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31)화 (31/75)

#31. 틀어져버린 고백

왕궁 내에 식사를 따로 할 곳은 없었다. 결국 둘은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 케빈의 천막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다행히 오늘은 화려한 요리가 아니라 단순히 호밀빵과 귀리죽이었다.

“청어 요리는 환상 같은 거 아니었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그날 왕궁 요리사가 특별히 신경 썼던 것 같긴 해.”

케빈은 요리의 맛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끼니를 때울 수 있다면 그게 뭐로 만들어졌든 어떤 맛이든 상관없었다.

“다시 오는 동안 죽이 조금 식은 것 같아요.”

“먹을 수만 있으면 됐지.”

테이블에 받아온 음식을 내려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점심은 자주 먹었어도, 저녁을 천막에서 먹는 건 처음이었다. 먹는 내내 케빈은 리아를 신경 썼다. 어떤 타이밍에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덕분에 귀리죽이 바닥을 보이고 있는데도 몇 번이나 숟가락으로 바닥을 긁었다.

“그렇게나 맛있나요?”

리아는 귀리죽이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다. 음식에 관심 없는 케빈이 저렇게 열심히 먹을 정도면 어지간히 입맛에 맞았겠지 싶었다.

“그냥 그랬는데.”

“그런 것치고는 정말 열심히 드시던데요.”

원래는 호밀빵이 뻣뻣하기 때문에 함께 먹어야 했다. 하지만 케빈은 딴 생각을 하느라고 귀리죽을 모두 먹어버려 호밀빵과 함께 먹을 게 없었다.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끓였다.

“이거랑 함께 드시면 텁텁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 고마워.”

먼저 식사를 마친 리아는 여유롭게 차를 들어 올렸다. 말린 꽃으로 만든 차였다. 저택에서부터 이 계절이면 직접 꽃차를 만들어 먹었었다. 이번엔 다른 부서 담당자의 도움을 얻어 꽃을 얻었다. 사막 관리 기후 부서의 식물들에서는 꽃이 피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피게 하기는 그랬다.

“어떠세요?”

“음….”

어려운 질문이었다. 긴장한 케빈은 지금 자신이 마시고 있는 게 차라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리아가 일부러 준비한 꽃이 케빈의 찻잔 안에서 빙글빙글 돌며 피어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이쯤 되니 리아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맛에 둔한 케빈이라도 이상했다. 꼭 정신을 딴 데 팔아두고 온 듯했다.

“혹시 뭐 고민 있으세요?”

리아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갑자기 저녁을 같이 먹자고 우긴 것부터가 이상했다. 제게 뭔가 다른 말을 꺼내고 싶은 것 같은데, 왜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직설적으로 리아가 물어보자, 케빈은 더 이상 고민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래서 더 꾸미지도 못한 말이 날것 그대로 튀어 나갔다.

“내가 너 좋아하는 것 같다.”

같아?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좋아하는 것 같은 건 뭐지? 말한 케빈도 당황하고, 들은 리아도 당황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음….”

농담이냐고 한번 물어보려던 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말해놓고 당황해 눈동자가 갈 곳을 잃었지만, 진심인 듯했다. 설마 케빈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 예상도 못 했던 말이라 리아는 더욱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당장 대답해달라는 건 아니야. 어차피 이번 한 달 동안 소개 상대가 나잖아. 그러니까 이름만 있는 상대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어떤지 봐줬으면 해.”

“하지만 케빈 님, 저는….”

이미 별로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케빈에게 말했던 터였다. 리아는 케빈의 고백을 결혼 상대로서 진지하게 봐달라는 말로 오해한 듯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케빈은 양손을 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당장 결혼해달라는 것도 아니야. 그저 연인… 으로 어떨지 생각해봐달라는 얘기야.”

‘연인’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케빈의 귀가 엄청나게 빨개졌다. 더불어 얼굴도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케빈이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자주 봤지만,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에게 부끄러움이 옮았는지 리아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네, 그럼. 새, 생각… 해보겠습니다.”

“어, 어. 그래. 잘… 생각해봐.”

케빈에게서 얼빠진 대답이 나왔다. 얼굴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리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서둘러 치우려고 했다.

“내가 할게.”

“…그럼 부탁드릴게요. 전 기숙사로 가보겠습니다!”

도망치듯 천막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로 전속력을 다해 기숙사까지 달렸다. 평소라면 제가 뒷정리를 하겠다고 말했겠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무슨 일이 있었다고 확신할 게 뻔했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도록 사람이 없는 길로만 골라 달렸다. 금세 방에 도착했다. 문을 서둘러 닫는 바람에 큰 소리가 났다. 하지만 리아는 거기에 신경 쓸 수 없었다. 당장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케빈 님이 날 좋아하신다고…?”

상대가 누구인지를 떠나 태어나 처음 받는 고백이었다. 어떻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할 수 있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상관이라는 사실을 빼고 보면, 케빈은 좋은 남자였다. 자신에게도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다정한 편이었고.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케빈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고백을 받으니 얼떨떨했다. 앞으로 그런 식으로 생각해봐 달라고 해도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왜 자신을 좋아한단 말인가? 케빈은 귀족 여성을 싫어하는 데다가, 자신은 항상 그에게 틱틱대며 말했다. 게다가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왕자 궁에서 꽂아 넣은 사람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리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팔자에도 없던 연애 고민이라니. 괴로워하던 리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잠은 다 잤다….”

***

결국 눈 밑 거스름이 생기고 말았다. 누가 봐도 ‘나 밤새 고민했어요’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리아는 왕궁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분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출근해서도 리아는 필사적으로 케빈과 눈 마주치길 피했다. 업무적인 이야기는 나눴지만 사적인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어떤 핑계든 대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점심도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굶었다.

말을 할 때마다 도망을 치니 케빈도 별수 없었다. 이럴 것 같다고 대충 예상은 했다. 하지만 현실이 되니 조금 씁쓸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퇴근 시간이 되자, 리아는 또 꽁지 빠지게 도망을 쳤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전 이만!”

“리아!”

일이 끝나면 한마디라도 더 말을 해보려고 했는데 소용없었다. 사라지는 뒷모습에 대고 케빈은 한숨을 쉬었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나….”

물론 당장 받아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부끄러워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남자로서 의식하기 시작했단 증거도 됐다. 어차피 장기전은 각오한 바였다. 케빈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리아는 달리면서 흘끗 뒤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케빈이 쫓아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쫓아와서 어제 일에 대해 말을 꺼내면 어쩌나 심장을 졸이고 있었다.

“위험해요!”

“악!”

딴 생각을 하다가 눈앞에 있는 나무를 못 보고 그대로 머리를 박기 직전이었다. 경고하는 목소리에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박겠구나 싶을 때 강한 힘으로 자신을 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퍼, 퍼스 님.”

퍼스는 리아를 당겨 안아 나무에 부딪히지 않도록 했다. 하마터면 정말 크게 다칠 뻔했다. 안도감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걱정스런 표정을 저를 보는 퍼스가 보였다. 달리고 있는 저를 낚아채다니. 보통 반사신경이 아니었다. 게다가 허리를 꽉 안은 힘이 느껴졌다. 그 또한 남자였다. 그렇게 의식하기 시작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감사합니다. 노, 놓아주세요.”

“아, 실례했습니다. 급해서 그만.”

그는 허리를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리아가 재빠르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앞을 잘 보고 다니셔야죠.”

걱정하는 듯도 하고, 잔소리하는 듯도 한 그의 말투에 리아는 웃음이 나왔다.

“전 왠지 매번 퍼스 님께 부딪히는 것 같네요.”

“일단 자각은 있으셨군요?”

“뭐라고요? 너무하시네요!”

장난기 어린 퍼스의 대답에 새침하게 대답했지만, 리아는 내심 기뻤다. 케빈의 앞에선 어색해서 하루 종일 제대로 웃을 수도 없었다. 퍼스와 사소한 대화를 나누자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네? 왜요?”

“눈 밑이 조금… 검으신 것 같은데.”

갑자기 퍼스의 얼굴이 다가왔다. 눈 밑을 가리며 리아는 시선을 피했다.

“혹시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셨나요?”

“아, 좀….”

퍼스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해서 부담스러웠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그가 나타난 것인지.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리아는 망설였다. 케빈의 고백에 대해 그에게 말해야 하는 건지. 그도 왠지 알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울컥 그에게 화가 올라오기도 했다. 애초에 케빈을 두 번째 소개 상대로 추천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덜 고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왠지 모든 것이 그 때문인 것만 같았다. 갑자기 리아가 자신을 노려보자, 퍼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눈앞의 작은 머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한번 그녀의 속마음을 보자,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고민 있으면요!”

그리고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또 뭘 잘못한 걸까. 퍼스의 속이 타들어 갔다.

이게 투정이라는 것을 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를 보니 타당하지 않은 강짜라도 부려보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 있으니 그가 받아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항상 냉정하던 그가 자신이 퉁명스럽게 대했다고 페이스를 잃었다. 그 사실이 리아에게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고민이 뭔지 몰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고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요?”

“적어도 말하기만 해도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친구… 란 건 그런 때 이야기를 나누는 거라고… 책에서 읽었습니다만.”

퍼스가 친구라는 단어를 내밀자 리아의 표정이 풀렸다. 단순히 거래 조건을 앞세워 친구가 되었던 그가 먼저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니. 게다가 지금 친구로서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그도 자신을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좋아요.”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 퍼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누군가에겐 차갑다는 평만 듣는 그가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이토록 솔직해졌다. 그런 모습이 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녁 함께 드실까요?”

생각해보니 리아는 점심도 걸러서 배가 고픈 상태였다.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퍼스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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