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용기가 필요해
똑똑.
“들어오세요.”
문 안쪽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 상관을 상대하려면 어지간히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실례합니다.”
퍼스의 집무실은 그의 성격과 같이 살풍경했다. 항상 엄청난 속도로 일을 처리하는데도 그의 책상은 서류 더미로 가득했다. 당장 메이 자신이 들고 있는 것도 그가 결재해야만 하는 서류였다.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에 놓고 가주세요.”
“네.”
평소처럼 아슬아슬하게 서류로 탑 쌓기를 한 메이는 바로 나가지 않고 퍼스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눈도 마주치기 싫어서 바로 쌩하니 나가버렸다. 하지만 오늘은 한마디 말을 걸어보리라. 굳은 결심을 했다.
“퍼, 퍼스 님.”
당당한 성격의 그녀였지만 그에게 말을 꺼내려니 새삼 목소리가 뒤집혔다. 말을 더듬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말을 꺼내자 서류에 꽂혀 있던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위로 올라왔다.
“뭡니까?”
불쾌해하는 목소리도 재수 없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리아는 왜 이런 남자와 왜 친구 같은 걸 하고 싶어하는지.
“곧 여름이네요. 덥지 않으세요?”
갑자기 날씨 이야기라도 하자는 건가. 퍼스는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메이와 직접 얘기해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몇 번 그녀가 실수를 해서 혼낸 이후로, 매번 자신만 보면 꽁지 빠지듯 도망가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건 상관없었다. 일만 제대로 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뭘 잘못 먹은 건지, 그녀가 집무실에서 나가지 않고 제게 사담을 건넨 것이었다.
“왕궁 내는 기후 능력자가 날씨를 관리하고 있으니까요.”
“그렇… 죠.”
물어본 것은 본인이었으면서 메이는 퍼스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말하고서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런데 허무맹랑한 질문에 설마 저렇게 성실하게 답변해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덕분에 메이는 조금 얼빠진 대답을 했다.
메이가 퍼스에게 말을 건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정말 리아를 친구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호기심이 퍼스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생각보다 그가 대답을 잘 해주자 용기가 났다.
“제가 얼마 전에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글쎄 제 기숙사 옆방 친구인 리아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애가 태어날 때는 한겨울인데도 저택 화원의 꽃이 일제히 다 피었다고 하더라고요.”
메이는 분명히 보았다. 리아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퍼스의 고개가 올라오는 것을. 게다가 매서웠던 눈빛이 잠시 풀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째서 자신 앞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경계하는 듯했다.
“그래서요?”
퍼스의 눈빛이 차가워서 메이는 다시 겁을 집어먹었다. 왜 나는 이런 뱀 같은 자식한테 말을 건 거지. 하지만 그녀는 친구를 위해서 리아가 말한 것처럼 퍼스가 정말 좋은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몇 마디 나눈 걸로 그 사람의 전부를 알겠냐 싶지만. 자신이 업무 시간 내내 가까이 있는 사람인 만큼 리아보다 그에 대해 더 파악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렇다고요.”
하지만 퍼스는 자신이 떠보기에는 어려운 상대였다. 속이 얼마나 시커먼지 잘 보이지 않는. 하지만 분명 그녀의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힌트 가지고는 퍼스가 리아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친구로서의 우정인지 그 이상의 호감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할 말 끝나셨으면 나가보세요.”
그는 또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하여간 사람을 턱짓으로 부리고! 그녀는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숨기고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녀의 상관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는 아주 조심스레 문을 닫는 그녀가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 너머에 있는 퍼스를 노려보았다.
“리아는 저런 자식이랑 어떻게 친한 거야?”
***
한편, 친구가 자신을 위해 어떤 용기를 냈는지 리아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케빈과 함께 사막의 기적에 온 신경을 쏟을 뿐이었다. 물 주는 방법을 바꿨다고 해서 단기간에 효과를 보기 어려워서 주 일과는 관찰하는 게 대부분이긴 했다. 사막의 기적의 살리는 법에 대한 힌트가 있을까 하여 다른 식물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했다.
일단 리아는 닥치는 대로 사막 기후 관련 부서의 각 구역을 돌았다. 케빈이 아는 것에 대해서는 그가 직접 설명하고, 자세한 부분에 관해서는 담당자에게 질문했다. 키워본 담당자가 맡은 식물에 관한 건 제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가 이 아이를 암벽이 있는 곳까지 데리고 온 겁니다. 오아시스는 오히려 너무 풍족한 환경이라서 잘 자라지 못하더라고요. 이 아이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터라, 암벽에서 더 잘 자랍니다.”
암벽 지역 담당자는 자랑스러운 듯 식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 자연히 식물에 대한 애정이 솟는다. 특히 어렵게 자란 식물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 마음은 리아도 충분히 이해했다.
“가을이 되면 꽃도 필 겁니다.”
이 식물 또한 사막 출신인 왕비 마마가 살던 나라에서 온 식물이었다. 정확한 언어로 발음하기는 힘들지만, 사막 바람꽃이라는 의미의 식물이라고 했다. 암벽에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그 이름이 이해가 갔다고 했다.
담당자는 이 식물이 꽃을 피우고 자리를 잡기까지 꼬박 이 년을 기다렸다며 쓰게 웃었다. 뿌듯해하며 식물을 쓰다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리아는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다. 식물을 키우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한데 성과를 내기 위해 자꾸만 초조해졌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잊고 있었던 중요한 게 떠올랐다. 그동안 능력을 써서 식물을 키웠기 때문에 잊어버렸던 걸지도 몰랐다. 식물은 아주 천천히 자란다는 걸. 그리고 마침내 꾸준한 기다림이 눈앞에 보이는 그 순간, 엄청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걸.
“케빈 님.”
“응?”
“어쩌면 제게 필요한 건 사막의 기적을 키울 방법이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말이야?”
“저 담당자분도 사막 바람꽃을 피워내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잖아요. 사막의 기적도 고작 석 달이 아닌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리아에게 남은 시간은 석 달도 아니고 이제 고작 두 달 남짓이었다. 당사자도 아닌데 괜히 케빈의 심장이 뛰었다. 두 달 후면 그녀가 온실에 없을지도 몰랐다.
“…모르지. 일단 변화를 줬으니 주어진 시간 안에 반응이 있는지 기다리는 수밖에.”
하지만 자신은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위로가 되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자신이 건넨 말은 오히려 매몰찬 게 아닐까 고민되었다. 이 순간만큼은 말재주가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현실적인 대답에 리아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네요. 이왕이면 제가 있는 동안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다행히 그녀는 강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금세 지우고, 담당자에게 바람꽃 외 다른 식물에 대한 설명을 더 들었다. 케빈은 따라다니며 열심히 메모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큰 귀족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슬렸고, 괴롭혀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숲속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 가까웠다. 누가 보지 않아도 지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어느새 그녀와 일하는 게 편해졌다.
게다가 그녀와 나누는 대화는 즐거웠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감각은 아니었지만,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었다. 가까이 있고 싶고. 집중하고 있는 그녀를 볼 때면 괜히 손가락을 뻗어보고 싶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케빈 님? 이 손가락은 뭔가요?”
저도 모르게 검지를 뻗어 리아의 볼 쪽으로 향하고 있었나 보다. 고개를 돌리던 리아의 볼에 정확하게 그의 손가락이 폭 꽂혔다.
“그냥 해봤어.”
울컥해 따지려던 그녀는 꾹 참았다. 대신 심호흡을 했다. 지난날 현명한 자신의 친구 메이 플라워 양은 이렇게 말했다. 자고로 상관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고. 그냥 쟤는 저런 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거라고.
“저녁에 시간 있지?”
“있긴 한데요.”
“‘한데요’는 뭐야. 몹시 반항적이네.”
“뭐 때문에 저녁 시간을 물으실까 해서요. 야근인가요?”
일하는 건 물론 좋아하지만 야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내내 돌아다녀서 평소보다 조금 더 피곤했다. 케빈은 금세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다.
“야근은 아니고. 그거 있잖아.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거.”
그냥 같이 저녁 먹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괜히 뭉뚱그려서 말하려다 보니 발음도 이상해졌다.
“아. ‘그거’요.”
“어, 그거.”
소개를 말하는 것이었다. 리아는 새삼 케빈이 두 번째 소개 대상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상관을 대상으로 지정하다니. 다시금 생각해봐도 퍼스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까지 성실하게 안 챙겨주셔도 돼요. 어차피 퍼스 님 입회하에 만나야 하는 거니까 오늘은 안 될걸요. 저녁에 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언제 연락한 거지. 케빈은 그녀가 퍼스의 근황을 알고 있다는 게 불쾌했다. 매 끼니 셋이서 먹는 비극을 막기 위해 그는 점심을, 퍼스는 저녁을 리아와 함께 먹기로 타협을 봤다. 오늘 점심도 분명 자신과 먹었다.
“아, 입구 관리자분이 전갈이 왔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귀찮은 자식을 떼어놓고 단둘이 리아와 저녁을 먹을. 게다가 저번에는 중요한 타이밍을 그 자식 때문에 방해받았다.
“그럼 더 나랑 먹어야겠네. 어차피 너 먹을 사람 없잖아.”
그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리아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혼자서는 밥도 못 먹는 줄 아세요?”
중증이었다. 뚱한 표정의 리아도 이상하게 미워 보이지 않았다.
“혼자 먹는 밥은 맛없잖아.”
“매번 혼자 드셨던 분이 할 소리예요?”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던 탓에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초조한 마음에 제발 그녀가 그만 트집을 잡았으면 했다. 제발 순순히 같이 먹자고 해줄 수는 없는 건가? 하긴 그런 성격이었으면 제가 그녀에게 이런 감정을 품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초조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짜증이 담긴 말투가 나왔다.
“먹을 거예요. 왜 짜증을 내세요?”
툴툴거리면서 리아가 앞장섰다. 밥을 먹고 나면 할 말을 떠올리자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