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찰리와 루퍼스 (2)
“아버지도 참. 고작 열여덟밖에 안 된 애를.”
“열여덟이나 된 거다. 요즘 다른 여자애들은 태어날 때부터 약혼도 하고 하는데 왕궁에 가겠다고 약혼도 하지 않고 열여덟이나 되었으니. 열대여섯이면 결혼도 하는 세상인데. 그렇게 말씀하셨겠지.”
아버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루퍼스와 찰리가 거들었다. 예전부터 그는 리아를 결혼시키고 싶어했으니까. 귀족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어릴 때부터 약혼시키곤 하는데, 그것도 리아가 싫다고 해서 하지 않고 순전히 좋아하는 상대가 생기기를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연애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왕궁에 들어가는 것만을 꿈으로 가지고 능력을 연구하겠다며 숲으로 나돌기만 했다. 백작의 속이 타들어만 갔다.
“그 사람이 소개라니.”
케빈은 퍼스를 떠올리며 비웃었다. 그가 업무적으로 만나는 사람 외에 왕궁에 소개를 해줄 사람이나 있을까. 업무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과는 대화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였다.
“케빈 님이 비웃을 처지는 아닌 것 같아요.”
하여간 솔직하기는. 케빈은 잠시 루퍼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케빈 또한 왕궁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친한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 다 사교적인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도 참. 차라리 나한테 맡기시지.”
사교적이라는 표현은 차라리 루퍼스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눈앞에 있는 찰리 또한 필요한 인맥 외에는 쌓지 않는 타입이라 사교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루퍼스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굴었다. 딱딱한 집안에서 분위기를 풀어줄 역할을 하며 살다 보니 누구에게나 맞추는 게 익숙한 그였다.
“넌 은근 리아에 관해서는 까탈스러우니까 그러지.”
“내가 언제!”
“아니라고 하긴 어려울걸.”
두 오빠는 나름대로 리아를 아꼈다. 당사자인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에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글쎄요. 저는 작은오빠가 저를 그렇게 아낀다는 생각은 못 해봤는데.”
차가운 리아의 대답에 루퍼스는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평소 행실을 보자면 그녀가 못 믿을 만도 했다. 항상 틈만 나면 그녀를 놀리고 괴롭혔으니까.
“그래서. 첫 번째 상대는 누구였는데?”
페넬로페 형제의 속사정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케빈이 본래의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제1 왕자님이요.”
“뭐, 누구라고?”
“알폰스 왕자님이요.”
리아는 가볍게 대답했지만, 그 내용의 파장은 컸다. 심지어 이런 일에 잘 동요하지 않는 케빈조차 깜짝 놀라 동공이 확장되었다. 루퍼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알폰스 왕자라니 말이 돼!”
“조용히 하고 자리에 앉아. 여긴 궁이야.”
“아니, 형. 아니, 부 기사단장님. 그래, 화가 나지도 않아? 그, 그 소문이 무성한 자, 왕자를 리아에게 갖다 붙였다는 게?”
흥분한 루퍼스와 달리 찰리는 동요를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내심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그… 사람은 왜 1 왕자를 네게 소개했지?”
“아버님이 내건 조건은 미혼에 제가 반할 만한 남성이라는 조건뿐이었고, 알폰스 왕자님은 나름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으시니 해당 조건에는 부합하지 않느냐고 하시더라고요.”
“보좌관 나부랭이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자 아니야?”
“루퍼스. 왕궁이니 말조심하라고 했다.”
친오빠들이 퍼스를 비난하자, 리아는 제가 그의 험담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흥분한 그들을 말렸다.
“나름대로 그분은 왕궁에 온 저를 신경 써주셨어요. 그리고 분명 아버님이 제시하신 조건에는 완벽하게 부합했고, 제가 실제로 결혼이 성립되는 걸 원하지 않아서 일부러 확률이 낮은 사람으로 소개해주신 걸 거예요. 게다가 왕자님은 자신이 소개 상대였다는 사실조차 모르세요. 퍼스 님이 일부러 그 얘기는 빼셨거든요.”
“그래서 가끔 왕자와 식사를 해야 한다면서 초대받아 갔던 거군. 왕자는 소개 상대인 사실조차 몰랐다면서 너를 왜 초대한 거지?”
“그건….”
그 얘기를 꺼내면 왠지 다시 퍼스가 나쁜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집안 힘으로 왕궁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제 출신 성분과 발탁 과정을 불편해하는 케빈은 그 사실을 알면 자신을 싫어할 게 분명했다. 친오빠들 또한 역시 집안의 힘이었다면서 제 능력을 부정할 게 뻔했다. 리아는 일부러 다른 이유를 댔다.
“그저 특례로 들어온 경우라서 사막의 기적을 잘 키우라고 격려해달라고 퍼스 님이 부탁하셨어요.”
실제로 처음 리아와 알폰스의 만남이 성사되었던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다. 완전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그거로 끝났을 리가 없는데. 알폰스 그… 왕자가 너한테 손대지는 않았고?”
“네. 손대지는 않으셨어요.”
루퍼스는 정색하며 알폰스에게 제 누이가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지 걱정했다. 하지만 리아는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계속해서 어필했지만 그녀가 거절한 거였다. 약혼자를 두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저와 친해지고 싶다고 하는 것부터 불편했다. 리아가 아니라 제 배경에 관심이 있는 거였지만.
“한 달 동안 불편했겠구나.”
찰리는 소감을 단 한 마디로 표현했다. 불편하기야 했지. 전혀 여동생을 걱정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리아였다.
“네. 뭐,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좋은 경험은 무슨!”
“그래, 이제 한 달이 지났으니 다른 사람을 소개받았겠구나. 두 번째 사람은 누구더냐?”
날뛰는 루퍼스를 무시한 채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두 번째 사람을 이야기하자 저절로 리아의 시선이 케빈에게로 향했다. 그는 숨길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야.”
“뭐라고?”
알폰스 왕자가 첫 번째 소개 상대라고 했을 때도 크게 놀라지 않던 찰리가 케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루퍼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연한 것은 당사자인 리아와 케빈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어째서 케빈 님이 두 번째 상대가 된 거지? 그 보좌관이랑 아는 사이이길 해?”
“아는 사이는 맞지. 친한 사이는 아니고.”
“친하지도 않은데 왜 케빈 님을 소개해주냐고?”
“이번에도 조건 때문이에요.”
조건 때문이라는 리아의 대답에 페넬로페 형제가 멋대로 추측하기 시작했다.
“미혼 남성이라서? 하지만 궁에 미혼 남성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리아가 반할 만한 남성이라서?”
“무, 물론 케빈 님이 훌륭한 남성이긴 하지.”
“아니면 리아 네가 이미….”
“아니에요! 제가 다른 한 조건을 더 내세웠기 때문이라고요.”
너무 터무니없는 추측으로 이어져서 리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져 부정했다. 아직 찰리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뭔데?”
“저번에 알폰스 님을 만나다가 업무 시간을 너무 많이 빼서 일을 제대로 못 배운 것 같아서요. 이번에는 최대한 시간을 많이 빼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추천해달라고 했어요. 이왕이면 제 동선 안에 있는.”
“아, 그래서 상관인 케빈이 되었다?”
“네, 맞아요.”
“온실에서 같이 일하나?”
“내 보조야.”
“그럼 확실히 조건에 제대로 부합하기는 하는군.”
형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퍼스 보좌관이라는 존재는 워낙 유명해 알고 있을 뿐, 사람을 제대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의 말을 잃게 만드는 능력이 있단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보좌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루퍼스는 찰리가 여러 번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불호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찰리 또한 그 말에 동감이었다. 분명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내가 여동생의 상대로서 마음에 안 드나?”
케빈은 툭 농담조로 질문을 던졌다. 거기에 화들짝 놀라 반응한 것은 루퍼스였다.
“아니, 싫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케빈 님이라면 저는 대환영이죠!”
“오, 그럼 여동생과 정말로 잘되어서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그건 리아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까요…. 제 의견은 중요한 게 아니라서….”
“그럼 찰리는?”
갑자기 찰리에게 질문이 넘어가자 그는 당황했다. 리아와 케빈을 번갈아 보던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짜로 혼인한다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래, 형.”
“진짜로 할지 안 할지 모르지.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겠어?”
케빈은 이 농담이 재밌는지 계속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혼에 관한 농담은 하나도 재미가 없는 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눈앞에 놓인 허브티에만 집중했다. 찰리는 바보 같은 농담을 농담으로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간 찰리는 여전히 검만 아는 바보군.”
몸을 돌린 케빈이 차를 마시는 척 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이 우스웠던 리아는 저도 모르게 풋 비웃었다. 자신의 큰오빠는 항상 다른 사람의 귀감이었다. 그를 칭찬하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런 그를 놀리는 케빈의 모습을 보니 내심 유쾌했다.
두 사람이 서로 귓속말을 나누며 웃는 모습을 보던 찰리는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여동생에게 예전부터 자신이 엄격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잘 웃는 모습은 어릴 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었다. 항상 뚱하거나 불만에 차 있는 표정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난… 찬성이야.”
“뭐?”
“갑자기?”
찰리는 갑자기 찬성 선언을 했다. 모두가 놀랐지만 말한 자신이 더 놀랐다. 생각하고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만약… 만약 그렇다면 말이야. 케빈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들으며 리아는 인상을 썼다. 자신은 생각도 없는데 여동생의 혼인을 승낙하는 큰오빠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큰오라버니.”
“케빈이 별로라는 말이야?”
“아니요. 그런 말은 아니에요. 왜 말을 꼬아서 들으세요?”
“내가 언제 꼬아서 들었다고. 너야말로 항상 왜 그렇게 내 말에 반항적인 태도야?”
“오라버니가 제가 싫어할 만한 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싸우지들 마. 하여간 너는 농담에 너무 진담으로 받아치는 게 문제라니깐.”
케빈이 두 사람 사이를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루퍼스도 함부로 농담을 하지 못했다. 리아와 찰리는 한참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여간 리아는 자신이 오라비인데도 한마디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찰리의 입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말실수가 튀어나왔다.
“어차피 네 실력으로는 정규직 되기도 힘들 텐데 케빈 님 정도 되는 분 만나는 게 어때서? 차라리 혼인이나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