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찰리와 루퍼스 (1)
기사단이라고 해봤자 건물은 훈련장과 사무적인 일을 처리하는 공간, 숙소 세 채밖에 없었으므로 안내는 빠르게 끝났다. 기사단은 왕궁의 화려함은 빼고 실용적인 부분을 최대로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때문에 보는 재미가 있는 건물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빼닮은 외모의 세 남매에 전직 부 기사단장 출신인 케빈에게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이따금 꽂힐 뿐이었다. 안내를 마친 찰리는 그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했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리아는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고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찰리에게 리아의 의견이 통할 리는 없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케빈과의 이야기를 마친 후, 직접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일하는 기사단을 처음 본 소감은 어떠신가, 여동생.”
루퍼스는 제집처럼 편하게 찰리의 소파에 앉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쳤다. 하지만 리아는 알고도 모르는 척 케빈의 옆자리에 앉았다. 상석에 앉은 찰리 또한 리아의 소감이 궁금한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기사단이 기사단이지 뭐 특별할 게 있다고 그러세요. 왕궁이라 조금 더 크긴 하지만요.”
페넬로페 백작가에도 기사단은 있었다. 그렇기에 페넬로페 형제가 굳이 왕실 기사단에서 일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사이키델리아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아 왕궁에서 일하는 게 최고의 영애였다.
찰리에 이어 루퍼스까지 왕궁 기사단에 발탁되었을 때 집안은 난리가 났다. 하지만 리아는 둘 모두 부러워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신도 왕궁에서 일하고 싶었으므로.
“입궁한 뒤로 자주 보지도 못했는데 오라버니에게 그렇게 까칠하게 나오기야?”
루퍼스는 손을 뻗어 다시 리아의 머리를 만지려 했다. 물론 리아가 질색하고 몸을 뺐기에 닿지는 못했지만. 둘의 관계는 예전부터 이랬다. 한결같이 루퍼스는 애정을 퍼붓고, 리아는 거부하는.
“기사단은 뭐 어디나 똑같지. 그럼 케빈, 이 아이는 왕궁에서 어떻나? 쓸 만은 하나?”
방심한 틈을 타 찰리가 기습을 했다. 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케빈을 돌아보았다. 그는 리아의 시선을 받고도 태연했다.
“뭐 반 인분 정도.”
퍼스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한결같이 솔직한 사람이었다, 하여간. 리아는 옆자리에 앉은 그를 가자미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녀가 노려보는 걸 눈치챈 루퍼스가 선수를 쳤다.
“이제 고작 한 달째인데 반 인분이라는 말을 들으면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그 눈빛은 뭐냐.”
“감사합니다. 감격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리아! 상관에게 무슨 무례한 태도냐.”
리아는 반항기 어린 대답을 했다가 결국 찰리에게 주의를 받았다. 그녀는 더욱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며 억지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케빈 님.”
“별로 상관없어. 평소답지 않네.”
페넬로페 남매의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어떤 건지, 그는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평소라면 루퍼스에게 하듯 톡 쏘며 받아쳤을 테지만 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찰리와 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리아는 먼저 슬쩍 시선을 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릴 적부터 첫째 오라버니인 찰리와 리아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인 페넬로페 백작과 같이 리아를 어린 여동생으로만 취급했다. 항상 고리타분한 소리만 하며 루퍼스와 그녀를 억압하는 그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부 단… 케빈 님이 기사단에 방문해주신 것도 오랜만이네요! 예전엔 훈련장에서 살다시피 하셨던 분인데.”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루퍼스가 이야기를 돌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리아와 찰리의 어색한 분위기를 잘 알고 어색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뭐. 그랬지.”
케빈은 싱겁게 대답했다. 그의 과거는 리아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애초에 그에 대해 이야기 해 준다고 해서 온 기사단이니까. 자신의 오빠들과 친한 사이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같은 왕궁 기사단이라고 해도 기사단에는 수많은 기사가 있었고, 케빈은 귀족을 싫어했으니까.
“그래. 전쟁터에서 제일 활약했던 것도 케빈 너였는데 말야.”
찰리 또한 그를 인정하는 듯했다. 두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 칭찬하는 건 잘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리아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활약하기는 뭘. 능력이 약해져서 퇴출당한 지가 언젠데 그런 얘기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세 사람 모두 그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어차피 리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러 온 참이었다.
“억지로 말해 주시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리아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댄 핑계였다. 그가 온실에 오게 된 이유가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상처에 얼마만큼 태연하냐였다.
“상관없어. 다 과거인걸.”
리아는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얼마가 지나면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인생에 큰 상처가 될 일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초연한 태도를 취하는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리나 루퍼스 또한 서로의 눈을 맞추며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둘은 케빈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아는 듯했다. 하긴 모르면 이상하긴 했다. 하긴 기사단 내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았을 테니까.
“뭐 능력이 약해져서 기사단에서 퇴출당했어. 여기까지는 모두 알고 있잖아?”
그 당시에는 능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사건은 사이키델리아에서 공식적으로 능력이 약해질 수 있음이 증명된 첫 번째 사례나 다름없었다. 워낙 능력이 출중했던 케빈이기에 동료들의 충격은 더 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당시에도 지금에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왜 갑자기 능력이 약해진 겁니까?”
그가 갑자기 기사단에서 퇴출당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루퍼스는 그에게 이유를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능력이 약해졌다는 말 외에 아무런 사실도 알려주지 않았다. 당사자도 충격이 크겠거니 생각한 그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은 그 자신도 괜찮다고 하니 조심스레 다시 질문을 던졌다.
“풀 한 포기 때문이었어.”
“풀 한 포기요?”
“마지막으로 전쟁터에 나갔을 때.”
“사막 전쟁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난 정말 그때 자네가 그대로 일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네.”
“걱정해줘서 고맙군.”
그때 사막 전쟁에 루퍼스는 참전하지 못했다. 대신 찰리는 함께 갔었다. 선봉에 나섰던 케빈이 갑작스레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크게 상처를 입었다. 그의 몸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흔을 찰리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날의 전투는 승리했지만, 두 번 다시 케빈은 검을 쥘 수 없었다.
“그때 많이 다치신 건가요?”
“아마 지금도 케빈 등에 대각선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한데.”
“얼마나 크게 다치셨는데요?”
“거의 죽다 살아났다고 봐야지.”
“뭐, 검에 살짝 베여서. 좋은 능력자 만나서 지금은 거의 흉터만 남아 있어.”
죽다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참 쉽게도 했다. 원래 검상에 익숙한 찰리가 죽다 살아났다고 할 정도면 어지간히 심한 상처였을 게 분명했다. 치료 능력자의 손에 닿으면 자잘한 상처들은 흉터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그런데 흉터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것 또한 그 당시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런 검상을 입을 실력이 아니었는데.”
루퍼스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케빈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 당시엔 케빈이 전쟁터에 등장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입소문이 날 정도였다.
“갑자기 능력이 발휘되지 않게 된 거 아니었어?”
“맞아.”
“그게 그 풀 한 포기 때문이라는 거야?”
“전쟁터 한복판에서 그 풀 한 포기를 발견했지. 무슨 풀인지는 지금도 몰라. 그냥 모래 먼지 한가운데 있는 그 풀을 발견했고, 살리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 순간 힘이 발휘되지 않더라고.”
전쟁터에서 잠깐의 방심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방심했던 케빈이 살아남은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일지도 몰랐다. 잠깐 한눈을 판 대가로 등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피범벅이 된 그를 끌고 나온 것은 찰리였다.
“고작 풀 한 포기 때문이라고….”
“죽고 살아나니 그 풀 한 포기가 마음에 걸리더군. 어차피 두 번 다시 검을 쥐지 못하게 된 것, 어떻게 그 풀 한 포기가 사막 한가운데 있었는지가 궁금했어. 그래서 원하는 부서로 옮겨주겠다는 말에 온실, 사막 기후 관련 부서를 선택했을 뿐이야.”
너무 의외인 대답에 루퍼스와 찰리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반면 리아는 놀라면서도 이해했다. 기사였던 그가 온실로 오게 된 계기가 너무 뜬금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케빈은 고개를 돌려 리아와 눈을 맞췄다.
“됐지? 내 이야기는 이런 것밖에 없어. 굳이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어.”
별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단한 내용이었다. 죽을 뻔하고 능력이 약해지고 검과 전혀 관련 없는 온실로 옮기게 된 게 어째서 하찮단 말인가. 그에 비하면 리아의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도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리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케빈과 장난기를 빼고 진지하게 말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어색해하면서 살짝 귀 끝을 붉혔다. 이런 진지한 분위기는 질색이었다.
“그럼 이제 네 이야기를 해줘.”
“무슨 이야기인데요?”
케빈은 대답하지 않고 리아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세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친남매인 오빠 둘도 사정을 대강 알고 있었고, 케빈도 알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간략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페넬로페 저택에 제1 왕자님의 제1 보좌관인 퍼스 님이 찾아오셨었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초록색으로 물든 드레스 자락이 먼저 떠올랐다. ‘그 차림으로 손님을 맞았구나’ 하는 생각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입었던 옷은 결국 물이 빠지지 않아 버려야만 했다. 재클린의 엄청난 잔소리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았다.
그 당시의 퍼스가 얼마나 까칠했는지도 기억이 생생했다. 실수로 넘어진 것뿐인데 병균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쾌해하던 표정. 지금 생각하면 그런 사람과 어떻게 친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저에게 사막의 기적을 살리기 위해 수습으로 3개월 동안 입궁할 것을 제안하셨고요. 여기까지는 케빈 님도 알고 계시는 부분일 거예요.”
그 일로 인해 케빈은 퍼스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으니까. 생략되었지만 뒷말이 들리는 듯했다. 케빈은 민망함에 큼큼 헛기침하며 모르는 척했다.
“그런데 제 부친, 페넬로페 백작님께서 입궁하는 대신 퍼스 님께 조건을 제시하셨죠.”
“중매 말인가.”
“중매라고 표현하면 어감이 좀 그렇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죠. 결혼 목적으로 궁에 있는 미혼 남성 세 명을 한 달 간격으로 저한테 소개해주라고 하셨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