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인정하기로 했다
“자, 이제 다 털어놔 봐.”
하루 업무를 끝낸 케빈은 갑자기 테이블을 가리켰다. 순순히 반대편에 앉은 리아를 보며 그는 다리를 꼬았다. 두 사람의 앞에는 케빈이 제조한 정체불명의 주스가 있었다.
“뭘 털어놔요?”
리아는 경계하듯 그 주스를 노려보았다. 색도 색이거니와 맛도 이상해서 몇 번이나 저 주스에 당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케빈의 호언장담대로 효과는 엄청나서 마시면 지쳤던 몸이 개운해지긴 했다.
“뭘? 이제 우린 공범인 거 몰라?”
“공범이라뇨. 제가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나요?”
“중매. 같이 하기로 했잖아.”
“표현이 좀 그러네요.”
“맞지, 뭐.”
“아무튼 그거요. 그게 왜요? 뭘 털어놓아야 하는 건데요?”
케빈은 아무렇지 않게 주스를 마셨다. 자신이 만든 거지만 미각도 없는 건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마시는 그가 내심 대단했다. 리아는 계속해서 케빈의 말보단 주스에 집중하고 있었다.
“서로 앞뒤 붙이는 성격은 아니니 본론만 간단히 하자고. 어쩌다 그런 골치 아픈 소개를 받게 되었는지 알려달라고. 그래야 내가 행동 방향을 정할 거 아니야?”
“지금 이대로 제 상관으로서의 역할만 충실히 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한데요.”
모처럼의 친절이었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하는 리아를 보니 속이 뒤틀렸다. 그간 제가 의지할 구석이 없는 상사처럼 비쳤단 말인가. 함께한 시간이 적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심지어 리아는 눈앞의 케빈이 아닌 주스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대충대충 대답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케빈은 한 번은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네 상관으로서 모자랄 일은 없을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저도 케빈 님 부하로서 모자랄 일은 없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좀 순순히 내게 의지하면 안 돼?”
한마디 한마디 도무지 지려고 하지 않는 리아 때문에 케빈은 그만 속에 있는 그대로 말해버렸다. 갑작스러운 말을 들은 리아도 놀랐지만, 저도 모르게 내뱉은 케빈이 더 놀라고 말았다.
“절 보호해주시겠다는 말씀이세요?”
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케빈이 갑자기 제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을 도와주겠다면서 두 번째 소개 상대가 된 점도 이해가 안 갔다. 뭘 위한 도움인지. 케빈이 최근 조금 다정해진 건 사실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상한 의미는 아니라고. 그저 도와주겠다고 한 만큼 앞뒤 사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야. 난 네 상관이기도 하고, 연장자이기도 하니까 선배로서 인생 상담 정도 도와주겠다는 의미니까 너무 확대해석하지 말도록.”
케빈은 당황해서 횡설수설했지만, 자신의 핑계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리아는 이해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애매한 표정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자신은 그저 리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도와주고 싶었다. 이건 아무런 흑심이나 계략 없는 진심이었다.
리아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가 솔직히 말하니 더욱 그랬다. 진심인지 가식인지가 모호했다. 하지만 진심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특히 빨개지는 케빈의 귀를 보니 더욱 그랬다.
“…좋아요. 말씀드릴게요. 대신 케빈 님이 먼저 말씀해주세요.”
“뭘?”
“케빈 님 이야기요.”
“난 소개를 받은 적은 없는데.”
“그거 말고요! 저번에 하려다 만 이야기요. 제가 물어봤잖아요. 왜 기사단에서 온실로 오게 되었는지.”
“그 얘기는 왜 해야 하는데?”
이미 한참 전에 지난 이야기였다. 다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케빈은 그 화제가 나와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니 리아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괜찮았다. 다만, 그 이야기를 왜 리아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 꺼내야 하는 건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민감한 이야기를 꺼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저에겐 그만큼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일은 아니에요.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하지만, 그냥 가끔 식사를 함께해주시는 정도로 괜찮아요.”
또 거절이었다.
“마음은…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정말 케빈 님께 상담까지 해버리면 제가 약해질 것 같아서 그래요.”
세 번의 거절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뭐든 상관없었다. 리아에게 받는 거절은, 더 이상은 사절이었다.
“좋아. 해주지. 그 이야기.”
“예?”
“따라와.”
***
대뜸 따라오라고 해서, 리아는 툴툴대며 그를 따라갔다. 꾸준히 어디 가는 거냐고 묻는 그녀의 말에 케빈은 묵묵부답이었다. 아직 왕궁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된지라 리아는 궁의 지리를 잘 몰랐다. 함부로 다닐 수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궁에 오래 있던 케빈은 사람이 없는 샛길을 따라 요리조리 잘도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지금껏 리아가 가보지 않은 곳임은 확실했다. 도서관보다 더 먼 거리를 걸어야만 했다.
한참을 걷자, 커다란 돔 형식의 건물이 보였다. 곳곳에 열린 창문에서 모래 먼지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커다란 고함이 난무하고, 쇠로 된 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리아는 어렵지 않게 그 건물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기사단 건물이군요.”
“훈련장이야.”
왕궁 근무자들의 업무가 모두 끝났을 시간인데도 훈련장 내에는 사람이 많았다. 자율적으로 훈련에 참여하는 사람들인 듯했다. 무기를 들고 실전처럼 대련하는 모습에 리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기사단에는 전투 능력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요?”
“전투 능력이 있어도 전투에서 이기려면 가장 중요한 건 정신력과 전략이야. 그리고 정신력을 기르려면 가장 중요한 건 강한 신체고.”
“그걸 아시는 분이 가볍게 꼬리를 말고 도망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어느새 두 사람의 곁으로 한 남성이 다가왔다. 고된 훈련에 옷이 땀에 젖어 있었다. 훈련복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능력이 걸려 있는지 젖기만 했을 뿐 멀쩡했지만, 얼굴은 땅바닥에 구른 것처럼 흙이 묻어 있었다.
더러운 몰골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한 백금발은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흔들렸다. 게다가 그는 뭇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건실한 몸과 선이 굵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본인은 호쾌한 외모라고 주장했지만, 리아가 봤을 때는 그저 이목구비가 멀쩡한 것에 불과했다.
“루퍼스.”
케빈은 친한 사이인 듯 익숙하게 인사했다. 방금 전 독설과는 다르게 환한 웃음을 지은 루퍼스는 케빈을 꽉 끌어안았다.
“오랜만입니다, 부 기사단장님!”
“숨 막혀. 놔. 그리고 이제 부 기사단장도 아니야.”
케빈은 친근하게 구는 루퍼스를 간단히 떼어냈다. 꽤 힘이 세 보이는 그는 쉽게도 물러났다. 그러곤 고개를 내려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너는 여기 웬일이냐.”
“신경 꺼 주셨으면 좋겠어요. 가서 하시던 훈련 열심히 해주시기를.”
리아는 무척 불쾌한 표정으로 훈련장을 가리켰다. 하지만 루퍼스는 굴하지 않고, 손을 올려 리아의 머리를 헝클었다.
“무슨 짓이에요!”
“여전히 까칠하네, 우리 꼬맹이는.”
“무슨 짓이야. 손 떼.”
루퍼스가 난폭한 행동을 하자 케빈이 나서서 저지했다.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케빈과 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벌써 그런 사이가 된 거예요?”
“아니야!”
“그래, 아니야. 상관과 부하 사이지.”
잔뜩 헝클어진 머리 때문에 리아는 속이 상했다. 머리를 잘 묶지 못해서 아침에 기껏 메이가 신경 써서 묶어준 머리였다. 저 둔하고 무식한 바보 때문에 망쳐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리아는 머리를 모두 풀었다가 하나로 묶을 수밖에 없었다.
“부단장, 제 여동생은 왜 데리고 오신 거예요?”
살벌하게 노려보는 리아의 시선에도 루퍼스는 태연했다. 그녀의 머리를 망친 데 대한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역시 태어날 때부터 적이 분명했다. 피만 이어졌다뿐이지.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둘째 오빠, 루퍼스는.
“네 여동생이었어?”
“너무한 거 아니에요? 페넬로페라는 성만 봐도 알잖아요.”
“둘 다 페넬로페인지 뭔지 몰라서. 귀족이란 것만 기억했지.”
“사람한테 관심 좀 가지세요.”
루퍼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페넬로페 남매의 공통점을 찾기는 쉬웠다. 거의 같은 색의 백금발 머리에 연한 쌍꺼풀이 진 눈과 옅은 눈 색 등 생김새도 비슷했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 또한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냥 기사단 좀 구경시켜주려고 데리고 왔어.”
“그렇다면 안내역은 제게 맡기시죠.”
“훈련 중 아니야?”
“뭐, 단장에게 잘 말하면….”
“루퍼스!”
아니나 다를까.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루퍼스를 찾아 한 명의 남자가 더 훈련장에서 나왔다. 그 또한 루퍼스, 리아와 같은 백금발이었다. 키는 루퍼스보다 조금 작았지만, 다부진 인상으로 그가 연장자임을 알 수 있었다.
“형.”
“훈련 중에는.”
“…부 기사단장님.”
억지로 불렀지만 영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전 부 기사단장인 케빈 앞에서 부르려니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케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찰리.”
“오랜만이네, 케빈.”
케빈은 손을 내밀어 찰리와 악수했다. 두 사람 또한 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했다. 리아는 슬쩍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찰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큰오라버니.”
“그래.”
눈을 마주치기에 리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형제지만 루퍼스와 찰리의 온도 차는 극명했다. 페넬로페 백작과 워낙 닮은 외모로 소백작이라고도 불리는 그였다. 어릴 때부터 백작가를 물려받을 장남으로 자라서 그런지 그는 항상 반듯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들에게도 엄격하게 대했다.
“훈련장까진 무슨 일로 왔나?”
“리아와 얘기할 게 조금 있어서. 그러고 보니 여동생이었군.”
“자네는 여전하군.”
케빈과 찰리는 동갑내기였다. 기사단 시절에도 서로 함께하는 동료였다. 각자 서로의 능력을 발휘하여 서로 돕기도 했다. 하지만 케빈이 기사단을 나가고 찰리가 부 기사단장이 된 후로 묘하게 어색해졌다. 물리적으로 온실과 기사단이 거리가 멀기도 한 게 핑계 중 하나였다.
“방금 전에 루퍼스가 기사단을 안내해주겠다고 하던데 역시 훈련 중이라 조금 그렇겠지?”
합법적으로 루퍼스를 떼어내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찰리는 조금 고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함께하지.”
그 말에 놀란 건 케빈뿐만이 아니었다.
“저흰 괜찮습니다. 훈련하느라 바쁘시잖아요. 두 분 다 들어가서 훈련하세요.”
“그래, 형. 아니, 부 기사단장님. 저만 안내하면 되잖아요.”
“둘 다 조용.”
다급하게 첫째를 몰아내기 바쁘던 둘째와 막내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오랜 교육으로 찰리의 말은 잘 듣는 둘이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반사적으로 그의 말에 몸이 굳었다.
“오랜만에 본 친우와 여동생인데 이대로 보낼 수야 없지. 그리고 내 여동생이 왕궁에서 어떻게 근무하는지 상관인 케빈의 의견도 듣고 싶군. 괜찮겠지?”
동의를 구하는 듯했지만 사실 상대방의 의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통보라는 걸 리아와 루퍼스는 잘 알고 있었다. 찰리는 본인이 하겠다고 결정한 일은 반드시 관철해내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해 외골수였고, 나쁘게 말하면 독선적이었다. 케빈 또한 거절할 명분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상한 모임이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