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봄의 여신제 (6)
“뭐라고요…?”
생전 입에 담아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퍼스는 아연실색했다. 스스로를 ‘귀염둥이’라 칭하고도, 리아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도대체 상품이 뭐길래 저 사람은 저토록 열심인 걸까.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문제를 맞히기 위해선 저 애칭을 스스로 입에 담아 불러야 하는데 도무지 입 밖에 낼 자신이 없었다. 혹시 그녀가 자신을 수치사 시키기 위한 계략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그리고 저는 퍼스 님을 ‘안경’이라고 부를게요.”
그러고선 자신이 부르는 애칭은 묘하게 현실적이고, 별명 같았다. 항의하려고 하는데, 또다시 사회자가 방문했다.
“마지막 리아 양과 퍼스 군은 서로 어떤 애칭을 사용하시나요?”
“저는 퍼스를 ‘안경’이라고 불러요.”
리아는 또 사근사근 웃으며 연인 연기를 했다. 손가락으로 퍼스의 안경을 살며시 올려주는 게 포인트였다. 도대체 이런 기술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의심스러워진 퍼스는 눈가를 좁혔다.
“그럼 퍼스 군은 리아 양을 뭐라고 부르시나요?”
사실은 이때 다른 애칭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퍼스는 이 순간, 생각보다 순발력과 창의력이 뛰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옆에서 팔꿈치를 슬쩍 조이는 힘이 느껴졌다.
“귀염… 둥이.”
“네? 뭐라고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사회자는 퍼스를 두 번 죽이려는 듯 되물었다. 고의가 분명했다. 그는 악에 받쳐 크게 소리 질렀다.
“귀염둥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에 광장에 몰려 있던 사람들 모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긴가? 뭐가 웃기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부끄러운데! 퍼스는 얼굴 전체가 새빨개졌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리아를 돌아보니, 잘했다는 의미로 그녀는 웃어 보일 뿐이었다. 분명 자신이 원하던 대로 그녀가 웃고 있건만,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그 애칭은 잘못되었다고 정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봄의 여신제를 맞아 먼저 꽃 관련 문제로 준비해보았습니다. 사이키델리아의 국화는?”
“안경!”
“네, 정답은?”
“스타티스입니다! 사이키델리아 신화에서 봄의 여신이 혹한의 눈을 녹이기 위해 힘을 다 쓰고 스스로 꽃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오는 꽃이죠. 주로 5월에 피기 때문에 봄의 여신제가 스타티스의 개화 시기에 맞춰 열리는 겁니다! 냉한 기후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수도보다는 사이키델리아 외곽의 혹한 지역에서 더 잘 자라는 꽃입니다!”
확신에 찬 리아가 부연설명까지 덧붙였다. 문제를 맞히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불타는 듯한 눈빛을 본 퍼스는 자신도 몰래 그녀에게서 몸을 멀리했다.
“아, 네. 정답입니다. 제가 하려고 했던 말까지 전부 해주셨네요. 하하.”
사회자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리아의 팀에 한 점을 주었다.
“식물 관련은 제게 맡겨주세요.”
리아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퍼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은 문제의 정답을 알아도 말할 자신이 없었다. 부담스러운 애칭 덕분에.
“두 번째 문제입니다. 사이키델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미남은 누구일까요?”
듣자마자 정답을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알폰스가 지역 축제 준비소까지 찾아간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고작 저 한 문제를 위해서일 거라고는. 한심해하는 사이, 연속 오답 행렬이 이어졌다. 리아는 누군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간에 유명한 미남 배우들 이름은 다 나온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정답인 걸까요?”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왜 그렇게 맞히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꼭 이기고 싶은 듯했다. 이 중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사람은 부정하고 싶지만 저 하나뿐인 듯했다. 어쩔 수 없이 퍼스는 손을 들었다.
“오!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계셨던 남성분이 드디어 손을 드셨군요. 하지만 정답을 맞히기 위해서는 애칭을 외치셔야 합니다.”
“귀, 귀염둥이.”
“네? 뭐라고요?”
하여간 사회자가 지나치게 짓궂었다. 내년 축제엔 반드시 저 사회자가 진행하지 못하게 하리라. 월권을 쓸 계획을 하면서 퍼스는 또 냅다 소리쳤다.
“귀염둥이!”
“네! 정답은요?”
“알폰스 사이키델리아 제1 왕자님이십니다!”
그 순간 광장이 조용해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게 왕족의 얼굴은 국민들이 쉽게 보지 못했다. 일 년에 한 번 행렬에서 얼굴을 본다고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잘 볼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알폰스가 미남이라는 건 소문으로만 전해졌다.
“정답입니다-! 어려운 문젠데 잘 맞히셨네요!”
정답이라는 말을 듣고도 참가자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왕족이라고 하니, 차마 따지지도 못했다. 맞힌 퍼스조차 스스로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괴상한 애칭을 외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상관을 미남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다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우와! 어떻게 아셨어요, 정답을? 대단해요!”
다행히 리아는 어이없어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단지 정답을 맞혔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퍼스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뭔가요?”
“마주 쳐주세요.”
무슨 의민지 모르겠지만, 그는 일단 손을 살짝 마주 댔다. 승리를 기원하는 그녀만의 의식인가 싶었다. 한번 수치스럽고 나니, 이후는 쉬웠다. 퍼스는 역사, 경제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정답을 맞혔다. 리아는 식물에 관한 거라면 자신 있었다. 다행히 꽃에 관련한 축제라 식물 관련 문제도 다수 있었다.
“첫 번째 게임의 승자는 귀염둥이와 안경 커플입니다!”
마지막에는 수치스러운 애칭이 불려도 개의치 않았다. 리아와 퍼스는 승리의 기쁨을 나눌 뿐이었다. 워낙 점수를 독점하다시피 해서 다른 커플들의 눈총을 샀지만 상관없었다.
두 번째 게임은 머리가 아닌 힘으로 하는 게임이었다. 둘 중 체력에 자신 있는 쪽이 자신의 연인을 안고 앉았다 일어나는 게임이었다. 단순하지만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다.
“리아 양이 드실래요?”
퍼스는 잠깐의 실수로 잘못 질문을 꺼냈다가 리아의 눈총을 샀다. 다른 커플의 경우는 여성이 직접 드는 경우도 있었기에 물은 것뿐이었다.
“누가 봐도 퍼스 님이 더 크고 힘도 세실 텐데요.”
“아까 문제 풀 때 테이블 내려치는 것 보니까 리아 양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는데….”
그녀는 정답을 맞힐 때마다 테이블을 내려치곤 했다. 그때마다 테이블에 있는 물건들이 공중에 뜨는 것을 보고 퍼스는 조금씩 겁을 먹었다. 리아는 생각보다 승부욕이 대단했다.
“이번 게임도 꼭 이겼으면 좋겠는데요.”
이번 게임 승패는 안타깝게도 전적으로 드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전 게임도 거의 퍼스의 힘으로 이겼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이번 게임 역시 그에게 달려 있다니. 승리를 원하는 건 정작 그녀인데. 불공평한 현실이지만, 입 밖으로 불평을 꺼낼 수는 없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는 겉옷을 벗고 팔을 걷어 올렸다. 그 와중에도 흰 장갑은 벗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치마 때문에 맨살에 손이 닿을 염려는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다행히 그의 능력은 맨손을 통해서가 아니면 발휘되지 않았다.
“오, 장갑을 끼고 참가하시는 겁니까? 괜찮으시겠어요?”
사회자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질문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퍼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리아 또한 장갑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가 왠지 모르게 사람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꺼리는 걸 알기에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처음에 뺀 것치고는 그의 팔에는 잔근육이 많이 붙어 있었다. 얇은 옷만 입고 있어선지, 자세히 봐서인지 몸의 윤곽이 더 잘 보였다. 민망해서 안 보려고 몸을 돌렸지만 그가 오히려 더 가까이 왔다.
“준비하시고.”
“실례하겠습니다.”
“들어 올려주세요!”
사회자의 신호와 함께 퍼스는 리아의 무릎과 어깨에 손을 둘러 단번에 그녀를 들어 올렸다.
“와악!”
반사적으로 리아는 퍼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황급히 놓으려고 하는데, 그가 말렸다.
“최대한 매달려 있어 주세요. 움직이지 말고요. 그게 체력을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리아의 심장이 엄청나게 뛰었다. 이제야 정신이 조금 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족 아닌 남성과 이렇게 몸이 가까워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승부욕에 눈이 멀어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와 자신은 심지어 연인 사이도 아니었다. 그는 순전히 리아의 고집에 어울려주고 있는 것뿐이었다. 미안하면서도 부끄러웠다.
“죄, 죄송해요. 힘들면 내려 주세요.”
아까 아수라장에서 잔뜩 먹었던 게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덜 먹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퍼스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할까 봐 최대한 시선을 피했다. 그는 리아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 않기 위해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게 더 힘이 들 터였다. 손을 풀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온몸의 군살이 신경 쓰였다.
“걱정 마십시오. 힘들면 바로 내릴 겁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퍼스의 성격상 진담일 가능성이 컸다. 내심 안심하며, 리아는 자신의 몸무게가 조금만 더 가벼워지기를 부질없이 바랐다.
“자, 모두 잘 버티시는 듯하군요. 그럼 다음 단계로 가겠습니다. 이제부터 구령에 맞춰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겠습니다!”
“앉았다 일어나기?”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한다는 이야기만 듣고도 포기하는 커플도 있었다. 퍼스 또한 별다르지 않았다. 사회자에 이어 이 이벤트를 기획한 자도 내년에는 축제 기획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잘라버리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크윽….”
힘든 티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점점 더 퍼스의 얼굴은 빨개졌다. 게다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리아는 제 옷깃을 당겨 그의 땀을 닦아냈다.
“그냥 흐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더러워집니다.”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내려 주세요. 정말 죄송해요.”
“어이, 기생오라비!”
그때였다. 옆에 있던 근육질 남성이 퍼스를 불렀다. 누가 봐도 그는 이번 게임의 우승 후보였다. 몇몇 후보가 나가떨어지자, 그는 심리전을 펼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중 가장 안정된 자세가 퍼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심리전에 걸릴 퍼스가 아니었다. 그는 명백하게 자신을 부르는 걸 알고도 무시했다. 사회자는 혹시 재밌는 상황이 나올까 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는 역시 잘려 마땅한 사람이었다고 퍼스는 결론 내렸다.
“연약하게 생겨서 대단한데. 이만 포기하는 게 어때? 그러다 막상 써야 될 때 제대로 못 쓴다구!”
주변에서 일부 관중들이 그와 함께 웃었다. 명백하게 리아와 퍼스를 희롱하는 말이었다.
“그 입. 다무시는 게 좋을 겁니다.”
“협박하는 거냐?”
“예. 여러모로. 전력을 다해서요.”
사실 당장에라도 포기하고 싶었다. 그 순간에도 남은 커플들이 쓰러져서, 결국 남자와 퍼스 둘의 승부가 됐다.
“퍼스 님, 제발 이제 포기해요. 이러다 진짜 다치실지도 몰라요. 제가 정말 죄송해요.”
“아뇨, 이제 제가 지고 싶지 않아서요.”
이제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 싸움에 가까웠다. 퍼스는 흘끗 본 그의 얼굴을 머리에 새겼다. 입 한번 잘못 놀린 대가는 혹독하리라. 전신이 아파 오는 고통을 참으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죄송한데 조금 손을 펴서 잡아도 될까요. 미끄러질 것 같아서요.”
“네, 네. 그러세요.”
퍼스는 결국 리아의 양해를 구하고, 주먹을 쥐었던 손을 폈다. 손으로 꽉 쥘 수 있게 되자, 힘을 주는 게 훨씬 편했다. 그때였다.
“그 손 못 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