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봄의 여신제 (3)
“되고 싶어서 귀족이 된 것도 아닌데. 저런 말을 하니까 기분이 나빠서요.”
“되고 싶어도 못 되는 사람이 대다수야. 특권층이 그런 말을 하면 되겠어?”
“억울하잖아요. 제가 잘못한 건 없다고요.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지.”
“그럼 무시해버려. 적어도 그런 말을 들었을 때 협박할 정도는 되잖아.”
맞는 말이었다. 가끔 신분이 리아를 숨 막히게 했지만, 귀족이 된 게 저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맞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기분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꼭 그렇게 사실로 사람을 때려야만 하는 걸까.
“그래요. 어차피 케빈 님도 절 싫어하시니까.”
“안 싫어해.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갑작스러운 말에 오히려 리아의 뺨이 화끈했다. 낯간지러운 말을 한 것치고는 케빈은 너무 태연했다.
“귀족… 여성은 싫어하셨으면서.”
“말했지 않아? 넌 그다지 안 싫다고. 왕궁에 있으면 제법 많은 여성들을 만나게 되거든. 그중에서 워낙 안 좋은 케이스를 많이 만나서 말이야.”
안 좋은 케이스? 머리에 떠오르는 예시가 없었다. 그녀는 원래 사교계에 등장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취미가 없어서 친한 귀족 여성이 몇 없었다.
“몇 명은 나한테 애첩이 되라더군.”
“애첩?”
깜짝 놀랐지만 그럴 듯도 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케빈도 제법 미남이었으니까. 게다가 사연 있는 미남이라니. 여성들이 딱 좋아할 타입이었다.
“그래. 솔직히 선입견이 있었다. 원래 귀족 여성들은 다 그런 건가 하고.”
“아니에요.”
“아니었지. 그걸 너를 보고 깨달은 거고. 나한테 지금 가장 가까운 귀족 여성은 바로 너니까.”
‘가장 가까운’이라는 단어에 반응하고 말았다. 그저 귀족 여성 중에서 그렇다는 말이었는데. 리아는 빨개지는 얼굴을 숨기려 일부러 고개를 돌려 토라진 척했다.
“그래요. 저는 보통 귀족 여성처럼 우아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아요.”
“누가 그런 거 말했어? 난 그저 네가 내게 특별하다는 거야.”
그 말을 하며 케빈은 리아의 앞에 주저앉았다. 흙바닥인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앉아있는 리아보다 눈높이가 조금 낮았다.
“어떻게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잘하세요…?”
리아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케빈은 정면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날 봐, 리아. 그동안은 어색해할 거 같아서 피하고 있었지만, 이제 나 도망도 안 가고 쑥스러워하지도 않을 거야. 그래야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네가 잊어버리지 않지.”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좀 더 자각해. 그래서 날 좀 의식하고.”
축제 때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해서 그런가. 리아는 난처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케빈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일부러 모른 척도 해봤다. 하지만 아니었다. 착한 척, 그녀를 생각하는 척 점잔 빼고 있다간 그 녀석에게 가로채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더 이상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
“돌아가자. 슬슬 너무 어두워져.”
“…네.”
케빈이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리아는 주저하며 선뜻 잡을 수 없었다.
“어두워서 길 잃어버려.”
리아는 결국 조심스레 손을 뻗어 케빈의 손목 부근 옷깃을 잡았다. 케빈은 그녀의 손을 강제로 잡아볼까 했지만, 한숨을 내쉬고 포기했다. 지나치게 서두르면 될 일도 그르치는 법이었다.
케빈의 뒤를 따르며 리아는 계속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넓고 믿음직한 등이었다. 분명 그에게 기대면 마음이 편해질 거였다. 알면서도 좀처럼 기대지 않게 되는 이유는 뭘까.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다.
천막으로 돌아오자, 다들 자리에 누워 있었다. 자는지 자는 척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두운 와중에 더듬더듬 자리로 가 누웠다.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밤이었다.
***
일찍부터 다시금 행렬하기 위한 준비로 모두가 분주했다. 페르디난드 가에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왕궁 사람들 수가 꽤 많았으니, 저택에서도 어지간한 지출이 필요했을 듯했다.
낮에서 보니 더 위용이 넘치는 저택이었다. 본가인 페넬로페 저택과 비교하면 역시 공작가인 페르디난드 공작 저택이 더 크고 웅장했다. 하지만 리아는 온실과 커다란 숲이 있는 페넬로페 저택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 저기.”
“네?”
“제1 왕자님 약혼녀분이시네.”
출발할 시간이 되자, 왕족들을 배웅하기 위해 페르디난드 가 사람들이 저택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리아는 사교계에서 그들의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특히 알폰스의 약혼녀인 아비게일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품위 있었다.
전형적인 귀족 여성이라는 단어는 바로 저런 여성에게 쓰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알폰스와 그녀는 다정히 마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렇게 예쁜 약혼녀를 두고 왜 그는 바람을 피우는 것일까.
“어쩜. 누구랑 다르게 품위 있고 아름다운 레이디네.”
이어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제의 경고로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제 케빈의 충고를 받아들여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레이디기는 했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넋 놓고 잠시 바라보았다. 알폰스의 곁에 퍼스가 와서 섰다. 아는 사이인지 아비게일은 그와도 대화를 나누는 기색이었다.
‘응?’
기분 탓일까. 알폰스가 잠깐 멀어지고, 퍼스와 아비게일 둘만 남겨졌다. 그러자, 아비게일은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는 듯했다. 퍼스는 늘 그렇듯 무표정했지만. 잘못 본 거겠지 싶어 눈을 비볐다.
그사이에 자신이 보고 있다는 걸 퍼스가 먼저 눈치챘다. 멀리서도 눈이 마주친 걸 느낄 수 있었다. 리아는 어색하게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또한 살짝 웃고 있는 듯했다.
입으로는 아비게일과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눈도 좋아라. 괜히 그와 눈이 마주친 게 기뻤다. 속으로 좋아하고 있는 사이, 왠지 그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어이, 아비게일 님이 이쪽을 보고 계시는데?”
“착각하지 말라고. 하늘 같은 공작가 영애가 너 따위를 왜 보겠어. 그저 훑어보시는 걸 테니까.”
아름다운 영애가 자신들 쪽을 바라보자, 시선이 닿은 직원들이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이것 또한 기분 탓일까. 리아는 왠지 그녀가 이쪽을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그녀는 다시 퍼스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 또한 착각이었을까. 고개를 갸웃하는데 케빈의 호통이 떨어졌다.
“다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나! 이래서 오전 안에 행렬을 시작할 수 있겠어?”
“네, 넵!”
다른 이들과 함께 딴생각을 하고 있었던 리아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한참 놀고 있던 손을 분주히 움직일 시간이었다. 몸이 바쁘니 오전에 있었던 작은 사건은 금세 잊혔다.
***
남은 이틀간의 행렬도 무탈하게 흘러갔다. 최근 사이키델리아 왕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부디 이후도 이렇게 무탈하게 흘러갔으면 했다. 제일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인 알폰스 왕자가 그걸 해내줄지가 문제였지만.
최근에는 알폰스 왕자와 엮일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보좌관인 퍼스가 손을 쓴 듯했다. 어떤 연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불편한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돼서 리아는 좋았다.
같은 천막에서 자는 사람들과는 계속 사이가 나쁜 상태였다. 굳이 사이가 좋아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체력이 필요했다. 행렬에 온 신경을 쏟느라 리아는 밤마다 지쳐 잠들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협박이 먹혔는지 물리적인 괴롭힘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마지막까지 정신 빼지 말고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케빈은 마지막까지 상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는 자잘한 문제부터 커다란 문제까지 모두 신경 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 믿음직한 상관이 맞는데. 잠시 그의 고백을 떠올린 리아는 두 볼을 감쌌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리아는 방심하면 얼굴이 빨개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일하는 틈틈이 눈이 마주치면 그는 다 안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곤 했다. 리아는 정신을 다잡으며 행렬에 집중했다.
삼 일쯤 되니, 제아무리 매년 이 행사를 반복하는 왕족이라도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하지만 수도 외곽으로 갈수록 왕족을 볼 기회가 적기 때문에 국민들의 환호는 더해갔다. 알폰스의 미소가 일그러질 때마다 퍼스가 재빠르게 몸으로 그를 가렸다. 그러곤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잠시 그의 말을 들은 알폰스는 다시 환하게 미소 짓곤 했다.
이제 정말 행렬의 끝이 머지않았다. 리아 또한 정신을 다잡고 미소를 띠었다. 육체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축제였다. 즐기지 않는 자가 손해였다.
“여기서 행렬은 마치도록 하겠다! 모두 마지막까지 축제를 즐기도록!”
국왕의 선언을 마지막으로, 다시 왕궁에 돌아오는 것으로 행렬은 끝이 났다. 이제 대강 뒷정리를 마치기만 하면 되었다. 행렬에 참가한 왕궁 근무자들에게 축제를 즐기라며 하루의 시간이 주어졌다. 찌뿌드드한 몸 때문에 리아는 기지개를 켰다. 행렬을 마치자, 부서 상관없이 직원들이 흩어졌다. 제각기 함께 축제 구경을 할 파트너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 가기 전, 리아는 옷을 갈아입으러 기숙사에 들렀다. 외출 시에는 사복을 입는 게 허용되었다. 질리도록 입었던 근무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흔치 않은 날이었다. 수수한 드레스였지만 근무복보다는 볼만했다. 옷매무새 같은 건 신경도 쓴 적 없었는데 괜히 거울에 몇 번씩이나 비춰보았다. 분명 재클린이 잔소리할 때는 대충 하자고 했던 그녀였는데.
똑똑.
“리아, 있어?”
“메이?”
문을 열자, 메이 또한 사복을 차려입고 서 있었다. 그녀의 사복은 붉은 머리만큼 화려했다. 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잘 어울렸다.
“뭐야, 예쁘게 입었네?”
“메이도요. 어쩐 일이에요?”
“또 우리 아가씨가 혼자서 머리 묶을 줄 몰라 그냥 나갈까 해서.”
리아가 혼자서 머리를 잘 묶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다. 일할 때는 리본으로 질끈 묶기만 하면 되니 상관없었지만.
“그래서 일부러 온 거예요?”
“맘에 안 드는 사람이랑 나가서 협조하고 싶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리아 인생 첫 데이트니까.”
“데, 데이트라뇨.”
“그래, 그래. 친구 사이끼리 그냥 구경하는 것뿐이라고. 귀에 딱지 앉겠다.”
뭐라 더 반박하려던 리아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메이가 익숙한 손길로 리아의 머리카락을 빗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동생이 많아서 머리를 많이 묶어줬다고 했다.
“메이는 팀원들이랑 나간다고 했죠?”
“그래, 뭐가 좋아서 팀원들이랑 나가나 싶다.”
“메이네 팀원들은 사이가 좋으니까요. 부러워요.”
“못된 상사가 있으면 그 아래 있는 직원들은 자연히 친해지기 마련이야.”
그 못된 상사가 바로 리아가 오늘 만나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우스워 피식 웃음이 샜다.
“그쪽 직원들이 너 괴롭힌다며?”
“별거 아니에요. 제가 귀족이니까 어쩔 수 없죠, 뭐.”
머리를 묶던 한쪽 손으로 메이는 리아의 볼을 세게 잡아당겼다.
“아파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리아 너는 리아일 뿐이니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괴롭힘당할 이유 없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거 좀 놔줘요!”
귀족이든 평민이든 상관하지 않고 친구가 되어주는 메이가 좋았다. 역시 자신은 좋은 사람에 둘러싸인 축복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날 뻔했다. 리아는 메이 몰래 눈물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