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42)화 (42/75)

#42.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2)

“리아!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흥분해서 루퍼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찰리와는 사이가 안 좋아도 자신에게까지 불만을 표시한 적은 없던 여동생이었다. 그런 리아가 진심으로 화를 내자 그는 당황했다.

“제가 모를 줄 알았나요? 두 분 다 제 능력을 내심 무시하잖아요.”

그건 리아가 아주 어릴 적 일이었다. 다른 고용인들을 제쳐두고 직접 그들에게 식사하라고 가던 길이었다. 그들 둘이서 나누던 이야기가 방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 리아는 왕궁에 가고 싶다고 하던데?

- 어린아이 생각이지. 누가 고작 식물 키우는 능력을 써주겠어.

- 그래도 어딘가에 쓸 곳은 있지 않을까?

- 루퍼스 넌? 저 능력이 어딘가에 쓸 데가 있다고 생각하냐?

- … 뭐. 전쟁에 도움이 되는 능력은 아니지.

찰리와 루퍼스에게는 사소한 일이어서 기억도 나지 않을 터였다. 리아가 그대로 뒤돌아섰으니 아마 들었는지도 몰랐을 거였다. 하지만 그 말은 어린 리아가 들어도 명백히 저의 능력에 대한 무시였다.

특히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그랬으니 배신감은 더욱 컸다. 두 사람에게 직접 말한 적은 없었지만, 리아의 가슴 한구석에 항상 그 말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더욱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의 능력이 쓸모없지 않다는 것을.

“전쟁에는 쓸모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게 가슴 깊이 묻어둔 말을 꺼낸 건 리아가 아닌 퍼스였다.

“저도 많이 들어봤습니다. 흔히들 하시는 생각이죠. 본인 기준에서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 기사이시니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루퍼스는 마치 속마음이 들킨 듯했다. 그는 입 밖에 잘 내지 않았지만, 리아의 능력을 쓸모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왕궁에 가지 못해 침울해하는 그녀를 위로할 뿐이었다.

“두 분 다 제대로 리아 양의 능력을 보신 적이 없는 것 같군요. 전 직접 보고 나서 리아 양의 능력은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능력도 아니었습니다. 전 그게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서 흰 꽃이 피어나던 순간은 아직도 퍼스의 기억에서 생생한 장면 중 하나였다. 아주 작은 기적이었지만, 크든 작든 기적은 기적이었다. 그녀가 왜 꼭 입궁하고 싶었는지 이해가 갔다. 스스로의 능력을 왜 그렇게 증명하고 싶어 하는지도. 가족들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았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능력을 부정당한 퍼스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퍼스 님….”

리아는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깊숙이 감춰두고 있던 마음을 퍼스가 끌어올렸다. 게다가 알아주고, 감싸주기까지 했다. 눈앞에 있는 두 오라버니보다 현재 리아의 마음에 훨씬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리아.”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찰리가 먼저 입을 뗐다. 처음부터 사과할 마음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남매끼리의 일이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것도 맞았고. 하지만 진심으로 상처 입은 듯한 리아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정말 미안하다. 네게 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그동안 네 능력을 무시한 것도 사실이다. 그것까지 모두 사과하마.”

찰리는 눈앞에 퍼스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존심보다는 당연히 자신의 여동생이 중요했다. 루퍼스 또한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리아, 본의는 아니었지만 상처 줬다면 미안해. 두 번 다시 네 능력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않도록 조심할게.”

두 사람 모두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항상 자존심 세고 당당했던 그들이 고개를 숙인 모습을 보자, 리아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알겠어요. 두 분 다 고개 드세요.”

“리아, 용서해주는 거냐?”

“대신 앞으로 제 결정하는 일 반대하시거나 혼인하라고 강요하시기 없기예요? 두 분 다요!”

“하지만….”

찰리는 눈으로 흘끗 퍼스를 바라보았다. 분명 리아에게 사과하게 된 계기는 그였지만, 사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리아가 그와의 교제를 허락해달라고 한다면 쌍수 들고 반대하고 싶었다.

“퍼스 님 노려보지 마시고요. 제 친구라고 몇 번 말씀드려야 할까요?”

하지만 또 리아가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말하니 걱정할 부분은 아닌가 싶었다.

“리아, 이자… 아니, 이분과 계속 다닐 거냐?”

이제부터라도 자신들과 다녔으면 했다. 리아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해도, 이자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었다.

“퍼스 님과 약속했으니, 당연하죠.”

“함께 다니면 어떻습니까?”

의외의 제안을 한 건, 퍼스였다.

“퍼스 님, 괜찮으시겠어요?”

“전 상관없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다 같이 축제 구경을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그는 외부 인사들을 만날 때 띠는 반듯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억지로 웃는 게 분명했다. 분명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같이 다니자고 하다니. 리아는 의아했지만 일단 승낙했다.

“알겠어요. 그럼 남은 시간은 같이 다니죠, 뭐.”

***

어릴 때 이후로 오라버니들과 함께 거리를 거니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두 사람은 이성에게 무척이나 인기가 있는 타입이라는 것을. 거기에 퍼스까지 가세해 세 남자가 자신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자,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리아, 뭐부터 먹을래?”

루퍼스는 옛날부터 여자가 많았다. 그는 축제에 와본 경험도 많아서인지 자연스럽게 일행을 안내했다. 길을 지나가면서도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는 여성들에게 일일이 윙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네요.”

“제가 그래서 그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거예요.”

“보통은 그분 외모만 보고 다들 좋아하시던데. 그래서 리아 양은 아니셨던 거군요. 납득 했습니다.”

루퍼스 덕분에 알폰스의 연기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루퍼스의 여성 편력을 잘 알고 있던 리아였다. 바람둥이가 짓는 거짓 미소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았다. 찰리는 두 사람이 바로 옆에서 말을 나누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일부러 눈치가 없는 척 사이에 끼어들었다.

“리아, 너 해산물 요리 좋아하지 않았어?”

“저 해산물 요리 별로 안 좋아해요.”

“리아 양, 저기 과일을 막대기에 꽂아서 파는 가게가 있는데 가보시겠습니까?”

“와, 좋아요!”

하지만 그동안 함께하지 않았던 간극은 메우기 어려웠다. 가족이라서 더 서로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고 몰랐던 점이 많았다. 리아가 퍼스에게 보여주는 웃음은 가족들에게 보여줬던 웃음과는 확연히 달랐다.

“사이가 좋네.”

어느새 찰리 곁으로 온 루퍼스가 중얼거렸다. 뒤에서 바라보니 리아가 많이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도 아닌데 괜히 그녀의 성장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좋기는.”

괜히 투덜대는 찰리였다. 어쩔 수 없어 함께 다니고는 있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히 노골적으로 친한 걸 과시하는 모습이었다.

“난 왠지 저 사람 이상한 것 같아.”

“뭐? 리아에게 역시 흑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아?”

“그런 의미가 아니고. 뭔가… 싸해.”

루퍼스는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봐서인지 그는 감으로 사람을 판단하고는 했다. 대부분의 감이 맞곤 해서, 찰리는 그의 감을 믿는 편이었다.

“저 사람 능력이 뭔지 알아, 형?”

“아니. 겉으론 안 알려져 있으니 모르지.”

“그럼 아주 약한 능력이거나….”

“정신 계열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서류 작업에 능하다고 하니, 단순히 능력이 약할 가능성이 높았다. 초능력이 아닌 본인의 능력으로도 인정받는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없지 않았으니까.

“전쟁에는 쓸모없는 능력이라며. 정신 계열이면 오히려 전쟁에 아주 유리한 능력 아니야?”

퍼스가 한 말을 떠올리며 조각을 맞춰보려 했다. 하지만 애초에 찰리나 루퍼스는 두뇌파가 아니었다. 쉽게 그의 능력에 대해 추측하기 어려웠다.

“저마다 종류가 다르니까….”

“큰오라버니! 작은오라버니! 안 드세요?”

“가고 있어!”

멀리서 리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쳐 대답하며, 퍼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금 전 이야기했던 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리아가 뭐라고 해도 난 저 사람은 반대야.”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의견이 맞았다.

***

케빈의 연구실은 오랜만에 조용했다. 밖은 축제의 열기가 아직 남아 시끄러웠다. 엄밀히 말해 휴가인데도 연구실에 나온 것은 가만히 방에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일에 집중하고 있어야만 비참한 기분이 차오르지 않았다. 찰리와 루퍼스에게 두 사람에 대해 말한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먼저 비겁하게 군 것은 저쪽이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제 감정에는 솔직하지 못한 게 더 괘씸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천막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반갑지는 않았지만.

“축제 구경하신다더니 일찍 돌아오셨네요?”

“리아 양의 두 오라버니가 걱정이 많으셔서 일찌감치 돌아오게 됐습니다.”

“고생하셨으니 가서 쉬시지 않고 어쩐 일이신가요.”

“제가 올 줄 이미 아셨을 텐데요.”

그제야 연구자료를 뒤적이던 케빈의 손이 멈췄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여유로운 척하려던.

“차라도?”

“괜찮습니다.”

하여간 불필요한 일말의 허례허식도 차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퍼스 베르시에란 남자는.

“그래서? 하실 말씀은?”

그의 옷깃에 낯선 물체가 반짝였다. 도무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꽃 모양 브로치? 묘한 조합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애초에 장신구 같은 걸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전 방해하려던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 그쪽은 노골적으로 방해하시더군요?”

“방해요? 우정이라면서요. 그럼 애초에 방해가 성립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저 장신구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추측하지 않으려고 해도 머리가 제멋대로 돌아갔다. 리아. 축제. 꽃 모양 브로치. 답은 너무 간단하게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해하신 이유는 뭡니까? 우정이라고 하시면서. 고작 친구 사이 방해한다고 리아 양이 케빈 님을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픈 곳을 잘도 찌르시네요. 하지만 리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다른 후보군을 없애는 것도, 방법의 하나잖아요?”

지금 케빈의 눈에 가장 거슬리는 건 역시 퍼스였고. 눈앞의 브로치를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의도했든 안 했든 친구라는 명목으로 리아의 신뢰를 얻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분명했다. 퍼스는 케빈의 시선이 자신의 브로치에 가 닿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라고 일부러 떼지 않고 바로 온 거기도 했다.

“자꾸 그렇게 자극하시니까 스스로도 의심하게 되지 않습니까. 제가 같은 경쟁 선상에 이미 서 있는 건 아닌지.”

“뭐요?”

“그리고 만약 제가 같은 선상이라면 케빈 님께 얼마나 귀찮은 방해물이 될지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알면서 자꾸 절 자극하지 마십시오.”

거기까지만 말하고, 퍼스는 뒤돌아섰다. 그의 등 뒤에 대고 케빈이 물었다.

“그래서, 당신도 리아를 좋아한다는 겁니까?”

돌아선 채로 퍼스가 대답했다.

“이미 그렇다고 확신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곤 더 이상의 말 없이 천막을 나가버렸다.

“저게!”

이번에 땅을 발로 차야 했던 것은, 케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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