고요.”
“네 머릿결 부드러워서 쓰다듬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
“지금은 귀찮아서 잘 안 하긴 하지만 저택에 있을 땐 재클린이 성심성의껏 관리해줬거든요. ‘아가씨는 머릿결이 생명이라고요! 몇 없는 장점 중에 하나니까 잘 관리하셔야 해요!’라면서요. 너무하지 않아요?”
“그래. 그분이 너무 솔직하셨네.”
“메이!”
메이는 리아의 머리를 빗다 말고 정수리 위에 턱을 올렸다. 그녀가 리아보다 키가 큰 터라 무리 없이 가능한 자세였다. 뾰족한 턱에 찔려 아플 법한데도 리아는 참고 가만히 있었다. 메이가 고민이 있다는 증거기도 했으니까.
“메이, 항상 제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가끔은 메이도 얘기해줘요.”
“음. 하이버 지역이라고 하니까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우리 가족도 어릴 땐 그 지역에서 살았거든. 너무 살기가 안 좋아서 수도 근처로 이사 오기 전까지.”
“그래요? 그럼 하이버 지역에 식물들이 어떤지 잘 아시겠네요?”
너무도 명확한 그녀의 관심사에 메이는 웃음이 났다. 어떤 의미에선 그녀도 퍼스와 똑같았다. 관심 있는 분야에 몰두하는 점이.
“그렇게 추운 지역인데도, 풀이 자라곤 했어. 가끔 사람보다 식물이 더 강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지. 하지만 기근이 들면, 그 초록색 하나조차도 보기 힘들었어. 대부분 맛이 없었는데 딱 하나, 생으로 먹어도 맛이 좋았던 풀이 있었어. 이름은 너무 어릴 적이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맛은 생생하게 기억나.”
그 뾰족뾰족한 이파리의 생김새는 기억났다. 칙칙한 색이라 처음에는 먹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끈질긴 권유로 메이는 풀로 만든 샐러드를 한입 넣었다. 쓸 줄 알았는데 부드러운 맛인 데다 풀에서 청량한 향이 났다.
“매일 푸석한 감자만 먹던 터라 더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지.”
리아는 메이가 말하는 기근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추억에 슬픈 기억만 가득한 건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가난한 와중에 가족들과 나누어 먹었던 감자 스프라든가, 이상한 풀을 먹었다 배탈이 난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이 났다.
“가난했지만 그래도 가족이 사이가 좋았던 때였는데….”
“지금은… 안 좋아졌나요?”
메이는 걱정스러워하는 리아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가족마다 사연은 다 있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일 뿐.
“아니! 지금은 식구가 늘어서 더 좋아졌지! 동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쳐준 덕분에 정신없어.”
북적북적하는 집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리움이 넘쳐흘렀다. 리아는 메이의 그 표정을 보고 부럽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가족은 꼭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 특히 부모님의 경우는. 찰리와 루퍼스도 자신을 소중히 생각해준다는 건 알았지만, 메이처럼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이버 지역에 가면 사람들은 조금 험할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해줘, 리아.”
“네, 알겠어요.”
매일 가족처럼 함께했던 메이와도 잠시 이별이었다. 서로를 끌어안으며 한동안 못 볼 것을 아쉬워했다.
“이러니 우리가 연인 사이 같네. 좀 떨어져.”
“메이, 너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