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봄의 여신제 (4)
퍼스와 만나기로 한 건 왕궁을 나서는 직원용 입구 앞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을까 걱정되어 리아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 외에도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많은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으려나…?”
왕궁에서 공인한 휴일이 많지 않아서인지, 쉬지 않고 거리로 나서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저마다의 사복을 입고 있었다. 뛰면서도 이상하지는 않은지 옷매무새를 계속 만지게 됐다.
“리아!”
저 멀리서 퍼스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손을 따라 열심히 달렸다.
“뛰지 마세요! 넘어져요!”
그가 말렸지만 왠지 더 속도를 높이고 싶어졌다. 서둘러 그를 보고 싶어서였다. 막상 그의 앞에 갔을 때는 차오르는 숨을 고르느라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천천히 오시라니깐요.”
리아가 숨을 가다듬을 때까지 그는 기다려주었다. 그제야 메이가 다듬어준 머리가 떠올랐다. 기껏 예쁘게 묶어주었을 터인데 달려서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머리를 매만지자, 퍼스가 손을 뻗어 입가에 걸린 머리카락을 떼어내 주었다.
“오늘 유난히 예쁘시네요.”
그는 리아가 오늘 신경 써서 꾸몄다는 걸 금세 알아보았다. 리아는 부끄러움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고, 고개를 낮췄다. 그제야 퍼스 또한 사복 차림으로 갈아입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성격답게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평소와 모습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왠지 그가 더 잘생겨 보였다.
“퍼스 님도 멋있으시네요, 오늘.”
“과찬이십니다. 가실까요?”
한마디씩 칭찬의 말을 주고받은 그들은 왕궁을 나서려 했다.
툭.
“어이쿠, 미안합니다.”
서둘러 나가려던 누군가가 리아를 밀어버렸다. 대충 사과한 그는 문밖으로 금세 모습을 감췄다. 넘어지려던 리아를 퍼스가 잡았다.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아요. 사람이 많네요.”
왕궁의 성문과 달리 직원용 출입구는 매우 좁았다. 오늘은 나가려는 직원들로 출입구가 붐비고 있으니, 밀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퍼스는 리아를 바로 세운 후,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서로 잃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한번 손을 잡으니, 이제 다시 잡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몇 번을 잡아도 떨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흰 장갑 위지만 왠지 그의 손이 뜨거운 것만 같았다. 왕궁 밖으로 나오니 인파가 더했다. 휩쓸려가지 않도록 두 사람은 손을 더 꼭 쥐어야 했다.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외국인 관광객까지 더해져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능력자들이 펼치는 마술쇼입니다! 보고 가세요!”
“맛있는 과일 있습니다! 한번 잡숴보시죠!”
떠들썩한 소리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흥분한 사람들의 열기 덕분에 리아의 심장도 세차게 뛰었다.
“뭐부터 보러 가실래요?”
“네? 잘 안 들려요!”
“뭐부터 보러 가실 거냐고요!”
다만 지나치게 떠들썩해서 가까이에서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별수 없이 퍼스는 리아를 잡은 손을 세게 당겼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귓가에 대고 말했다.
“뭐부터 보러 가실 거냐고 했습니다.”
그의 숨결이 느껴지자, 리아는 흠칫 떨었다. 귀는 예민한 곳이었다. 간질거리는 감각과 동시에 묘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음, 음…. 배부터 채울까요?”
“알겠습니다. 제가 잘 아는 식당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죠.”
계속해서 그가 귓가에 말하자, 손끝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새삼 생각하지만 그는 목소리도 좋았다. 면역이 없는 그녀로서는 당연히 심장이 뛸 법도 했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계속해서 친절하게 굴었다.
누군가 부딪히려고 하면 잡은 그녀의 손을 당겨 어깨를 끌어안았다. 분명 자신의 기억으로는 사람과 닿는 걸 싫어했던 것 같은데. 자신에게는 이토록 거리낌 없이 손을 뻗었다. 리아는 혼란스러움에 거리 구경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퍼스가 갑자기 멈춰 섰을 때, 반사적으로 옆 가게로 갈 뻔했다. 퍼스가 추천한 곳은 본 적 없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가게였다.
“음. 간판을 못 읽겠는데요?”
“이국의 언어입니다. ‘아수라장’이라고 써 있다고 하더군요.”
“‘아수라장’? 그게 뭔가요?”
“어떤 여신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장판이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싸움을 좋아하는 여신인가 보죠?”
“그렇지 않을까요?”
가게엔 문 대신 발이 쳐 있었다. 퍼스가 먼저 발을 걷으며 가게로 들어갔다. 차라락, 하는 소리가 나며 가게 내부가 조금 보였다. 꽤 인기가 있는 집인지 손님으로 가득했다.
“손님이 많네요?”
퍼스가 발을 걷은 상태로 옆으로 비켜났다. 감사 인사 대신 고개를 숙이며 리아 또한 가게로 발을 내디뎠다. 따뜻한 음식이 많은지 가게 안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쳤다. 가게 안을 바쁘게 뛰어다니던 소년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전문가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두 명입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점원의 친절한 태도 덕분에 식당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둘은 구석 쪽 테이블을 안내받았다. 가운데 쪽은 사람이 다 차서 앉을 곳이 없었다.
“메뉴판입니다.”
빼곡히 글자가 써 있는 메뉴판에는 이국의 글자가 가득했다. 리아가 곤혹스러워하자 점원이 재빠르게 사이키델리아어로 된 메뉴판을 내밀었다.
“처음 오시는 건가요?”
“네.”
“퍼스 님도 처음이세요?”
“네, 저 밖에선 잘 안 먹어서요.”
자연스럽게 이 식당으로 데려오기에 아는 식당인 줄 알았다. 그런데 처음이라니. 리아는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아는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추천메뉴가 뭔가요?”
“오늘은 토마토가 신선한 게 들어와서요! 토마토 계열 요리 추천 드립니다.”
“리아 양 토마토는 못 드시지 않아요?”
“어, 기억하시네요.”
“당연히 기억하죠.”
원래 그가 기억력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자신에 대한 걸 기억해준다고 생각하니 또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 계란볶음밥 어떠세요? 호불호 없이 손님들 대부분 좋아하시거든요.”
“그럼 그거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외에도 만두나….”
리아와 퍼스는 전적으로 점원의 추천에 의지해서 주문했다. 뭔가 예상보다 많이 시킨 것 같았지만, 일단 여러 가지를 조금씩 먹어보기로 했다.
“와본 적 없으시다면서 어떻게 이런 곳을 아셨어요?”
“아, 직원 중 한 명이 추천하더군요. 특이한 식당이니 가보면 어떻겠냐면서.”
그가 아래 직원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일단 메이는 그와 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축제 구경을 위해 나름대로 조사한 것일까. 리아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메뉴판을 살폈다. 하지만 메뉴판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긴장한 상태였다. 평소라면 억지로 말을 할 바에는 가만히 있었겠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왜 그러세요, 퍼스 님?”
“예?”
“메뉴판을 뚫을 것처럼 보고 계셔서요. 뭔가 안 좋은 내용이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는 서둘러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중지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자신은 원래 이렇게 냉정을 잃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리아 옆에 있으면 이렇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수도는 수도네요. 우리나라 음식은 아닌 거죠?”
“예. 요즘 외국과의 교류가 많으니까요. 외국인도 수도에서 가게를 열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도요?”
“이 가게도 외국인이 차린 겁니다. 나라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먼 곳에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이 가게 주인을 아세요?”
“아뇨. 가게 열 때 허가요청서가 올라왔던 기억이 나서요. 원래 관청 쪽에서 끝나는데 외국인이라 이례적으로 왕궁까지 올라왔더라고요.”
퍼스의 말을 천천히 곱씹던 리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 말은 왕궁으로 올라오는 그 많은 서류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건가? 새삼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퍼스 님은 정말 능력자이신 것 같아요.”
“리아 님도 능력은 있으시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 일을 정말 잘하시는 것 같다고요. 혹시 퍼스 님의 능력은 그런 건가요?”
능력이라는 말에 물잔을 쥔 퍼스의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아직 리아에게 자신의 능력을 밝힌 적이 없었다. 원래 그의 능력을 아는 자는 몇 없었다. 기밀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알려봤자 그들에게 돌아올 반응이 뻔해서였다. 혐오. 두려움.
전투에 유용한 능력은 아니었지만, 한 개인에 대해서 그의 능력은 어떤 의미로 살상 무기보다 더 강력했다. 그 사람의 약점을 들여다보는 것이므로. 심지어 그는 리아의 마음을 훔쳐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밝히면, 분명 들킬 것이다. 딱 한 번 장갑을 벗고 손을 댄 순간을.
그러고 속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제대로 된 사과가 가능했던 자신을. 목이 탔다. 퍼스는 대답 대신 천천히 물을 마셨다. 하지만 최대한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리아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서류 작업이 좀 더 편하긴 했겠군요.”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였을까? 자연스러웠을까? 떨리는 심장을 숨기며 슬쩍 리아를 바라보았다.
“아…. 하긴 그렇네요! 이상하게 서류 결재를 돕는 능력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리아는 자신이 아는 능력들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생각에 빠진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퍼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을 그녀가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잠깐 반칙을 쓴 것만으로 그녀의 신뢰가 돌아왔다. 자신을 보는 냉정한 눈빛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메뉴 나왔습니다!”
“와, 퍼스 님. 봐봐요. 하나같이 다 맛있게 생겼어요!”
흥분한 리아는 저도 모르게 퍼스의 옷깃을 당겼다. 허락도 없는 터치였지만, 그녀가 만지는 건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네. 하나씩 먹어봐요.”
퍼스는 제 앞에 놓인 그릇 중 하나를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뭐죠?”
“아, 그건 말이죠. 젓가락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쥐고 사용하시면 돼요.”
“이, 이렇게요?”
“아뇨. 이렇게 중지를 이용해서.”
리아는 처음 보는 젓가락의 사용법을 점원에게 배우고 있었다. 사소한 것에도 열심인 그녀였다.
“퍼스 님도 해보세요! 너무 어려워요.”
“저는 잘됩니다만?”
퍼스는 단번에 젓가락 사용법을 익혔다. 점원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 번에 배우는 사람은 좀처럼 없는데! 대단하시네요!”
리아는 제 일도 아닌데 작게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제가 젓가락질을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 제가 집어드릴까요?”
“아뇨! 제가 해볼게요.”
언젠가는 솔직하게 그의 능력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녀가 웃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