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고민이 있나요
복잡한 속도 모르고 그날따라 날씨가 무척 좋았다.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복잡한 생각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초여름을 맞아 후원은 더 푸른 생기가 가득했다. 기껏 식사를 받아다 놓고 리아는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퍼스는 말하기를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식사할 때 소리를 내지 않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외에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퍼스 님은.”
점점 정적에 익숙해져 갈 무렵 리아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고백 받아보신 적 있으세요?”
먹던 게 입안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퍼스는 눈만 크게 떴다. 고백이라니. 사실 안 받아본 건 아니었다. 냉정한 성격이라고 욕을 먹는 데 반해 고백하는 여성도 몇 명 있긴 있었다.
하지만 퍼스는 눈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여성의 진심을 알 수 없었다. 왜 자신 같은 게 좋단 말인가? 도대체 자신에 대해 뭘 알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까?
자연히 그의 대답은 항상 거절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의 속마음에 뭐가 숨어 있을지 몰랐다. 게다가 장갑을 벗어 그 안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닿기조차 싫었으니까.
“그런 걸 왜 물어보십니까?”
“받아보셨죠? 하긴 안 받아보셨을 리 없죠. 그 외모에. 수두룩했나요?”
“받아보긴 했지만 별로 많이는 안 받아봤습니다.”
변명하듯 그가 대답했다. 실제로 알폰스 왕자에 비하면 그는 새 발의 피였다. 약혼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수많은 연서가 날아들었다. 물론 그가 일부러 여지를 넘치게 흘리고 다닌 탓이었지만.
문제는 그 뒤처리를 다 퍼스가 한다는 점이었다. 울며 제게 매달리는 영애들을 몇 번이고 냉정하게 돌려보내곤 했다. 어쭙잖게 위로했다간 금세 퍼스에게 돌아서기 일쑤였다.
“몇 명이나 받아보셨는데요?”
문득 호기심이 인 리아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했다. 물론 기억력이 좋은 그는 대부분의 일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 없다고 판단한 몇 가지 기억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웠다. 자연히 누가 그에게 고백했었는지, 몇 명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입니다.”
그는 어색하게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혔다. 티끌과도 같은 틈 사이로 호기심이 가득한 리아의 눈이 비쳤다.
“뭐라고 답변하셨는데요?”
물론 그 또한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내용은 항상 동일했을 터였다. ‘죄송합니다.’
“거절했습니다.”
“전부요?”
“네.”
“왜요?”
왜냐고 물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싫어서? 이제 상대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마당에 그녀가 싫었는지 좋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그것보다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게 맞았다. 연애라는 것 자체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몰랐으니까.
“연애 감정이라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요.”
퍼스는 드물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 위에 놓인 먹다 만 스프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식은 스프가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감정이라는 것만큼 휘발성 강한 게 또 있을까. 사람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존재인지 그는 너무 잘 알았다.
특히 그의 부모가 아주 어릴 때부터 잘 알려주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긴 했을까. 마주 닿은 손에서 전해지는 건 서로에 대한 혐오뿐이었다. 그들은 마치 경쟁하듯 외도를 즐겼다. 그런 그들에게 부모로서의 애정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 저리 안 꺼져?!
- 그러게 누가 저런 기분 나쁜 걸 낳아서는.
- 저 혼자 낳았어요? 당신도 반절은 책임이 있다고요!
- 누가 저런 걸 낳으랬어?
매일매일 이어지는 기분 나쁜 대화. 저택 어디로 도망쳐도 커다란 목소리들이 퍼스를 따라 다녔다. 벽에 손을 대도, 침대에 누워도 여기저기서 듣고 싶지 않은 것까지 남김없이 그의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퍼스 님?”
리아의 목소리였다. 화들짝 놀란 퍼스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깐 상념에 빠져 아주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낸 듯했다.
“괜찮으세요?”
“뭐 말씀이십니까?”
“뭔가 표정이….”
제가 잘못된 것을 물었는지도 몰랐다. 퍼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금세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리아는 걱정스런 마음에 계속 그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잠깐 예전 기억이 나서요.”
“예전… 기억이요?”
물어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리아는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알고 싶었다.
“별로 유쾌한 기억은 아닙니다만.”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하는 건 처음이었다. 굳이 할 필요도 없거니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옆에 앉아있는 그녀는 진지하게 들을 준비를 마쳤다.
“저희 부모는… 저를 싫어했습니다. 자식을 싫어한 건지 저라서 싫었던 건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제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부모는 돈을 받고 저를 입궁시켰습니다.”
너무 의외의 말에 리아는 순간적으로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능력이 좋아서 어릴 때부터 입궁했다고만 알았지 설마 이런 뒷이야기가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자식을 팔다니. 상상도 못 해봤던 이야기였다.
“부모는… 외도 중이었습니다. 각각 따로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택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싸웠다는 기억은 있습니다.”
퍼스는 눈을 들어 일부러 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이런 자신을 동정할까. 아니면 경멸할까.
“그래서 애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다. 리아는 어떤 감정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퍼스의 표정에서도 지난 상처 같은 건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연애 감정 같은 건.”
퍼스가 진지하게 대답한 만큼, 리아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녀는 눈을 내려 괜히 치마를 툭툭 치며 먼지를 털었다.
“저희 부모님도 이혼하셨어요.”
“아.”
“아시죠? 워낙 유명하시니깐.”
안 그래도 좁은 사교계에서 유명한 페넬로페 백작가에 생긴 이야기이니 당연했다. 이런 자극적인 소문은 공기처럼 순식간에 퍼졌다.
“어머님은 저를 잡고 말씀하셨어요. 그냥 이제 아버님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뿐이라고. 하지만 어렸던 저는 이해할 수 없었죠.”
백작 부인이 페넬로페 저택을 나가던 날, 세 남매는 문 앞에서 그녀를 배웅했다. 찰리와 루퍼스는 울지 않고 그녀를 보냈다. 하지만 리아는 울며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강제로 찰리가 떼어놓고 나서야 그녀는 저택을 나설 수 있었다.
그 이후 아예 그녀를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페넬로페 백작은 그녀가 저택을 나서도 살 수 있도록 막대한 재산과 한적한 저택을 안겨 주었다. 가끔 그곳에 찾아가면, 몰아뒀던 잔소리가 폭풍처럼 날아들었다.
어머니는 리아를 사랑했다. 페넬로페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리아의 마음에 꽤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릴 땐 분명히 두 분이서 마주 보고 웃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렇게 사랑했던 두 분이 왜 사랑하지 않게 되었는지. 그래서 저도 연애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결혼도… 잘 모르겠어요. 꼭 해야 하는 건지.”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결론은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연애 감정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것. 책에서 읽은 지식이 전부였다. 한 번도 말한 적 없던 이야기를 서로에게 털어놓자, 왠지 그들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서로 손가락 하나 닿지 않았는데, 어딘가 이어진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퍼스는 물끄러미 리아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 마음을 읽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 단순하게 닿아 있고 싶었다.
“손을.”
“네?”
“잡아도 될까요?”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리아는 당연히 깜짝 놀랐다. 그녀가 이유를 물어보면 대답해줄 수 없었다.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거절당해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퍼스의 흰 장갑 위로 리아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는 말없이 손을 뻗어 퍼스의 손을 살며시 감쌌다. 그가 왜 자신의 손을 잡고 싶어 하는지, 자신은 왜 손을 내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퍼스는 리아의 손을 꼭 맞잡았다. 장갑 때문에 그녀가 왜 자신의 요청을 승낙했는지 속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았다. 장갑 위로도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상하게 안심이 되지 않아요?”
“그러네요.”
“사람 온기가 생각보다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럼 이건 위로의 의미인 걸까. 퍼스는 잠깐 손을 잡은 의미를 고민해보다가 포기했다. 자신이 왜 옛날 이야기를 했는지, 손을 잡자고 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다만 그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결국 고민은 뭐였습니까?”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두 사람은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구름색이 변해가는 게 아름다웠다. 매일 보던 하늘인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유난히 더 아름다웠다.
“아, 그거요.”
그제야 리아는 잊고 있던 고민을 떠올렸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이 잠시 찌푸려졌다.
“케빈 님을 왜 소개해 주셨어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조건에 부합한다고. 리아 양이 그나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동선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으로서 좋은 거랑 남자로서 좋은 건 다르잖아요.”
“어떻게 다릅니까?”
퍼스가 되묻자, 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 연애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 터다. 당연히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모르겠지만… 다르다고들 하지 않아요?”
“…저라고 그분이 좋아서 소개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케빈과 퍼스는 애초에 성정이 맞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사사건건 거슬리는지.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신데요?”
“그냥 마음에 안 듭니다만.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그래서 이유 불문하고 그를 방해했다. 그녀의 말대로 직접 소개해놓고 이러는 건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와 리아가 단둘이 있다고 생각하면 속이 시끄러웠다.
“혹시 그분이 또다시 괴롭히기라도 하시나요?”
싫긴 하지만 그럴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초반에 리아를 시험하는 듯한 행동은 했지만, 그 이후로는 잘 대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리아가 그에게 마음을 연 것이었고.
“아니요.”
“그럼…?”
케빈을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처음 고백받았을 때는 고백 자체가 처음이라 놀라고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고백을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