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봄의 여신제 (5)
아수라장에서 나온 요리의 맛은 하나하나 모두 색달랐다. 리아의 상상 속에 없던 맛이었다. 맛볼 때마다 감탄하는 리아를 보며 퍼스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하지만 설마 나온 음식을 모두 먹을 줄은 몰랐다. 꽤 많은 양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접시가 거의 다 깨끗했다. 지나가며 서빙을 하던 점원도 테이블을 보며 꽤 놀란 듯했다.
“제가 좀 많이 먹었나요?”
퍼스와 점원의 표정을 눈치챈 리아가 머쓱해했다. 대부분의 음식을 먹은 건 바로 그녀였다. 평소 식당에서 준 정해진 양을 먹는 것만 봤기에 설마 그녀가 이렇게까지 잘 먹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맛있으셨나요?”
“네! 무척이요.”
“돌아가서 소개해준 분께 감사 인사를 해야겠군요.”
냅킨을 집은 퍼스는 리아의 입가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미처 닦지 못한 부분이 있던 모양이었다. 쑥쓰러워하며 리아는 살짝 몸을 빼다가 다시 살짝 내밀었다. 퍼스는 그녀의 입가를 세게 문지르지 않도록 조심조심 닦아냈다.
“헤헤. 감사해요.”
“뭘요.”
계산하러 가니, 점원이 둘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왜 웃나 갸웃하는 사이 그가 서비스라며 작은 쿠키를 내밀었다.
“가운데를 부수면 점괘가 나오는 쿠키예요.”
“와아. 신기한 쿠키네요.”
각자 하나씩 쿠키를 반으로 쪼갰다. 파삭파삭하는 맛있는 소리가 났다. 안이 텅 빈 쿠키 안에는 가늘고 긴 종이가 있었다.
“‘행복이 가득한 하루가 될 것’이라는데요?”
“저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생길 듯’이라고 써 있습니다.”
리아와 퍼스의 점괘 모두 비슷한 내용이었다. 점원이 웃으며 잔돈을 건넸다.
“두 분 모두 특별한 하루가 되시겠네요.”
일부러 듣기 좋은 말만 넣어놓은 모양이었다. 상술이라고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리아는 가게를 나서며 쿠키 남은 부스러기를 입에 넣었다. 별다른 맛은 나지 않았다. 맛보단 재미를 위해 만든 쿠키인 듯했다.
“이 쿠키 좋네요. 왠지 다음에 또 오고 싶게 만들어줘요.”
“가게 수완이 보통이 아닌 것 같군요.”
“이국적인 분위기라 낯설 것 같은데 음식도 다 맛있고, 점원도 친절해서 좋네요.”
“네, 다음에 또 올까요?”
‘다음’이라는 단어에 괜히 마음이 술렁였다. 그와 또 이렇게 거리를 걸을 일이 있을까? 그게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무척 즐거울 듯했다.
“네! 꼭 또 와요, 우리.”
***
다시 거리의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리아는 광장 한복판으로 달려나갔다.
“같이 가요, 리아 양!”
퍼스는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닿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몸에 치였다. 평소라면 이런 장소는 아예 발조차 들이지 않을 터였다.
“퍼스 님!”
멀리서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힘으로 밀어보려 했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그때였다. 사람들 사이로 팔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순간 맨살이 닿은 줄 알고 흠칫했지만, 다행히 옷 위였다.
그러곤 강한 힘으로 그를 당기기 시작했다. 퍼스는 사람들 사이로 몸을 밀어 넣어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비로소 빠져나왔다 싶었더니, 광장 한복판에 자신이 서 있었다. 자신의 손목을 잡은 것은 리아였다. 그녀의 이끌림에 따라 무대 중앙으로 나선 것이었다.
“모두 참가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봄의 여신제 기념 커플 능력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
“리아 양. 이게 무슨…?”
“왜요, 재밌잖아요. 한번 참가해봐요. 상품도 준대요.”
“하지만 이건.”
“쉿. 지금만 커플인 척해요.”
리아는 광장 중앙에 먼저 도착해서, 대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퍼스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게임에 참가 신청을 했다. 그녀의 목적은 단 하나, 상품이었다.
퍼스는 갑자기 게임에 참가하게 되어 당황했다. 여신제에 올라온 모든 이벤트들은 다 자신의 결재를 거쳤다. 하지만 설마 자신이 이벤트에 참가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 외에도 여러 커플이 나와 있었다. 저마다 사이를 자랑하듯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리아는 조심스레 퍼스에게 물었다.
“퍼스 님, 지금만 커플인 척해도 될까요?”
“이제 와서 제 의사를 물으시는 거예요?”
“보아하니 다른 커플들처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맘껏 실례하세요.”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대답이었다. 이미 참가 신청을 했으니 무르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사회자는 한 커플씩 인사하고 소개를 하고 있었다. 이제 한 커플만 더 소개하면 리아와 퍼스의 차례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실례를 예고하고, 리아는 퍼스에게 팔짱을 꼈다. 예상치 못했던 실례에 퍼스가 딱딱하게 굳었다. 리아는 그를 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싫어도 티 내지 마세요. 지금만 좀 참아주세요!”
싫은 게 아니었다. 다만 갑자기 그녀와의 거리가 확 가까워져 당황한 것이었다. 꽉 붙잡힌 팔로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무표정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저도 모르게 달아오르는 귀 끝까지는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사회자는 한 커플씩 인사하고 소개를 듣고 있었다. 리아는 먼저 대답한 커플들에게 뭘 물어봤는지 확인하며 미리 대답을 준비했다. 퍼스는 최대한 팔에 느껴지는 감각을 무시하려 애써야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참가한 커플을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리아만 활기차게 대답했다. 퍼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얼핏 보면 기분이 나쁘다고 오해할 수 있었으나, 그저 긴장한 것뿐이었다. 그는 항상 뒤에서 일하는 것만 했지 이렇게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전 리아라고 하고, 제 연인은 퍼스라고 합니다.”
“연인….”
퍼스는 저도 모르게 반박하려다 리아의 매서운 눈빛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사회자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은 만난 지 얼마나 되셨나요?”
“이제 겨우 두 달 되었습니다.”
진짜로 딱 만난 지요. 리아는 뒷말은 속으로 되뇌었다.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퍼스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이라도 티를 냈다간 그녀에게 혼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 한창 뜨거울 때로군요.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이분이 제 소문을 듣고 저희 집까지 찾아왔지 뭐예요. 첫눈에 서로 반해 만남을 이어가게 되었답니다.”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었다. 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퍼스가 집까지 찾아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맞았다. 하지만 첫눈에 반했다니….
“호오. 남자분이 적극적이셨군요. 그에 반해 무대 위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시는군요. 퍼스 님이라고 했던가요. 리아 양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습니까?”
퍼스는 리아에 비해 빠르게 거짓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솔직한 것도 좋고, 꿈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환하게 웃을 때… 도 예쁜 것 같고요. 잘 먹는 것도 좋고….”
퍼스의 말이 길어지자 사회자가 임의로 잘랐다.
“네! 한마디로 전부 다 사랑스럽다는 말씀이신 거죠?”
사회자의 말에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랑스럽다니. 그런 단어를 자신은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리아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네. 그렇습니다….”
“이것 참 닭살 커플이로군요. 듣고 있는 제가 다 부끄러워집니다.”
점점 사회자의 오해가 깊어지는 듯했다. 구경하는 사람들마저 휘파람을 불어댔다. 조금 부끄러워진 퍼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잘하셨어요.”
리아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귓가에 다시금 속삭였다. 하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한순간에 바로 옆의 연인을 너무나 사랑하는 팔불출이 되어버렸다.
“그럼 본격적인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게임은 문제 맞히기입니다!”
문제 맞히기의 방식은 간단했다. 문제를 내면 자신의 연인 애칭을 외치고 맞힌다. 가장 점수를 많이 내는 커플이 이기는 것이었다.
“문제라니! 그런 거면 퍼스 님에게는 식은 죽 먹기죠. 간단하시죠?”
“하지만 애칭을 불러야 한다는데요.”
두 사람에게 애칭이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이름을 부르면 안 되냐는 다른 커플의 질문은 이미 기각되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애칭을 만들라는 뜻이었다. 분명 재미를 위해서겠지만 이 순간이 수치스러운 퍼스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리아는 커플 게임 종목이 마음에 들었다. 보좌관씩이나 되는 퍼스가 상식에 능한 것은 당연했다. 이 게임은 전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다만 애칭을 뭐라고 할지가 걸렸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쉽게 발음할 수 있어야 하고, 애칭으로서 적합해야 했다.
“퍼스 님, 예전 연인에게 썼던 애칭 같은 거 없으세요?”
“예? 전 연인 같은 존재가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과거를 밝히게 된 퍼스가 인상을 썼다. 아마 그녀는 애칭을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연인이 있었던 적도 없는데 애칭 같은 걸 불러봤던 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 그러시군요. 저랑 똑같네요.”
어떤 의미로는 당연했다. 두 사람 모두 제대로 된 ‘좋아하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럼 알폰스 님! 알폰스 님이 연인을 부를 때는 주로 어떻게 부르시나요?”
그 사람이 부르는 애칭 따위 관심이야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들을 만난다면 다양한 애칭을 불렀을 법도 했다.
“아, 그거라면. 최근에는 생물 계열로는 나의 작은 새, 종달새, 밤비, 강아지, 사물 계열로는 보석, 설탕, 무형물 계열로는 사랑, 기적 등이 있습니다.”
“가지가지 하네….”
저도 모르게 불평이 나와 버렸다. 알폰스가 바람둥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나둘 정도가 아니라는 게 놀라웠다.
“그럼 이 중 어떤 걸로 하면 될까요?”
“하나같이 느끼해서 듣고 싶지 않네요. 음… 뭘로 해야 좋을까요?”
그러면서 리아는 다른 커플들을 염탐했다. 질문한 커플을 빼고는 제각기 애칭 정도는 있는 모양이었다. 부부도 있는지 ‘여보’부터 시작해서, 알폰스와 맞먹는 애칭도 많았다. ‘예쁜이, 자기야, 애기야’ 등이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 외에도 주로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칭찬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리아는 퍼스를 돌아보고 심각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셔야 해요.”
“네? 네.”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애칭을 제시하려고. 퍼스는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리아의 표정은 워낙 진지해서, 안 된다고 말하면 크게 혼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부터 저를 귀염둥이라고 불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