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29)화 (29/75)

#29. 불편한 식사

외마디 비명과 함께 리아의 몸이 기울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지만 넘어지는 기색이 없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따가운 케빈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떴다. 눈앞에 언젠가 보았던 것과 똑같이 흰옷과 화려한 금색 자수가 보였다. 그때와 다르게 퍼스는 그녀가 닿은 걸 불쾌해하지 않았다. 당장 떨어지라는 말도 없었다.

“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세게 당겼나 보군요. 괜찮으신가요?”

“네, 전 괜찮아요.”

상념에 빠졌던 리아는 화들짝 놀라 퍼스에게서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에게 닿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퍼스가 훨씬 다정해진 게 더 부끄럽고, 쑥스러웠다. 제 머리가 이상한 착각을 할 것만 같았다.

“그럼 식사하러 가실까요?”

퍼스는 자연스레 리아를 끌고 온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의 앞을 케빈이 가로막았다.

“어쩌죠. 요즘 리아는 저랑 같이 식사를 하고 있어서요.”

“아, 그랬군요. 오늘부터 다시 혼자 드셔야 할 거 같은데요. 리아 양, 저랑 드실 거죠?”

“한번 생긴 루틴을 바꾸기가 힘들어서요. 오늘도 꼭 같이 먹어야 제 루틴이 깨지지 않을 것 같네요.”

“오래되지도 않아서 금방 원래대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내버려 두고 있었으면서 오늘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둘 다 리아와의 식사를 두고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동안 케빈과 먹었던 터라 갑자기 그를 두고 다시 퍼스와 먹자고 하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누구와 먹느냐가 아니었다.

“저기… 배고픈데 그냥 다 같이 먹으면 안 될까요?”

***

평소에는 빵과 스프가 대부분이던 식단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청어가 올라와 있었다. 왕궁 요리사가 역시 솜씨는 좋은지 레몬즙으로 비린내도 완벽하게 제거한 상태였다. 눈앞의 음식은 아주 휼륭했지만 리아는 맛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일일이 살을 발라 먹기가 번거로운 음식이라 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이었다. 빠르게 먹고 빠지고 싶었는데, 그게 어려웠다.

“왜 그러십니까? 요리가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그녀가 불편해하자 퍼스가 주방에 찾아가 요리에 트집을 잡으려 했다. 리아는 그의 손을 잡고 강제로 다시 자리에 앉혔다.

“맛있습니다. 뼈를 발라내기가 번거로워서 그래요.”

“그래? 발라 줄까?”

갑자기 안 하던 친절을 베푸는 케빈이었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케빈 또한 자신이 평소에 안 하던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쑥스러워했다.

“왜 그렇게 봐?”

“상관님. 도대체 왜 이러세요?”

그녀는 이 낯선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한껏 날이 서 있었다. 게다가 모든 것을 그녀를 통해 경쟁하려고 했다. 게다가 하필 식사 장소도 식당 한복판이라 모든 이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화제를 몰고 다니는 주인공들이 한군데에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불편함에 청어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상관이라니 간지럽게. 너 그런 애 아니었잖아. 부르던 대로 불러.”

“그러는 케빈 님이야말로 왜 이러시는 거냐니까요. 케빈 님 이런 성격 아니셨잖아요. 왜 자꾸 다정한 척하세요?”

두 눈에 한껏 의심이 서린 채였다. 평소의 행실이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싶어 케빈은 입맛이 썼다.

“네가 날 얼마나 봤다고 그래. 나 사실 이런 사람이야.”

“제가 알기에도 케빈 님은 그런 분 아니셨는데 숨겨왔던 모습인가 봅니다?”

잠깐 틈을 못 참고 퍼스가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청어를 짓씹으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껏 신선한 청어로 맛있는 요리를 한 왕궁 요리사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화젯거리에 시선을 집중하느라 식당 안 누구도 제대로 청어의 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퍼스 님, 저한테 리아 2차 상대를 해달라고 부탁하신 것 아니었나요?”

케빈은 세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민감한 내용이 나오자 리아는 식사를 멈추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랬죠. 하지만 점심 식사 상대까지 부탁드리지는 않았는데요. 그건 친.구.인 제 역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친구?”

뜬구름 잡는 소리에 케빈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친구인 주제에 자신을 방해하면 안 되는 거였다. 특히 그렇게 중요한 순간에! 퍼스의 성격상 알고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금 온실에서의 일이 떠오르자 민망하면서도 화가 났다.

“친구라고 하면서 그렇게 쉽게 버리셨나요?”

“그건 여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습니다. 오해에서 기인한 소문이니까요.”

“이왕 버리신 거 쭉 버리시지 그러셨어요.”

“그건 제 안일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잘못한 부분도 있어서 솔직하게 리아 양에게 사과도 했고요. 이제 친구로서 거리낄 부분은 없다고 생각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것뿐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호랑이와 사자처럼 으르렁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식욕이 떨어졌다. 게다가 두통이 밀려와 리아는 머리를 감쌌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머리가 아파?”

동시에 두 사람이 그녀를 걱정했다. 죽이 잘 맞는다고 봐야 할지, 어떨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의 식사를 가리켰다.

“얘기 그만하시고 식사나 하시지요. 이렇게 사람이 많이 쳐다보는데 다들 편안하게 식사가 되세요?”

그제야 두 사람은 리아가 불편해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케빈이야 워낙 주위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고, 퍼스 또한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탓이었다. 리아는 귀족이라곤 해도 평범한 외모에, 잘난 오빠들에 가려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지도 않는 타입이라 더욱 불편했다.

“얼른 식사나 하시죠. 그렇게나 많이 남기셔서 언제 다 드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는 퍼스 님이야말로 그렇게 하나하나 가시를 바르다가 어느 세월에 드시려고 그런답니까?”

“두 사람 다 그만이요. 오늘 청어 요리가 아주 맛이 좋은데 요리에 집중해주시겠어요?”

리아는 훈계하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리아의 말에 두 사람은 말 대신 눈으로 불평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덕분에 리아는 나머지 청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힘든 식사 시간이었다. 오후에도 일하려면 체력을 많이 보충해둬야 할 것 같았다.

***

“너무 웃겨. 아니,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네가 있는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었다니까?”

메이는 리아의 베개를 끌어안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게 웃을 일인가? 사람이 곤란해하고 있는데 멀리서 보기나 하고! 리아는 메이를 몰래 노려보았다.

“웃지 마세요, 메이. 제가 점심시간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아세요?”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앞으로도 세 사람이서 먹는 거야?”

“모르겠어요…. 매일 그렇게 식사하다간 체하겠어요.”

울상을 짓는 리아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메이는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낮에 있었던 일은 물론 왕궁 전체에 순식간에 퍼졌다. 하긴 왕궁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셈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유명인들끼리 식사를 했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서로 전혀 안 맞을 것 같은 두 사람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딱인 상황이었다.

“네가 퍼스 님과 사귀다 헤어진 후 케빈 님으로 갈아탔는데 퍼스 님이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쫓아다니는 거래.”

“정말. 다들 모른다고 잘도 말하는군요. 직접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밥을 먹어보라고 해요! 다들 하루씩 체험해보면 제 기분을 잘 알 거예요.”

“보통 사람들과 밥을 잘 먹지 않는 두 사람이니 더 그런 거지. 두 사람에게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조건이 있잖아.”

“그게 뭔데요?”

“외모. 일단 둘 다 잘생겼잖아.”

그건 그렇지. 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퍼스는 곱상하게 생긴 과라면 케빈은 역시 전직 기사 출신이라 그런지 건강하게 생긴 과였다. 잘생겼냐 안 잘생겼냐 묻는다면 그녀도 당연히 잘생겼다 대답할 수 있는 쪽이었다.

“성격은 둘 다 보통이 아닌데요.”

“아, 물론 성격이야 정평이 나 있지. 그래도 또 그게 독특한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메이도 그 두 사람 좋아해요?”

메이는 아까부터 두 사람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만 했다. 정작 리아의 고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리아의 질문에 대뜸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왜? 내가 그중 하나 좋아해서 라이벌이라도 될까 봐 불안해?”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제 편을 들어달라는 거라고요, 그 두 사람이 아니고!”

귀여운 질투를 하는 리아를 보며 메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 이렇게 메이가 머리를 쓰다듬으면 언니가 있었으면 이랬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지만 메이는 큰언니 같은 면모가 있었다.

“난 연애는 사치야. 얼른 정직원이나 되어야지. 난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아주 많아.”

그녀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가끔만 들려주었다. 그랬기에 이런 사소한 얘기도 리아는 듣는 게 좋았다. 그때마다 비로소 친구로서 인정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메이는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러곤 여동생을 달래듯 천천히 반복해서 등을 쓸어내렸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적은 월급이지만 메이는 그 돈 중 일부를 가족에게 보내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장녀 노릇을 한다는 게 원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 리아처럼 귀족 집안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리아는 메이가 자신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좋은 집안에 태어나 배를 곯는 일 없이 자라났기에 그녀의 심정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그녀가 가족과 떨어져 외로워하고 슬퍼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외로워하지 말아요. 제가 있잖아요, 메이.”

“내가 언제 외로워했다고 그래.”

“쑥스러워하지 말아요. 전 눈치가 빠르다고요.”

“퍽이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리아의 서투른 위로가 꽤 마음에 와닿았다. 리아에게 그렇듯 메이에게도 리아는 소중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귀족이라 거리감이 있었지만,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자신을 높이지 않는 리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 소중한 친구를 괴롭히는 두 사람을 떠올렸다. 한 명은 업무 시간 외엔 떠올리기도 싫은 상관이었다. 다른 한 명은 최근 나아졌다고는 하나 리아를 괴롭혔던 상관이었고.

메이가 보기에 두 사람의 태도는 명확했다. 자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둘째 치고 리아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다. 둔한 친구는 그걸 모르면서 자신은 눈치가 빠르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에휴. 언제 커서 진짜 눈치가 자라려나.”

“메이, 가끔 이렇게 동생 취급을 할 때마다 생각하는데요.”

“응?”

“메이랑 저랑은 동갑인 데다 생일이 3개월밖에 차이가 안 나요.”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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