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봄의 여신제 (2)
“네?”
미처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얼빠진 소리가 나갔다. 당황해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고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리아가 당황한 이유를 모르는 케빈은 그저 쑥스러워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요즘 좀 바빠서 케빈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훅 들어오니 표정을 제대로 갈무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봄의 여신제 마지막 바로 전날은 이미 퍼스와 약속을 한 날이었다.
“직접 준비한 축제니까 보고 싶다며? 난 매년 보니까 잘 안내해줄 수 있는데.”
케빈은 은근슬쩍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도록 어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케빈과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거절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음, 케빈 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왜? 혹시 선약 있어?”
거절할 것 같은 분위기가 들자, 케빈이 먼저 선수를 쳤다. 괜찮은 척했지만, 저도 모르게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냥 ‘아, 선약이 있구나’ 하고 돌아서서 온실로 향했어야 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케빈의 입에서 가치 돋친 질문이 나갔다.
“누구랑?”
아니나 다를까. 리아는 대답하기를 꺼려했다. 안 그래도 퍼스와 케빈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여기서 퍼스 이름을 꺼내면 케빈의 기분이 더 상할 게 뻔했다. 하지만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케빈은 더욱 확신했다.
“설마 그 보좌관?”
이제 그는 퍼스 님이라는 호칭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안 그러려고 해도 기분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걸 숨길 수 없었다. 케빈의 눈치를 보며 리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맞구나, 그 보좌관.”
정말 사사건건 방해였다. 도대체 왜 자신과 리아의 사이에서 이토록 훼방을 놓는 걸까. 심지어 자신이 두 사람을 주선해놓고선!
“죄송해요….”
리아는 자신이 왜 사과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과했다. 눈앞의 기분이 나빠진 케빈을 보니 왠지 사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사람 제정신이야? 애초에 네 두 번째 상대는 나라는 걸 기억하기는 해? 본인이 소개해놓고?”
리아 자신도 알고 있었다. 퍼스의 소개 상대는 케빈이었고, 원래대로라면 그와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것을.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한 걸 취소할 수는 없었다.
“저희는 그냥 친구로서 함께 축제를 구경하는 것뿐이에요.”
그놈의 친구! 도대체 언제까지 친구라고 할 건데? 당장에라도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케빈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파고들어 피를 내고 있었다. 그 고통 덕분에 리아에게 화내지 않고 물을 수 있었다.
“너는?”
“네?”
“너는 어떤데? 그냥 친구 맞아?”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정말 그 사람 친구로만 생각하는 거 맞냐고.”
몇 번째 물음일까. 자신과 퍼스가 친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발끈한 리아는 케빈에게 화내듯 말했다.
“친구 맞아요! 퍼스 님과 함께 있으면 편하고 주변이 고요해진 것 같고 좋아요. 그래서 축제도 꼭 그분이랑 함께 가고 싶다고요!”
지금 이 말을 하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알까. 리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케빈의 가슴에 꽂혔다.
“나한테도… 나한테도 기회를 달라고 했잖아.”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리아에게 충분히 들렸다. 그의 상처가 느껴지는 듯해서 리아도 마음이 아팠다.
“케빈 님….”
케빈은 고개를 푹 떨궜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리아는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난 다시 저쪽으로 돌아가 볼게.”
먼저 돌아선 것은 케빈이었다. 지금은 그녀에게서 사과도,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분명 마음이 쓰여 불편해할 거란 걸 알았다. 하지만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퍼스 베르시에. 그 건방진 보좌관 자식에 대한 분노였다. 이런 식으로 자꾸 거지같이 나온다면.
“해보자 이거야.”
***
다음 날부터 어색해질 걸 걱정했지만, 케빈은 평소와 똑같았다. 리아가 다가가 사과하려고 해도 그는 일부러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피했다.
“이거나 날라.”
“너무 많잖아요!”
“말할 시간에 나르면 된다.”
일부러 더 장난을 치기도 했다. 때문에 리아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축제까지 3일 남았습니다! 조금만 더 힘냅시다!”
커다란 그의 목소리가 온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믿음직한 상사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생각 말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죽을 만큼 바빠져서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퍼스와는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저녁을 함께했었다. 하지만 축제 직전이 되자 그마저도 할 수 없다는 전갈이 왔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 힘내자는 회신을 보낸 후, 허리를 한 번 편 리아는 온실로 뛰어 들어갔다.
축제 전날은 새벽부터 일어나야만 했다. 전야제 준비로 온 왕궁이 들썩였다. 해가 지자마자 바로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이었다. 전야제 밤에는 불 관련 능력자들의 활약으로 화려한 불꽃놀이가 있었지만, 리아를 비롯하여 왕궁 내 근무자들은 아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모두 이 축제-정확히는 행렬-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안 한다고 했다!”
“타시지요. 이제 와 이러셔도 소용없습니다.”
“자네라면 이런 꼴사나운 장식을 달고 얼굴을 들 수 있겠나?”
“그게 주어진 의무라면 해야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겁니다.”
행렬에 앞서 퍼스와 알폰스가 직접 싸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알폰스는 꽃장식을 하지 않겠다며 반항을 했다. 리아를 비롯하여 꽃을 준비한 온실 직원들과 왕자 궁 내 시녀들 등 모두가 보는 앞에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생각해보게. 애초에 내 외모만으로도 꽃보다 빛나고 화려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 정도면 장식 따위 불필요하네!”
“물론 그렇습니다만 꽃으로 장식하신다면 훨씬 더 아름다워지시겠죠.”
“싫다고 했네.”
둘 다 완강했다. 퍼스가 철없는 어린아이의 보호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평소 그가 알폰스에 대해 얘기하면서 보였던 표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포커페이스였다.
안 그래도 축제 전체의 감독을 맡아 정신없이 바쁠 그였다. 아마 왕자의 떼를 감당하기 위해 억지로 불려 나온 것일 터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알폰스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대번에 알폰스가 꽃장식을 하겠다며 스스로 나섰다. 그의 두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듣지도 않았는데 대충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 알 것도 같았다.
“국왕 전하 만세!”
“왕비 전하 만세!”
“제1 왕자 전하 만세!”
“이번 축제는 제1 왕자 전하께서 다 준비하셨다며?”
“맞아! 역시 정통 왕위 후계자셔.”
준비는 제1 보좌관인 퍼스가 다 했지만 공은 제1 왕자인 알폰스에게 모두 돌아갔다. 아랫사람의 공이 바로 윗사람에게 가는 건 흔한 일이었다.
국민들의 엉뚱한 칭송에도 그는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알폰스의 옆을 지켰다. 그의 자줏빛 머리카락 끝에 달린 꽃은 블루 데이지였다. 리아가 고른 것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소담한 꽃을 골라달라기에 그 꽃을 추천했다.
리아 또한 왕궁의 일원으로서, 간단한 꽃장식을 한 후 행렬을 따랐다. 좋아하는 꽃으로 장식해도 된다고 해서, 데이지를 선택했다. 메이는 고심 끝에 카사블랑카를 선택했다.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보면 그야말로 그녀다운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빈은 금잔화였다. 처음 그가 그 꽃을 골랐을 때, 리아는 장난삼아 놀리며 웃었다. 하지만 볼수록 노랗고 소담한 꽃의 자태가 그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족들과 행렬하는 건 색다른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길을 지나가는 내내 환호하며 그들을 맞아주었다.
“기분이 어때?”
옆에서 걷던 케빈이 고개를 숙여 물었다.
“제가 주인공도 아닌데요.”
그러면서 저 앞에 보이는 알폰스 왕자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하루 종일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색색의 꽃으로 장식한 그의 모습은 가히 꽃미남이라는 칭호가 어울릴 만했다.
“그래도 되도록 웃어. 축제잖아.”
“케빈 님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네요.”
행렬 양옆으로 바람 능력자들이 끊임없이 꽃잎을 띄웠다. 하늘 전체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듯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힘들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걸 보면, 축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
하루 종일 걷는 것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티 나지 않게 긴장하고 있어서 온몸이 쑤셨다. 첫날 숙소는 왕궁 근처에 있는 페르디난드 공작 저였다. 왕족을 비롯한 신분이 높은 자들과 호위 인원은 저택 본관에 남고, 나머지는 별관이나 정원에 설치한 임시 천막에서 자기로 했다. 리아 또한 천막에서 자게 되었다.
“귀하디귀한 귀족 아가씨가 이런 천막에서 잘 수 있는지 몰라.”
리아가 자는 천막에서 함께 잘 사람들은 같은 온실 직원이었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를 두고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하긴 반감이 안 생길 리가 없었다. 자신은 특별 채용인 데다가 눈에 띄는 짓도 많이 하고 다녔다. 케빈처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정돈 당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정도로 얌전한 귀족 아가씨도 아니었지만.
“귀하디귀한 귀족 아가씨를 함부로 욕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나 보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지만 천막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잠자리 정리를 마친 리아는 일단 천막 밖으로 나섰다. 저들이 자고 나서나 천막에 들어가야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야, 역시 은근히 괴롭히는 게 더 무섭고만. 귀족 아가씨를 천막 밖으로 내쫓기게 하고 말이야.”
밖에서 이야기를 다 들었는지, 케빈이 또 리아의 성질을 건드렸다.
“그러는 케빈 님이야말로. 귀족 아가씨란 이유로 제일 먼저 저를 싫어하셨으면서.”
“그건….”
이야기를 듣기도 싫다는 듯, 리아는 저택 뒤편의 숲 쪽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사람이 없는 곳에 있고 싶었다. 아무리 마주 쏘아댔다고 해도, 우울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왜 따라와요.”
“내 맘이지.”
그런 그녀의 뒤를 케빈이 따랐다. 제 성질을 못 이겨 씩씩거리며 걷고 있어도, 주위의 식물을 해치지 않으려고 피하는 게 그녀다웠다.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마. 여긴 너희 저택이 아니잖아.”
“알아요.”
생각 없이 걷던 리아는 케빈의 말에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앉을 수 있는 그루터기가 보이자 거기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케빈은 근처 나무에 팔짱을 끼고 기댔다.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어두운 숲속이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달빛 덕분에 환한 곳도 있는 데다 곁에 케빈이 있어서 괜찮았다.
“왜 그렇게 뾰로통한 표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