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일상적이지 않은 대화
“찰리!”
그의 말에 먼저 반응한 건 케빈이었다.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찰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깨달은 것이었다.
“아, 리아. 미안하다….”
바로 찰리가 사과했지만 이미 리아의 양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화가 나서였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눈물부터 차오르곤 했다.
“혼인은 원치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몇 번이나 오라버니는 제 말을 안 들어주셨지만요.”
“진정해라, 리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실수로 그런 거다.”
“그래, 리아. 형 진심은 아닐 거야. 네 능력도 충분히 쓸모가 있어.”
두 형제가 황급히 리아를 달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돌아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그녀는 몸을 돌려 말했다.
“큰오라버니와 전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아요. 이왕이면 평생 왕궁 기사단에 계세요. 이쪽으로는 절대 안 올 테니까요.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게.”
그녀의 인생에서 찰리를 퇴출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찰리는 창백해진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그를 때리며 루퍼스가 빨리 쫓아가 사과하라고 눈치를 줬지만 너무 충격을 받은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케빈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리아를 따라 찰리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 자식 정신 차리게 하고 머리 식히면 다시 온실로 오라고 해.”
“알겠어요.”
“한 대 맞을 각오하고 오라고도 하고.”
“…네.”
문을 열고 나서니, 리아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케빈이 걸음이 빨라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은 어디 가고 잔뜩 화난 모습이었다. 그가 옆에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찰리에 대한 욕을 하고 있었다. 다른 말은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들렸다.
“대머리나 되어 버려라!”
그 말을 들은 케빈은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터졌다.
“푸핫.”
“왜 웃으세요!”
“웃긴 데 어떻게 안 웃어.”
“전 심각하다고요!”
투닥거리면서 가다 보니 금세 기숙사가 나왔다. 리아는 케빈이 기숙사까지 데려다줬다는 것도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해가 진 지 오래여서 기숙사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외엔 주변이 어두웠다.
“찰리 얘기는 잊어.”
“신경도 안 쓸 거예요.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분 얘기 따위.”
“능력에 대해 뭐라고 하는 건 능력으로 증명해 보이면 되지.”
“제 능력을요? 어떻게요?”
“지금 맡은 사막의 기적, 꼭 살려. 그래서 왕자한테도 퍼스 보좌관한테도 찰리한테도 백작님께도 그리고 나한테도 인정받아.”
“사막의 기적에는 제 능력이 안 통하는데요?”
리아가 케빈에게 하는 첫 약한 소리였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혼내고 말았을 텐데, 항상 강한 척하는 그녀였기에 약한 소리도 귀담아들었다.
“같이 연구하면 되지, 뭐. 어차피 사막의 기적은 내가 연구하던 거기도 했고.”
“케빈 님.”
“내일부터 야근이야. 이번 달은 소개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랑 초과근무한다고 생각해.”
혼인이 싫다고 했던 리아의 말을 담아둔 듯했다. 초과근무라는 단어로 알기 힘든 배려를 하는 그 덕분에 리아는 미약하게나마 웃음이 났다. 밤이라 쌀쌀한 바람이 불어서 더 이상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케빈 덕분에 조금은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초과근무 열심히 할게요. 추운데 얼른 들어가세요.”
“그래, 내일 봐.”
“내일 봬요.”
먼저 가라고 했지만, 케빈은 그녀가 기숙사 안에 들어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리아가 사라진 자리를 조금 더 바라보던 그는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농담 아니라고 하면… 도망갈 거지?”
아무도 듣지 않은 그 말 때문에 그는 밤잠을 설쳐야만 했다.
***
일단 도와주기로 선언하자 케빈은 전폭적으로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일단 케빈이 넘겼던 사막의 기적에 관한 연구자료를 해독해주는 것부터였다. 알기 어렵다고 투덜거렸던 메모들을 그가 읽어주자 빠르게 자료 파악이 가능했다. 여러 증상을 보였던 사막의 기적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직접 가서 보면서 하는 게 어때? 천막에서 종이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백배는 낫지.”
그의 제안에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나면 보고 있기는 했지만, 케빈과 함께 보면 다른 게 보일까 싶었다. 이제는 익숙한 길을 따라 사막의 기적에게 향했다. 발밑의 모래가 밟히는 촉감도 익숙해졌다. 케빈 또한 리아와 걷는 게 익숙해져 자연스레 속도를 맞출 줄 알았다.
“안녕하세요.”
사막의 기적은 모래사막 환경을 연구하는 쪽 담당자가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리아가 관리하는 한 뿌리 외 다른 네 뿌리는 그 담당자 관리하에 있었다. 그녀가 혼자 갔을 때는 연구에 대한 정보를 전혀 말하지 않더니, 케빈이 가자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대로 물은 한 달 간격으로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주고 아직 공급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상태는 중하 정도인 듯합니다.”
리아가 맡은 사막의 기적과 네 뿌리의 상태는 거의 동일했다. 아직까지 그녀가 적극적으로 뭘 다르게 한 부분은 없으니 당연했다. 다행히 아직 다섯 뿌리 모두 시들어 버린 다섯 뿌리와 달리 잎이 마르거나 곰팡이가 피는 등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대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면 살릴 수는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왕비 마마가 말씀하신 대로 크게 키워내는 건 어려울 수 있어.”
“조건을 다르게 해봐야 할까요?”
“물 양은 이미 조건을 거의 다 다르게 해봤는데 얼마나 더 세세하게 해야 하는 거지….”
“물 주는 방법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갑작스런 리아의 의견에 담당자와 케빈의 시선이 쏠렸다. 그녀는 자신의 사막의 기적을 살며시 만지면서 말했다.
“비를 통해서 물을 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직접 물을 주니까 이파리 사이에 고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이대로 두면 썩을 것 같더라고요.”
“그럼 어떻게 줘야 한다는 거야?”
“제가 책에서 읽었는데 사막은 비가 많이 오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1년에 한 번 외에는 어떻게 물을 먹을까 하고 고민했죠. 그런데 이 아이는 미세하게 이파리에 뭐가 나 있더라고요. 이게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리아와 같이 두 사람 또한 사막의 기적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댔다. 돌아보면 얼굴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모두 식물에 집중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하얗게 생긴 미세한 점들이 이파리 근처에 나 있었다.
“이걸 물 흡수하는 데 사용하는 거 아닐까요?”
“예를 들어?”
“케빈 님 연구자료에 보니까 공기 중에 있는 물을 흡수하면서 사는 희귀 식물이 있더라고요. 그런 것 아닐까요?”
그 식물의 생김새는 케빈도 잘 알았다. 듣고 보니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행동하기로 한 이상, 해보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럼 공기를 습하게 유지해야 하나?”
“일반 비처럼이 아니고, 안개처럼 물을 분사해야 한다는 거죠.”
“케빈 님, 이렇게 새파란 수습 말만 믿고 바로 하시는 겁니까?”
옆에 있던 담당자가 불쾌한 티를 냈다. 단순한 의견일 뿐인데 바로 받아들여 주는 상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이 뿌리만 해보면 되죠.”
리아가 자신이 맡은 사막의 기적을 가리켰다. 케빈의 상관으로서 자신의 편만 든다는 오해를 받는 게 싫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에 귀 기울여 준 것뿐이었으니까.
“그래, 그러면 되겠군. 나머지 네 뿌리는 자네 하고 싶은 대로 관리하게. 제1 왕자님은 누구든 사막의 기적을 키워내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신다고 했으니.”
“알겠습니다.”
곧바로 담당자의 네 뿌리와 리아의 공간을 분리했다. 사막의 기적 주변을 가르는 건 공간 능력자가 담당했다. 이로써 환경을 달리해도 서로의 식물에 영향을 받을 일은 없었다.
“그럼 안개처럼 분사하는 건 어떻게 하죠?”
“그건 내가 할 수 있어.”
말을 마치자마자, 주변에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비를 아주 미세하게 갈라 뿌리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케빈의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집중해서 능력을 써야만 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주변이 수분으로 가득했다.
“그만요!”
리아의 목소리에 따라 뿜어져 나오던 안개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주 작은 물방울들은 천천히 떨어져 사막의 기적의 흰 점들에 안착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하얀 가루가 날리는 듯했다.
“많이 내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좋아. 네가 맡은 뿌리니 네가 원하는 만큼 물을 줘야지.”
“안개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는데… 생각보다 예쁘네요.”
“나도 안개를 내리게 해본 건 처음이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안개 때문에 미세한 물방울들이 리아의 긴 속눈썹과 얼굴에 난 솜털들에 내려앉아 있었다. 케빈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머쓱한지 시선을 돌려 사막의 기적을 바라보았다. 민망함에 빠르게 깜빡이는 눈썹을 보고 있자, 그의 머리가 멍해졌다.
“이런 말… 조금 이르지만.”
말을 꺼내자, 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연한 빛이 도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자 긴장한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나….”
“점심시간입니다.”
케빈의 말을 가르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퍼스였다. 심지어 두 사람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기까지 했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중요한 말을 방해받은 케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직 점심시간 시작 종도 안 울렸는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식사 시간을 알리는 데엥-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퍼스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웃었다.
“울렸네요.”
난 정말 이 사람 평생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 케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웃고 있는 퍼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퍼스 님, 어쩐 일이세요?”
“같이 식사하려고요.”
쪼그려 앉아 사막의 기적을 관찰하던 두 사람 때문에 퍼스 또한 쪼그려 앉은 상태였다. 그는 팔꿈치에 턱을 괴고 지그시 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무심한 듯했던 그가 리아에게 맞춰주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몹시 낯설었다.
“당분간 같이 식사 안 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소문은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아서요.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퍼스는 먼저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쪼그려 앉은 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흰 장갑을 낀 상태였지만, 접촉을 싫어하는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머쓱해하며 그는 재차 손을 내밀었다.
“안 일어나실 건가요?”
“아, 아뇨. 일어나요. 일어나야죠.”
얼떨떨한 기분을 맛보며 리아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꽉 마주 잡은 퍼스가 힘 있게 그녀를 당겼다.
“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