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
“케빈 님…?”
케빈이 그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리아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굳이 그가 왜 그런단 말인가? 자신과 찰리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퍼스는 바로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했다. 함께 축제 구경을 하자는 케빈의 제안을 리아가 거절한 건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갔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을 방해할 방법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전직 기사단 출신이었으니 찰리, 루퍼스와 당연히 친분이 있을 터였다. 친오빠인 두 사람 중 찰리 쪽은 리아에게 부친에 가까운 애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말을 흘리면, 이렇게 될 것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는 생각보다 지능파였다. 그동안 제가 친구라는 명목으로 방해했던 게 어지간히 거슬린 모양이었다. 하여간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케빈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저 나와 이야기하다 네가 축제에 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줬을 뿐이니까.”
퍽이나. 퍼스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눈앞의 찰리에게는 들키지 않게 시선을 피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랑 퍼스 님이 축제에 나간 게 무슨 문제라고 여기까지 쫓아오셨어요?”
“너! 외간 남자랑 단둘이 나갔다는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거냐, 지금?”
“퍼스 님이랑 저는 그냥 친구라고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주위에 민폐가 될까 하여, 퍼스는 둘을 진정시켰다.
“두 분 모두 진정하시죠.”
차분한 그의 말투에 찰리가 역으로 더 화가 났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무슨 생각으로 리아를 데리고 나온 겁니까?”
조금 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걸 잊고, 찰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고 삿대질을 했다. 거기에 욱한 건 리아였다.
“오라버니, 지금 어디다 대고 손가락질이세요?”
“너 지금 친 오라비보다 이자를 감싸는 거냐?”
“제가 큰오라버니를 감쌀 이유는 또 뭔데요? 오라버니보다야 제 친구인 퍼스 님이 훨씬 중요한데요?”
리아의 말에 세 사람 모두 놀랐다. 찰리와 루퍼스는 퍼스와 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이 역시 친구 이상의 사이가 아닌가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퍼스는 머리가 아파 왔다. 그녀가 자신을 중요시한다는 건 좋은 말이었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찰리의 반감을 사기만 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 남매는 왜 이다지도 사이가 나쁘단 말인가. 자신의 형제와 함께해본 적 없는 퍼스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이래서 궁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입궁시켜 주신 건 오라버니가 아니라 여기 이 퍼스 님이시라고요.”
리아의 말에 찰리가 퍼스를 더욱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퍼스가 입을 뗐다.
“본론에서 벗어난 것 같은데 제가 말씀드려도 괜찮으실지요.”
“네, 네. 말씀하세요. 형, 앉아서 얘기해.”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루퍼스가 일어서 있는 찰리를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먼저, 리아 양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는 친구 사이가 맞습니다. 하지만 두 분께서 걱정하실 만도 하죠. 두 분에게 전 낯선 남자일 뿐이니까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침착한 그의 목소리에 셋 모두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그렇다고 해도 무작정 찾아와서 방해하시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엄연히 리아 양에게도 스스로 판단할 능력은 있으니까요.”
돌아가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단호한 그의 눈빛과 말투에 찰리와 루퍼스는 왜 그가 권력의 정점에 있다는 소문이 도는지 깨달았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겼어도 그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그리고 리아 양에게 하실 말씀 있으시죠?”
그의 말에 찰리는 속으로 뜨끔했다. 첫 목적은 퍼스를 리아로부터 떼어놓는 것이었지만, 내심 사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의 앞에서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큰오라버니. 제가 분명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요?”
“리아, 그 일은 형이 실수한 거야.”
루퍼스가 그를 감싸고 나섰다. 예전부터 찰리와 리아의 중재를 나서던 버릇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작은오라버니! 그만 변호하세요. 제가 사과 듣고 싶은 사람은 큰오라버니예요.”
하지만 찰리는 쉽게 사과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점에 더욱 화가 난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정도 말도 할 자신 없으시면 찾아오지 마시고요.”
리아는 냉정히 그들을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루퍼스가 그녀를 잡았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우린 친남매잖아. 어차피 평생 안 보고 살 수도 없다고! 그런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이거 놔요!”
“가족이라고 꼭 봐야 하나요?”
퍼스는 루퍼스가 잡은 팔을 강제로 떼어냈다. 나름 기사단원이라 힘을 자부했던 그는 자신의 손이 간단히 떼어지자 깜짝 놀랐다. 그를 잡은 퍼스의 손은 맨손이었다.
“저희 남매 일입니다. 참견하지 마시죠.”
루퍼스는 세게 그를 뿌리쳤다. 일부러 힘을 담아 뿌리친지라, 손목이 얼얼한지 퍼스가 살짝 손목을 만졌다. 그러고선 다시 장갑을 꼈다.
“참견하지 않게 하려면 처음에 해결하셨어야죠.”
“뭐라고요?”
“왜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것도 하필 축제 때 오신 겁니까?”
“그, 그거야 평소엔 기사단이 바빠서….”
“기사단 추가 훈련 시간이 끝나고도 온실이나 기숙사를 왕복할 시간은 충분하셨을 텐데요.”
퍼스가 어떻게 추가 훈련 시간에 대해서 아는지 잠깐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왕궁 내 사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 정도 아는 것쯤은 당연한가 싶었다.
“하지만 형은… 부 기사단장이라 사무 업무로도 바쁘다고요!”
“찰리 님은.”
퍼스의 시선이 찰리에게로 옮겨갔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왠지 속이 꿰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일까. 찰리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처음부터 사과하실 마음이 없으셨던 것 아닙니까?”
“아무렇게나 말하지 마시죠!”
역시나 이번에도 그를 대변한 것은 루퍼스였다. 하지만 퍼스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리아 양이 화내는 건 언제나 있는 일이라고,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냐고 생각하셨나요?”
그의 말에 찰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함께 리아에게 사과하러 가자고 찾아온 루퍼스에게 찰리가 직접 한 말과 똑같았다.
“어, 어떻게 그걸…?”
“오라버니,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서서 듣고 있던 리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퍼스의 말을 들으니 화가 났던 게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가 화를 내고 가봤자 찰리는 개의치 않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리아 양에게 사과받기보다는 두 사람 사이 중재에 더 적극적인 루퍼스 님, 자존심을 먼저 세우는 태도에다가, 리아 양이 간다고 했을 때조차도 사과를 안 하셨으니까요. 찰리 님은.”
사실은 그저 본 것뿐이었지만. 퍼스는 그럴듯하게 이유를 꾸며댔다. 두 사람에게 처음부터 날을 세울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리아와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 난 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들은 말에 퍼스 또한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건 당신이 있어서…!”
순간적으로 찰리의 본심이 튀어나왔다.
“제가 있어서라고 하실 겁니까? 그럼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면 폭언 대신 사과를 하실 수는 있으시고요?”
퍼스는 팔짱을 끼고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비웃고 있다는 걸 안 찰리는 화가 치밀었다. 당장에 식탁이라도 뒤집어엎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옆에서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리아가 정말로 두 번 다시 자신을 만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자존심 다 지키시면서 하는 게 사과는 맞습니까?”
퍼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찰리의 자존심을 상처 내는 것이었다.
“당신 말 다 했어? 당신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 왕궁 내 소문이 자자하니까. 듣자 하니,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갖추지도 않은 냉혈한이라며? 그런 주제에 남매 관계에 대해 뭘 알아?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이 내 여동생 옆에 있는 거 불쾌해. 당장 떨어져.”
찰리의 폭언은 리아가 아닌 퍼스에게 떨어졌다. 하지만 리아의 표정이 더욱 창백하게 굳었다. 오히려 퍼스는 자신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변화 없이 여유로웠다.
“큰오라버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일리 있는 말이군요.”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리아를 그가 가로막았다.
“저는 형제 관계 같은 건 잘 모릅니다. 워낙 어릴 때 입궁해서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베르시에 저택에 그 말고 후계자가 한 명 있었다. 나이 차가 많은 그의 형이었다. 친형이라고는 하지만, 부모님과 같이 그를 싫어했다. 베르시에 가문을 이을 후계자가 있었기에, 자신이 더욱 쓸모가 없어진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남처럼 살았기에, 그를 형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저는 적어도 리아 양에 대해서는 찰리 님보다 잘 아는 것 같네요. 그녀의 능력은 진짜입니다. 친 오라버니라고 하면서 그녀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보진 않으신 모양이군요?”
“퍼스 님, 어떻게 아셨어요? 큰오라버니가 제 능력에 대해 얘기한 걸?”
퍼스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 이 말엔 놀랐다. 찰리가 리아의 능력을 무시했던 그 자리에 있던 건 퍼스가 아니라 케빈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세 사람 모두 무슨 일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리아 양이 얼굴도 마주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화낼 정도면 뭐 때문인지 전 아니까요. 분명 능력에 대한 이야기였겠죠.”
찰리와 루퍼스에게는 자신이 너희보다 리아에 대해 더 잘 안다는 말로 들렸다. 반면, 리아에게는 자신도 리아를 화나게 한 전적이 있어서 알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그의 시선이 잠깐 리아에게 왔다 갔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 또한 그저 본 것뿐이었다. 사정을 더욱 자세히 알기에 그 이유에 대해 그럴듯하게 둘러댈 수 있었고. 잠깐의 접촉으로 루퍼스는 그에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
“그건 그냥 실수로 한 말이었습니다. 결코 리아를 무시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루퍼스 님.”
또다시 루퍼스가 나서자 퍼스가 말렸다.
“중재를 하실 거면 치우침 없이 정확히 가운데에 서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 찰리 님 편에 서서 얘기해봤자 리아 양에게는 조금도 납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퍼스의 말에 이번엔 루퍼스의 기분이 나빠졌다. 항상 남매 사이의 중재를 해왔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게 형의 편을 든 거라고?
“전 제대로 중재하고 있습니다!”
“아뇨, 작은오라버니도 똑같아요. 항상 참고 화 풀라고 하시는데 누가 말을 그렇게 했는지부터 생각해보세요. 그게 사과하면 항상 끝나는 일인가요?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무의식중에 그런 말이 나오지도 않았겠죠.”
“리아. 난 형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아니야. 그저 남매끼리 싸우고 하는 게 싫을 뿐이야.”
“그게 큰오라버니 편을 드는 거라고요! 그렇게 큰오라버니를 감싸는 건 작은오라버니도 똑같이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제 능력이 하찮다고! 이런 능력으로 왕궁에서 일할 생각 하지 말고 그냥 혼인이나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