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출장 (1)
모두가 모인 회의장 안. 원래는 한 달에 한 번만 열리는 회의이나, 중요한 사항이 있어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사이키델리아의 실세라고 불릴 수 있는 자들이 이 회의의 참가자였다. 사이키델리아 국왕을 비롯해 차기 후계자인 알폰스 제1 왕자, 페르디난드 공작, 페넬로페 백작 등의 인사들이 앉아있었다.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모이게 된 건 하이버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 사건 때문입니다. 올해 조세를 걷던 중, 흉년을 이유로 조세를 내길 거부하며 일부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이버 지역은 사이키델리아의 외곽 지역이었다. 사이키델리아는 다른 나라가 침입하기 몹시 어려운 구조였다. 그 이유는 바로 이 하이버 지역 때문이었는데, 이 지역은 험준한 산맥과 혹한 기후로 유명했다. 다른 나라에서 사이키델리아를 침입하기 위해서는 군사들이 반드시 이 혹한에 견딜 수 있어야만 했다. 군사 요충지인 하이버 지역에도 사람이 살았는데, 대다수가 원래부터 살던 토착민이었다. 사이키델리아는 국가가 시작될 때부터 이들 토착민을 배척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해 노력했다.
“군사를 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행히 지금은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페르디난드 공작은 호전적인 사람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현재 상황을 오히려 불만으로 여길 정도로. 내전이 될 뻔했던 지금 상황에도 오히려 폭동이 진압되었다고 하니 아쉬운 기색이었다.
“그럼 문제가 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지요. 폭동이 일어날 정도의 흉년이라면 나라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주는 게 맞는 듯합니다. 그 지역 주민들도 저희 사이키델리아 국민이니까요.”
국왕은 되도록 귀족들이 아닌 국민들 편에 서려고 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의 국왕인지는 잊지 않고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반면 페넬로페 백작은 모두에게 온건한 중재자였다. 두 사람의 중도에 서서 타협안을 제시하는 게 그의 주된 역할이었다.
“자, 그렇다면 근본적인 대책을 생각하기 전에 시급하게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안건부터 먼저 생각해보지요.”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먼저 손을 든 것은 알폰스 왕자였다. 그는 후계자로서 교육을 위해 참가한 것뿐이기 때문에 의견을 내는 일이 적었다. 자신의 생각이란 것이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적도 많았다. 그런 그가 손을 드니 장내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의외라는 표정을 한 채로.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그의 미소는 한결같이 여유로웠다.
“일 년 동안만 하이버 지역 조세를 일부 감면하는 것이 어떨지요. 그리고 그간 근본적으로 흉년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는 겁니다. 성공하면 하이버 지역은 꾸준히 흉년을 면하게 될 테고, 저희도 원활하게 조세를 걷을 수 있을 테니 서로에게 완벽한 제안 아닐까요?”
“호오?”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또한 페넬로페 백작이 마지막에 내놓으려던 의견이기도 했다. 저 정도 생각을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던 왕자가 했다고? 자연히 의심이 들었다. 반면, 알폰스 왕자의 장인이기도 한 페르디난드 공작은 그의 의견을 반가워했다. 의견 내용이 아니라 ‘그’가 의견을 냈다는 사실 자체를.
“오, 알폰스 왕자님이 모처럼 만에 의견을 내주셨군요.”
“그동안은 식견이 모자란 제가 함부로 끼어들 수 없다고 생각해 경청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부족하나마 제 의견을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국왕 또한 자신의 아들이 의견을 내자 뿌듯해하는 표정이었다. 다들 그를 오냐오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좋은 의견인 듯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흉년을 극복할 생각이십니까?”
페넬로페 백작이 되묻자, 알폰스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이 말을 하는 순간, 그가 되물어볼 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온실 근무자들을 파견하여 직접 그들이 키우는 작물의 생태를 연구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기후에 맞는 작물을 추천하거나, 더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요.”
온실 근무자들이라고 하니 자연히 페넬로페 백작의 머리에 자신의 막내딸인 리아가 떠올랐다. 잘하면 그녀가 파견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노린 것인가? 그가 고민하는 사이, 페르디난드 공작이 의견을 냈다.
“그저 식물을 키우는 거라면 식물 능력자를 파견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이 또한 리아의 이야기였다. 그녀를 혹한 지역인 하이버 지역에 내몰려는 생각인가. 페넬로페 백작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식물 능력자에게도 한계는 있습니다. 설령 능력에 의존해 식물을 키운다고 해도 한시적인 대책일 뿐입니다. 일단 근본적으로 그들이 자력으로 헤쳐나갈 수 있도록 전문가들이 나서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이 안건에 반대한 것은 알폰스였다. 그가 내민 첫 의견치고는 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의견이었다. 혹시나 리아가 파견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알폰스의 의견엔 동의했다. 온실에 근무하길 원한 것 또한 리아 본인의 의견이었다. 자신이 맡은 일이라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백작의 생각이었고.
“전 동의합니다.”
그래서 백작은 먼저 찬성표를 던졌다. 국왕이나 페르디난드 공작의 의견은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 둘의 지지세력 또한 마찬가지였고.
“감사합니다. 제가 낸 의견이기도 하고, 하이버 지역 수습을 할 사람도 필요하고 하니 제가 직접 가볼까 합니다.”
“왕자님이 직접 말씀이십니까?”
여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알폰스는 오늘 제대로 왕위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굳히고 싶은 모양이었다.
“네. 온실 관리자들과 제가 함께 가서 하이버 지역 주민들을 돕고 싶습니다.”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위험하다고 해서 지도층에 있는 자가 백성이 있는 지역을 직접 가보지도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언제 이렇게 군주로서의 면모를 갖췄을까. 백작은 여전히 그가 못 미더웠다. 이유로 추측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그에게는 유능한 보좌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놀고먹는 왕자인 줄 알았던 자가 똑똑하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페르디난드 공작은 웃고 있었지만, 속이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사위가 될 알폰스를 아끼고 있었지만, 그가 머리가 커서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안 될 말이었으니. 그래서 제게 붙기 위해 리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게 한 듯싶었다. 제 주군을 무사히 왕위에 앉히기 위해. 제 주군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이것 참 만만찮은 상대군….”
물론 그의 중얼거림은 다른 안건으로 혼란스러워진 회의장에서 그 누구도 듣지 못했다.
***
회의가 끝난 후, 알폰스는 나가는 자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어느새 그의 뒤로 보좌관인 퍼스가 다가와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터라 안경 뒤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백작은 잠시 눈길을 줬다 알폰스에게 먼저 인사했다.
“왕자님, 오늘은 고생 많으셨습니다. 훌륭한 제안을 하셨더군요.”
“백작님께 칭찬을 듣다니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조언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눈앞의 번듯한 미소를 보니 백작은 조금 속이 뒤틀렸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이렇게 실력을 보이셨으면 될 일인데 말입니다.”
백작과 친분을 위해 리아를 이용한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말을 꺼낼 줄은 몰라, 알폰스는 당황했다. 그 대신 퍼스가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
“제 부족한 사견으로 리아 양을 왕궁에 모셔오게 되었으나, 리아 양은 인재가 맞습니다. 그녀의 능력으로 그걸 증명하고 있고요.”
“호오. 리아에 대해 꽤 자세히 아나 보지?”
물론 백작으로선 리아에 대한 칭찬은 달가웠다. 하지만 그녀가 과연 칭찬을 들을 만한 인물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이제 일한 지 2개월에 접어드는 수습일 뿐이었으니까.
“전 빈말은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 왠지 그런 것 같아 더 의문이군.”
눈앞의 퍼스라는 자는 웃는 낯이었지만 냉정한 사람이란 걸 잘 알 수 있었다. 백작에게는 이래 봬도 오랜 시간 사람을 봐온 감이란 게 살아 있었다.
“그럼 하이버 건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자님.”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페넬로페 영애는 파견되지 않도록 손을 쓰겠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리아도 왕궁의 일원인걸요. 근무하는 자로서 일을 맡게 된다면 가야지요. 그게 공평한 거고요. 저는 특별대우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알폰스가 배려해주겠다고 했지만, 백작은 차갑게 거절했다. 공정하다고 소문난 그다웠다. 자신이 잘못 말을 꺼낸 것은 아닌지 알폰스는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그 말은 퍼스가 시킨 말 외에 자신의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다. 백작은 알폰스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곤 미련 없이 돌아서 갔다.
그 전에 잠시 퍼스와 눈이 마주쳤다. 퍼스는 빙긋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백작은 그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확실히 인정할 만했다.
“다음에 또 보지.”
“네, 안녕히 가십시오.”
백작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알폰스 왕자에게서 긴 한숨이 나왔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자야.”
“그래서 더 우리 편으로 만들어두었을 때 도움이 되는 자입니다.”
“알고 있다. 그러니 귀찮은 짓까지 해가며 관심을 끌려고 하는 거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역시 자네가 준비한 대로만 하니 영감탱이들이 좋아하더군.”
“알폰스 왕자님, 아직 밖입니다.”
“알겠다. 하여간 자네는 잔소리꾼이라니까.”
알폰스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가는 방향만 보고 집무실이 아닌 방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퍼스가 물었다.
“바로 쉬러 가십니까?”
“그래, 오늘은 일을 너무 많이 한 것 같군.”
고작 회의에서 말한 걸로 많이 했다니. 연설이라도 시켰다간 2박 3일은 방에서 나오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퍼스는 역시 현명한 보좌관이라서 표정에 생각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출장이라. 귀찮게 되었군. 하이버 지역에 가면 미녀가 많을까?”
“업무상 나가시는 출장입니다. 너무 밖으로 나도시면 후에 좋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데리고 가면 되지 않겠는가!”
좋은 아이디어랍시고 알폰스가 화색을 띠었다. 대개 이럴 때는 퍼스로서는 달갑지 않은 아이디어가 나왔다.
“업무와 관련 없는 자들이 많이 뒤따라도 이상할 겁니다. 애초에 혹한 지역이라 식량이 부족할 거라 인원을 많이 데려갈 수도 없을 겁니다.”
알폰스는 걷는 내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일을 하러 가는 거면 제발 놀 궁리는 멈춰줬으면 했다. 하지만 알폰스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관심사 딱 하나밖에 들어 있지 않은 듯했다. 이럴 때마다 후계자로서의 입장을 공고히 하고 싶은 생각이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렇다면 역시 페넬로페 영애를 함께 데려갈 수밖에 없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