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봄의 여신제 (7)
갑자기 무대 중앙으로 한 인영이 난입했다. 그는 리아에게 익숙한 자였다.
“큰오라버니!”
그 소란의 와중에도 퍼스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자신의 누이를 끌어안고 있는 그를 보며 찰리는 표정이 굳었다. 아니, 점점 살벌해졌다. 그의 뒤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루퍼스가 따라서 올라왔다. 그는 주위에 사과하며 찰리를 끌고 내려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계속하세요.”
“리아, 어떻게 그런 남자에게 안겨서… 읍!”
루퍼스는 찰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흥분한 찰리가 반항했지만, 주변인들의 눈총을 받고 진정했다. 어마어마한 눈빛을 받으면서 퍼스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리아 양, 꼭 잡아주세요. 떨어뜨릴 것 같습니다.”
“네, 네!”
리아는 퍼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가 흘린 땀으로 옷이 젖고 있었다. 이제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자존심 싸움이었다. 갑작스러운 찰리의 난입으로 당황한 것은 퍼스뿐만이 아니었다. 퍼스를 도발하던 남자 또한 흘러내리는 연인을 계속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잠시 혼란이 있었지만 게임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앉았다 일어나 주세요!”
이제야 정신 차린 듯 사회자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힘이 빠지는 상황에서 앉았다 일어나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팔과 허벅지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지지 않기 위해 퍼스는 최선을 다해 고통에 집중했다.
“포기하지 그래?”
옆에서 남자가 다시 도발했다. 하지만 그 또한 만만치 않게 힘든 모양이었다. 퍼스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조차 할 수 없는 게 맞았다. 무대 아래서 올려다보던 루퍼스는 퍼스의 모습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꽤 근성은 있는데?”
하지만 찰리는 여전히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파렴치한 자식. 어디 남의 여동생에게 손을 대…!”
게다가 지금 그들이 참가하고 있는 게임이 커플 게임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둘이 커플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은 리아에게 연인이라니 말도 안 됐다. 옆자리 남자는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옆에서 들려오는 각종 더러운 말을 무시한 채, 퍼스는 리아에게 속삭였다.
“다 듣지 마세요.”
“전 부디 신경 쓰지 마세요. 퍼스 님 힘드셔서 어떻게 해요….”
그녀는 연신 흘러내리는 그의 땀을 닦아냈다. 속상한 마음에 거의 울상이었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거리자, 퍼스도 이만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늦었긴 하지만 갑자기 왜 이기고 싶으셨습니까?”
“상품으로 축제 기념품을 준다고 해서요. 두 개 나눠 가지면 좋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모처럼 퍼스 님과 나온 축제니까 기념할 만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 했어요….”
리아는 모르고 있는 듯했지만, 퍼스는 상품이 무언지 알았다. 꽃 모양 장신구였다. 사실 처음 그걸 봤을 땐 도대체 누가 이런 걸 가지고 싶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워낙 물욕이 없으니, 의견이 참고가 안 됐다. 다른 사람 의견에 따라 정한 것이었다. 지금도 장신구가 별 쓸모는 없다는 생각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꼭 이겨야겠네요.”
퍼스는 그녀의 허벅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치마가 살짝 흘러내려 그의 손가락 일부가 리아의 맨살에 닿았다. 둘 다 눈치챘지만, 지금으로선 움직일 수가 없었다. 퍼스는 치마가 더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에 꽉 힘을 줬다.
“저, 저 자식이 어디다 손을 대는 거야!”
찰리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무대 위로 난입하려 했다. 루퍼스는 그를 꽉 부여잡으면서 본인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 너무 막상막하라 승부가 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힘든 연인을 위해 응원하는 시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응원? 뜬금없는 소리에 퍼스와 리아 두 사람 모두 당황했다. 하지만 상대편 커플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힘내, 자기야-!”
애교 섞인 여성의 응원과 함께 거침없는 입맞춤 세례가 이어졌다. 남자의 얼굴을 부여잡고 여기저기 입을 맞추던 그들은 어느새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광장 전체에 그들을 응원하거나 질투하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보던 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저런 응원은 불가능하다고!
“오, 대단한 응원이네요! 이어서 맞서는 귀염둥이와 안경 팀은?”
두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 주위의 원성이 빗발쳤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고,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볼 뿐이었다. 안 그래도 잔뜩 맺혀 있던 식은땀이 이제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할 수 없었다. 왜 이런 걸로 승부를 가려야 하는지 당황스러웠다. 리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 눈을 꼭 감아버렸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왠지 모르게 맞닿은 피부가 데인 듯 화끈거렸다.
“기권하겠습니다.”
결국 퍼스는 살며시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놀라긴 했지만, 리아는 내심 안심했다. 더 이상 몰리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멋대로 기권해서.”
“아니에요. 괜찮으세요? 많이 힘드셨죠.”
리아는 소매를 당겨 퍼스의 얼굴을 닦아냈다.
“옷 더러워져요.”
말리고 싶었지만, 맨손으로 차마 만질 수 없어서 그 또한 어쩔 줄 몰랐다. 서로를 보며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영락없는 커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쉽습니다! 1등 하신 커플에게는 무려 왕궁에서 직접 하사한 보석함을 드립니다. 그리고 2등 하신 커플에게는 참가상으로 축제 기념품을 드리겠습니다.”
“어어?”
퍼스가 아는 최종 상품과 내용이 달랐다. 그가 결재를 한 내용을 바꿀 사람은 알폰스 왕자뿐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리아의 앞에 원했던 축제 기념품이 도착했다. 꽃 모양으로 만든 브로치 두 개였다.
“퍼스 님, 이거 봐요! 2등 상품이 기념품이었어요!”
“그러네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처음으로 상관인 알폰스 왕자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감사해야 할 듯싶었다. 센스가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서류에 상품을 멋대로 바꾸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리아는 그의 옷깃에 브로치를 꽂았다. 퍼스는 그 브로치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꽃 모양 브로치라니. 자신이 이걸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저도 달아주세요.”
나머지 하나를 내민 리아는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함부로 손대기 어려운 곳이라 퍼스는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곤혹스러워했다.
“끝났으면 얘기 좀 하지?”
어느새 두 사람의 곁에 리아의 두 오빠가 다가왔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양쪽에서 감싼 상태였다. 찰리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퍼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번 다시 뵙고 싶지 않다고 했을 텐데요?”
리아는 퍼스에게 지었던 환한 미소와는 달리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걸 눈치챈 찰리와 루퍼스는 당황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
“아직도라뇨?”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듯한 기세였다. 여동생의 기백에 눌린 두 오빠는 어떻게든 리아를 회유하려 했지만 역효과였다. 결국 이 분위기를 수습해야 하는 건 퍼스였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길까요?”
***
퍼스가 찰리 페넬로페와 루퍼스 페넬로페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세 사람은 리아와 겉모습은 닮았으면서도 성격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그럼 일단 마실 걸 먼저 주문하죠.”
페넬로페 삼 남매의 공통점은 감정적이라는 점이었다. 자연히 공정한-정확히는 냉정에 가까웠지만-편인 퍼스가 그들을 중재했다. 찰리는 그마저도 못마땅했다. 하지만 퍼스에 대한 적개심을 함부로 드러내면 리아가 화낼 거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축제를 위해 마련된 가판에 앉아있었다. 퍼스나 루퍼스, 찰리는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인데 한 테이블에 있으니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다. 리아는 안 그래도 불편한데 그들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해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주문하시겠어요?”
“커피 두 잔, 코코아 두 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내 루퍼스와 리아 앞에는 코코아가, 찰리와 퍼스의 앞에는 커피가 가지런히 놓였다. 퍼스가 커피에 설탕을 하나둘 넣자, 찰리는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라면 그냥 마셔야 하는 것 아니야?”
그는 괜히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하지만 퍼스는 개의치 않고 설탕을 네 개까지 집어넣었다.
“단맛이 두뇌 회전에 도움이 되어서요.”
“그 정도면 그냥 코코아를 마시는 편이 낫지 않아요?”
루퍼스는 설탕이 녹는 걸 바라보며 기겁했다. 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퍼스 님이 뭘 마시든 무슨 참견이세요?”
리아가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헛기침을 하며 제 앞에 놓인 음료를 마셨다.
“무슨 음료를 어떻게 마시느냐는 개인의 선택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리아 양을 찾아오셨습니까?”
“친 오라비인 저희가 여동생인 리아를 찾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찰리는 퍼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외모부터, 냉랭한 저 말투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런 자가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있으니 당연히 못마땅했다. 게다가 자연스레 저희들 남매 사이에 끼어드는 것 또한 거슬렸다.
“같은 왕궁에 있을 땐 찾지 않으시다 갑자기 축제 때 찾아오셔서 그렇습니다. 그쪽도 어렵게 얻은 휴가이실 텐데요.”
퍼스는 찰리가 자신을 거슬려 한다는 것쯤 금세 파악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알랑거릴 만큼 그는 유하지 않았다. 그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리아 또한 그의 기분을 눈치챘다. 자신도 불쾌한 건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퍼스와 즐겁게 지내고 있던 시간에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좋은 추억으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르는 하루였다. 찰리와 루퍼스 두 사람이 더 이상 망치지 말았으면 했다.
“볼일 없으시면 그냥 가던 길 가셨으면 좋겠네요, 오라버니들.”
“리아, 그게 무슨….”
“형, 지금은 잔소리할 생각 말고. 우리가 뭐하러 왔는지 잊었어?”
루퍼스는 당장에 또 싸움이 일어날까 전전긍긍했다.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둘이라 방심하면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다. 찰리는 크게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다리까지 꼬고 싶었지만, 눈앞의 퍼스가 거슬렸다.
고작 남작의 아들이었다. 신분으로 따지면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겠지만, 그는 하필 제1 왕자의 제1 보좌관이었다. 계승권이 확실한 왕자의 최측근. 심지어 능력을 인정받아 궁에서 소문이 자자한 자였다. 함부로 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의 능력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왕궁에서도 일부 왕족, 능력 관리 부서에 속한 최상부 인물 몇 빼고는 그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그런 자일수록 수상한 능력을 가졌을 확률이 높았다. 찰리는 여러모로 그에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케빈이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설마 네가 따로 남자를 만나고 있을 줄이야….”
“뭐라고요? 케빈 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