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솔직해질 순 없을까
“고백이요?”
그래서 리아가 그에게 고백받았냐고 물었던 것이었다. 이제야 뜬금없던 질문의 배경이 이해가 갔다.
“전 사실 고백을 난생 처음 받아봐서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케빈 님은 지금 저랑 상황이… 그렇잖아요?”
케빈과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야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퍼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잠깐 방심한 틈에 그가 설마 직접 고백을 할 줄은 몰랐다.
두 번째 상대로 케빈을 선택할 때, 그는 리아의 마음을 최우선으로 했다. 그녀의 마음속을 엿보았을 때 케빈에 대한 좋은 기억이 가득했다. 그래서 자신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추천한 것이었다.
그와 직접 대면하고 나서 바로 알았다. 그가 리아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하지만 설마 이렇게 단기간 내에 고백까지 하리라고는. 곤란해하는 리아의 얼굴을 보니 확실히 이번에도 자신이 실수한 듯했다.
“죄송합니다. 제 탓에 괜히 곤란한 지경에 처하셨네요.”
마음을 읽는 게 가능하기 때문일까. 그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신의 손안에서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아니에요. 그게 왜 퍼스 님 탓이에요. 제가 괜히 투정 부려본 거예요.”
리아는 퍼스와 잡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사실 퍼스 님이 말씀하신 대로 케빈 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거기까지만 생각했지 더 이상을 바란 적은 없었거든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십니까?”
그 대답이야말로 리아의 안에 지금은 없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일단 소개받은 한 달 동안 케빈 님이 자신을 제대로 봐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진심이시니까 저도 진지하게 생각해보려고요.”
그 순간 찌릿하고 퍼스의 가슴 안에서 따끔한 느낌이 났다. 뭐지? 그는 반사적으로 명치 쪽을 문질렀다.
“왜 그러세요?”
“아, 갑자기 조금…. 괜찮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리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슬슬 날이 차가워지네요. 기숙사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네.”
기숙사에 돌아가는 중에도 두 사람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슬슬 다른 사람이 보면 곤란할지도 몰랐지만 왠지 그러기 싫었다.
“오늘은 감사했어요.”
“네?”
“퍼스 님이 들어주신 덕분에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아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왠지 조금 마음이 가볍네요.”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퍼스가 평소에 짓는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한 영업용 미소가 아니었다. 어색했지만 리아는 오히려 그 미소가 더 좋았다. 퍼스가 진심으로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부디 그도 같은 마음을 느끼길 바랐다. 오늘 밤은 왠지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바스락.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나자, 어둠 속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달이 워낙 밝아서, 따로 불을 켜지 않아도 서로의 모습이 잘 보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러내고, 무슨 일입니까?”
케빈은 하품을 하는 입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잠들지 않았을 시각이지만, 어제 잠을 설친 탓에 조금 졸렸다. 리아에게 고백하고 난 후, 그라고 해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를 불러낸 것은 퍼스였다. 리아 앞에서 보였던 다정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보다 냉정한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리아 양에게 고백하셨다고요.”
“아. 그것 때문입니까?”
케빈은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눈앞의 이 사람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사건건 방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고백에도 불평을 하러 온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제 마음대로 하면 안 됩니까?”
“리아 양이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그거랑 퍼스 님이 무슨 상관이십니까?”
케빈은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았다.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뎌 퍼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케빈이 조금 더 키가 큰 터라 살짝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제가 케빈 님을 소개해드렸으니까요.”
“그럼 오히려 잘된 것 아닙니까? 애초에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라고 자리를 만든 셈이신데요.”
“리아 양이 제게 원한 건 ‘성립되지 않는’ 소개였으니까요.”
그 사실은 케빈도 아플 만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리아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그녀와 자신의 문제였다. 퍼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리아와 저 두 사람의 문제입니다. 저도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입니다.”
케빈은 일부러 더 가까이 다가섰다. 반사적으로 퍼스가 뒤로 물러섰다.
“도대체 왜 그렇게 리아의 주위를 맴도시는 겁니까?”
“제가요?”
그건 당신이겠지. 상관 주제에 이상한 마음이나 품고, 점심시간마다 같이 먹으려 들고. 속으로 퍼스는 말을 삼켰다. 하지만 구겨지는 표정은 숨기지 않았다.
“틈만 나면 온실로 찾아오고,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니신 걸로 아는데요?”
“그건… 전 리아 양의 친구니까요.”
친구. 저 사람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자신이 저 단어를 내뱉는지 알긴 할까. 하지만 굳이 자각시켜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케빈은 손을 뻗어 퍼스의 가슴을 살짝 쳤다. 살짝이라곤 했지만 일부러 정확하게 명치를 쳤기 때문에 퍼스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친구면 친구답게 선을 지킵시다.”
그러곤 퍼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슬쩍 힘을 주는 것도 잊지 않고. 퍼스가 케빈을 노려보며 힘껏 손을 뿌리쳤다. 한 번은 불시에 당했다고 해도 두 번은 아니었다. 적대감이 가득 서린 눈을 보며 케빈은 한숨을 쉬었다.
“리아 양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마십시오.”
“아직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도 안 된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 당신이 뭐라도 돼? 다시 말하지만 이건 당사자인 나와 리아의 문제야. 그러니 다시는 참견하지 마.”
화가 난 케빈은 결국 반말로 소리쳤다. 퍼스가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바로 돌아서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퍼스는 한참 그의 등을 노려보았다. 자격이 없다는 말이 자꾸 맴돌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식하게 완력으로 저를 제압하려 들었던 케빈의 행태가 떠올랐다. 제 풀에 못 이겨 결국 흙바닥을 몇 번 찬 후에야 퍼스 또한 숙소로 향했다.
***
곧 봄의 여신제가 다가왔다. 사이키델리아에서는 특이하게 봄이 끝나가는 시점에 봄의 여신제라는 축제를 열었다. 사아키델리아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봄의 여신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축제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집집마다 꽃으로 대문과 지붕을 장식했고. 나라 곳곳에 봄에 핀 꽃들을 이용해 거대한 조형물을 설치했다. 국민들 또한 축제 기간 동안은 일을 쉬고 거리에 나와 축제를 즐겼다. 그때만 설치되는 가판은 해마다 상인들의 엄청난 수입원이었다.
왕궁에서도 봄의 여신제 때 행렬을 했다. 꽃으로 잔뜩 장식한 왕족들이 수행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길게 사이키델리아의 수도 메트로탄을 한 바퀴 돌았다. 무려 사흘 동안 진행되는 이 화려한 행렬을 보려고 외국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들어왔다.
이때 쓰는 꽃을 준비하기 위해 온실 전체에 비상이 떨어졌다. 축제용 꽃을 관리하고 있던 부서에서 협조 요청이 떨어진 것이었다. 온실뿐만 아니라 왕궁 전체가 행렬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리아! 그쪽 베고니아 모두 옮겨 담았어?”
“몇 개만 더 옮기면 돼요!”
“좋아. 다 하면 장미 쪽으로 옮겨 간다!”
“넵!”
정신없이 바빠서 케빈의 고백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덕분에 리아는 그와 어색하지 않아서 좋았다. 몸은 조금 힘들었지만.
“케빈 님, 이쪽 장미가 아직 필 기미도 보이질 않아서요.”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리아!”
“네!”
“네 능력으로 조금 덜 핀 상태로 만들 수 있겠어?”
“조금 덜 핀 상태요?”
너무도 구체적인 주문이었다. 리아의 능력은 제어력이 떨어졌다.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눈썹이 처지자 바로 케빈의 호통이 떨어졌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능력 제어의 첫 번째는 자신감이라고!”
“네, 네!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따끔하게 혼이 난 리아는 눈앞의 장미에 집중했다. 봉오리만 맺혀 있지, 아직 제대로 크지 못한 상태였다.
“피기 직전까지만 부탁한다. 제발….”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장미 봉오리에 댔다. 딱 한 송이만 가지고 시험해볼 참이었다. 만약 그 한 송이가 제대로 피어난다면 그 감각을 살려 다른 봉오리에도 그대로 적용하면 됐다.
“우와아….”
눈앞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바라보며 관리인은 감탄했다. 그 목소리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리아는 그만 그 꽃을 활짝 피게 만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 피어버렸네요.”
아직 여신제까지는 시일이 남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미리 모두 피어버리면 당일에는 시든 장미로 장식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 번 더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뒤에서 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유능함을 인정받아 여신제 전체를 관리, 감독하게 되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은 온실 시찰을 나온 듯했다.
뒤에 메이를 비롯하여 보좌관실 직원들 몇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는 다른 곳은 살펴보지도 않고 바로 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떨고 있네요.”
“조금 긴장해서요.”
“일단 심호흡하세요. 긴장해서는 될 일도 안 됩니다.”
리아는 퍼스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몇 번을 반복하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가 손을 잡아준 것도 한몫했다.
“이제 다시 해보세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리아는 다시 장미 쪽으로 돌아섰다. 케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퍼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리아의 집중이 깨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천천히 꽃이 피어났다. 메이는 퍼스의 뒤에서 자신의 일처럼 함께 긴장하며 제발 잘되라고 기도했다. 퍼스도 긴장 때문에 마른침을 삼켰다.
“됐다!”
눈앞의 꽃잎이 아직 완전히 피어나기 전, 벌어지려는 상태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이어서 관리자가 지정한 범위의 꽃들 모두가 천천히 피어나다가 피어나기 직전 상태에서 멈췄다. 군락을 이룬 꽃봉오리들이 전부 피어나는 장면은 리아에게도 그 장소에 있던 모두에게도 인상적이었다. 능력의 제어에 성공한 리아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메이 또한 주먹을 쥐며 좋아했다.
“거봐요. 할 수 있잖아요.”
“퍼스 님과 케빈 님 덕분이에요. 믿어주셔서 할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공을 나누고 싶진 않았지만, 기뻐하는 리아를 보니 퍼스도 케빈도 싸우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온전히 리아의 작은 성공을 축하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럼 축제 준비 상태를 보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온 퍼스가 케빈을 돌아보았다. 이미 리아에게 보였던 다정한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예, 이쪽으로 오시죠.”
축제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