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봄의 여신제 (1)
“도대체 축제 같은 걸 누가 만든 지 모르겠어.”
리아가 강하게 메이의 허리를 누르자 윽, 하는 신음을 흘렸다. 요즘 둘 모두 머리보다 몸을 쓸 일이 더 많았다. 덕분에 기숙사에 와서는 아구 아구 곡소리만 냈다.
“이제 제 차례예요.”
마지막으로 메이의 어깨를 주무른 후, 리아가 침대에 엎어졌다. 두 사람은 매일 자기 전 이렇게 서로를 마사지했다. 그러지 않고선 온몸이 쑤셔서 견딜 수 없었다. 메이는 양손에 힘을 담아 리아의 허리를 꾹 눌렀다. 그때마다 리아의 입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특히 뭉친 곳을 누를 때마다 반응이 컸다.
“그래서? 요즘은 좀 어때?”
“힘들죠, 뭐.”
“그건 다 알고.”
“그럼 뭐가 어때요?”
못 알아듣는 척하자 메이가 리아의 등을 찰싹 소리가 나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파요!”
“너한테 고백한 사람하고 잘 되고 있냐고!”
등이 얼얼해서 리아는 돌아서 메이를 노려보았다. 게다가 일부러 잊고 지내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꺼내다니.
“뭐가 잘돼요….”
“그 이후에 뭐 새로 일어난 건 없냐고.”
“없어요!”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 쑥스러워졌다. 양팔 사이로 고개를 묻은 리아 옆으로 메이가 나란히 누웠다.
“기세 좋게 고백했던 것치고는 생각보다 진척이 느리네.”
“전 진척되면 곤란하단 말이에요. 메이는 그냥 즐기고 있는 거죠?”
팔 안에서 말하는 탓에 리아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렸다. 리아가 곤란하든 말든 메이는 즐거워하는 게 맞았다.
“따분한 왕궁 생활에 있어 이런 소소한 자극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라고.”
“메이 양의 재미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요.”
메이는 턱을 괴고 짐짓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재수 없긴 했지만 말야. 사실 그 정도 외모면 나쁘지도 않고. 너도 별로 싫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냥 받아주는 건 어때?”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리아는 재빠르게 일어나 메이의 팔을 찰싹 때렸다. 메이는 과장해서 아픈 척하며 팔을 문질렀다.
“아프잖아! 뭐 어때? 안 될 이유가 뭐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전 케빈 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요!”
좋아한다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 자신이 케빈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니란 정도는 알았다. 이 상태로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퍼스 님은?”
“거기서 퍼스 님이 왜 나와요?”
“그분은 전혀 아니야?”
“저흰 그냥 친구 사이라니까요.”
리아는 어떤지 몰라도 상대방은 단순한 친구만은 아닌 것 같던데. 메이의 눈이 가늘어지자, 리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 이상한 표정 하지 말아요!”
“그럼 만약 퍼스 님과 사귀게 된다면 어떨 거 같아?”
그런 소리는 왜 하냐고 따지려던 리아는 저도 모르게 상상하고 말았다. 만약 퍼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면…?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눈을 감으면서….
“아악!”
상상을 하던 리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메이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관리인한테 불려가고 싶어서 이래?”
“으으읍!”
조용히 한다는 확답을 받고서야 메이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콜록거리며 숨을 몰아쉰 리아는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메이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흐응.”
리아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아예 마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친구란 말로 우기고 있지만 자각만 한다면 시간문제일 것도 같았다.
“재밌게 돌아가는구먼.”
***
어색해. 어색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리아는 혼자 괜히 눈치를 보고 있었다. 원래는 저녁을 먹는 내내 재잘재잘 떠들던 그녀가 조용하자 퍼스도 분위기를 살폈다. 늘 그렇듯 후원에서 저녁을 먹는 둘이었다. 이제 슬슬 여름이 다가오는지 아직도 해가 지지 않고 있었다.
“이제 조금씩 더워지네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퍼스를 따라 리아도 고개를 들었다. 높게 펼쳐진 푸른 하늘이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퍼스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되는 사람이었다. 무심한 표정을 봐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물어보니, 퍼스가 리아 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괜히 찔끔 놀랐다. 뭘 하다 들킨 것도 아닌데.
“그냥 바쁜 와중에 잠깐 쉬는 것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요.”
“아.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는 대답을 한숨으로 대신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것만 해도 얼마나 바쁜지 짐작이 갔다. 안 그래도 원래 하던 보좌관 일이 바쁠 터인데 축제 감독, 지휘까지 맡게 됐으니 뻔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누가 괴롭히나요? 그럼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 상관이 절 요즘 괴롭혀서요.”
“들어드릴 수는 있어요. 친구란 그런 거잖아요.”
어색하게 웃으며 리아가 대답했다. 퍼스도 웃음이 터져 마주 웃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최근 알폰스 왕자가 그를 골치 아프게 하는 건 맞았다.
“왕자님이 꽃 알레르기이신 거 기억나세요?”
“아, 맞아요. 그래서 이 후원에 꽃이 없는 거였잖아요.”
리아가 실수로 한 송이 피우기는 했지만 이미 지고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이후로 후원은 다시 푸르기만 했다.
“여신제에서 행렬할 때 꽃으로 장식하는 게 싫어서 매년 이맘때 짜증이 심하거든요.”
그걸 올곧이 받아내는 게 퍼스의 역할이었다. 굳이 장식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외모인 자신을 왜 꽃으로 장식을 하냐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매일 ‘전통이니까요’라는 따분한 대답만 반복하는 게 퍼스의 한결같은 대답이었고.
“꽃 알레르기라니 힘드시겠어요. 꽃이랑 닿으면 가렵거나 하신 건가요?”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게 싫은 거겠죠.”
그리고 퍼스 또한 그런 알폰스가 싫은 듯했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불쾌해하는 걸 보면.
“향이 문젠가요…? 꽃가루?”
“꽃 자체가 문제인 겁니다. 꽃만 보면 생각난다나요.”
꽃에는 알폰스의 첫사랑에 관한 트라우마가 얽혀 있었다. 첫사랑에게 차인 게 원인이 되어 지금 저렇게 바람둥이처럼 구는가 싶기도 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약혼에 대한 반감도 있기는 했다. 그 기분을 이해하긴 했지만 뒷수습은 다 퍼스의 몫이었기에 적당히 해줬으면 했다.
“우으…. 잘 모르겠지만 힘드시겠어요.”
“뭐 매년 있는 일이니까 익숙합니다.”
“매년 축제마다 퍼스 님께는 좋은 기억은 없으시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폰스를 돌보다 끝나는 게 퍼스의 일상이었으니까. 딱히 축제라고 즐기고 싶지도 않기도 했고.
“리아 양도 힘드시지 않나요?”
“음….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육체적으로는 매일이 한계였다. 메이와 서로를 달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베개에 머리를 대면 고민할 새도 없이 깊게 잠이 들었다. 눈을 뜨면 아침이었다.
“그래도 전 왕궁에 오고 나서 처음 맞는 축제잖아요. 어떤 축제가 될지 기대돼요. 제 능력이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좋기도 하고요!”
잔뜩 기대하는 눈빛을 보니 그 기대를 배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의 기대라면 더더욱. 그는 부담스러운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너무 열심히 하시라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제가 멋대로 기대하는 거예요. 되도록 무리하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그였다. 직접 보지 않아도 메이에게 전해 듣는 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눈 밑 거스름을 보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축제가 될까요? 매년 같은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달랐잖아요.”
“이번에는 가판을 조금 더 다양하게 늘리기로 했습니다. 외국 유명 인사들도 초청했고요. 능력자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공연도 많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국민들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하려고요.”
“와! 진짜 재밌겠네요!”
봄의 여신제는 사이키델리아의 온 국민이 즐기는 축제임과 동시에 외국에 사이키델리아의 위용을 알리는 기회이기도 했다. 퍼스는 이번 축제를 통해 사이키델리아의 특징인 능력자들이 제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퍼스는 말하기 앞서 조금 머뭇거렸다. 항상 막힘없던 그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무슨 말을 할지 더욱 궁금해졌다.
“제가 처음 기획한 축제라서 다들 정말 즐기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그 말을 하는 퍼스의 눈이 살짝 내리깔려 있었다. 덕분에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왠지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구경… 해보면 어떠실까요?”
같이? 말을 꺼낸 사람이 퍼스란 게 믿기지 않았다. 리아는 숨을 순간 참았다. 얼굴색 하나 달라지지 않았지만 왠지 퍼스가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리아도 덩달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노을이 아니었다면 빨개진 얼굴이 들통났을지도 몰랐다.
“그럼 행렬 끝나고 마지막 바로 전날, 돌아오기 전에 아마 자유시간이 주어질 겁니다. 그때 봬요.”
“네.”
안 그래도 축제를 많이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이번 축제는 더 특별할 것만 같았다.
“저도 열심히 준비할게요!”
“무리는 하지 마시고요.”
같은 말을 주고받은 그들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
또다시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지쳐 쓰러질 것 같았지만, 퍼스와의 약속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 정말로 쉬고 싶어질 때는 케빈이 빠르게 눈치채고 그녀에게 사막의 기적 상태를 보고 오라고 했다. 그의 배려라는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번엔 그도 힘들었는지 자신도 함께하겠다고 따라왔다.
“이대로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제 말이요.”
“그 보좌관 어떻게 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퍼스 님이요?”
“일 처리가 확실한 건 좋지만 깐깐하기가 아주….”
질색하는 얼굴로 케빈이 고개를 저었다. 리아 또한 이번 축제 일을 통해 퍼스가 얼마나 냉철하고 세심하게 일 처리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메이가 질색하는 심정도 조금 이해하고 말았다.
“그래도 전 축제… 기대돼요. 저희가 열심히 한 만큼 다들 즐거워했으면 좋겠어요.”
“뭐, 우리도 행렬에 참가하니까 축제 동안은 더 정신없을걸. 대신 마지막 날 바로 전날은 꼭 쉬게 해주니까. 그때 축제에 참가하면 돼.”
그의 말에 퍼스와 한 약속이 다시 떠올랐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그래? 그럼….”
나란히 걸어가던 케빈이 한 발 앞서더니, 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랑 같이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