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의외로 가까운
“차 드세요. 진정 효과가 있는 허브티로 준비해봤습니다.”
온실에는 응접실이 따로 없었다. 케빈과 퍼스는 천막 한쪽 테이블에서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케빈의 보조는 리아인지라, 차를 타오는 잡무도 리아가 해야 했다.
“리아 양이 끓여주는 차는 오랜만이네요.”
“제가 끓이는 차를 마실 기회는 흔치 않다고요.”
“두 번이나 그 기회를 얻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원래 이렇게 입바른 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던가. 무뚝뚝한 사람이라고밖에 생각한 적 없던 퍼스가 리아에게는 묘하게 친밀하게 굴었다.
“웬 허브티.”
“싫으시면 맹물로 가져다드리고요.”
“누가 싫댔나.”
괜스레 투덜거리던 케빈은 리아에게 면박을 듣고 말았다. 손님이 있는 앞에서도 상관에게 면박을 주다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케빈은 리아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퍼스의 잔에 허브티를 더 채울 뿐이었다.
“얘기할 동안 나가 있어.”
“아뇨. 그녀도 관계자이니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관계자라는 말에 리아도 깜짝 놀랐다. 무슨 얘기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럼 같이 이야기를 들어야겠군요. 앉아.”
케빈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원형 테이블이었으므로 퍼스의 옆자리이기도 했다. 결국 한 테이블에 세 사람이 마주 보게 되었다. 퍼스는 리아가 따라준 허브티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케빈 님은 리아 양의 상관이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리아 양을 도와줄 수 있으실까요?”
너무 본론만 꺼내서 리아도, 케빈도 퍼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퍼스는 한마디를 더 했다.
“리아 양의 소개 상대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케빈은 지금 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처음 보는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리아는 비로소 퍼스가 하려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퍼스 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케빈 님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제 상관이세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리아 양, 내걸었던 조건을 다시 생각해보세요.”
“제가 내걸었던 조건이요?”
천천히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자신이 스쳐 지나가든 자신의 동선에 있는 사람을 골라달라고 하긴 했다. 심지어 업무시간을 빼서 만나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그 조건으로 치자면 케빈은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업무시간에 만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첫 번째 조건은…!”
“리아 양.”
반박하려는 리아를 퍼스가 저지했다. 그의 눈빛은 아까 인사를 나누던 때와는 달리 사무적이었다.
“제가 보기엔 두 분 사이가 충분히 좋으신 것 같습니다. 현재 이 궁에서 케빈 님만큼 조건에 부합하는 남성이 또 있을까요. 첫 번째 조건에서.”
“아니, 그건 정말 사람으로서!”
최근 케빈이 꽤 다정한 구석도 있다는 걸 깨닫긴 했다.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해지기도 했고. 하지만 엄연히 그는 자신의 상사였다. 상사에게 자신의 소개 상대가 되어달라는 건 너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케빈은 퍼스와 백작의 거래도 모르는 상태였다.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랬다가는 분명히 귀족 여식들은 역시 다르네라는 비꼼이나 들을지도 몰랐다. 이제 겨우 부하로서 조금씩 인정받고 있는 참이었다. 다시금 케빈의 괴롭힘을 받기는 싫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당사자인 제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케빈이 끼어들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로 리아와 퍼스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리아는 말하지 말라는 눈빛을 퍼스에게 보냈지만, 그는 본체만체할 뿐이었다.
“리아 양이 입궁하기 전에 페넬로페 백작님과 제가 계약을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명씩 리아 양에게 미혼 남성을 소개해드리기로요.”
“중매… 같은 겁니까? 보좌관님이요?”
“뭐, 말하자면 그런 셈입니다. 어감이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만.”
어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귀족들의 발상은 서민인 케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리아는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으로 케빈의 기색을 살폈다. 아무래도 자신이 귀족에 대해 반감이 있는 사실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실 리아로 인해, 귀족 여성에 대한 편견이 많이 깨진 상태였다. 특히, 리아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예 그녀가 귀족 여식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렵지 않습니다. 소개 대상이 되어 주신다면 그저 한 달 동안 리아 양과 일부 시간을 함께해주시면 됩니다.”
“그런 얘기는 제발 저랑 상의한 후에 해주시면 안 될까요?”
리아는 퍼스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하지만 퍼스는 못 들은 척 안경만 밀어 올렸다. 케빈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뭐 어렵지는 않은 일이네요.”
“케빈 님!”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케빈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비웃고 넘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가 뭔지, 그는 가볍게 받아들였다.
“매일 보는 사인데 뭐 어때? 거기에 추가로 조금 더 만나면 된다는 거잖아?”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케빈은 ‘매일’을 강조해 말했다. 어깨를 으쓱하는 모양새도 이상했다.
“이게 어떤 의민지 알고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세요?”
“나쁘진 않은 기회잖아. 잘하면 너네 백작가 사위가 될 수도 있는 일인 거고. 그럼 난 출세궤도를 달리는 셈이 되잖아.”
출세궤도라는 말에 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출신과 아버지라는 배경을 이용하는 걸 싫어했다.
“출세엔 관심도 없는 분이.”
그는 유쾌한 듯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사실 그것도 맞았다. 기사단에서 있을 때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게 좋았다. 출세도 하고 싶었고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엔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저 매일 연구에 처박혀서 정치고 뭐고 아무것에도 관련 없이 사는 게 좋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리아가 그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게 우습게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눈앞의 퍼스와 같은 사람이 더 별로였다. 그는 알폰스 왕자의 밑에서 정치 세력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었다. 보좌관이라고 해서 서류 작업만 할 것 같이 생겼지만, 각종 권모술수는 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실 관리인들이 다 붙어 연구하고 있던 사막의 기적을 알지도 못하는 애송이에게 맡긴다는 것부터 수상했다. 이 사람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케빈으로선 이해할 수도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리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든다는 것.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되묻는 퍼스의 표정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제안했을 터인데. 케빈은 그의 표정을 보고 금세 눈치챘다. 이 제안을 직접 하고 있지만, 왠지 내켜 하지 않는다는 거.
“공짜로는 어렵죠.”
“합당하지 않은 거래는 불가합니다.”
“퍼스 님 정도의 위치라면 간단한 조건입니다.”
“말씀해보십시오.”
“온실에 대한 왕자 궁의 간섭을 배제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은.”
“앞으로 신입을 선출할 때는 온실 내 절차에 따라 선임하겠다는 말입니다.”
리아 외의 왕자 궁에서 보내는 사람은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리아는 자신이 능력이 아니라 배경 때문에 뽑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처음부터 케빈이 자신에게 반감을 품을 만도 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희도 온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사는 없었습니다. 리아 양도 왕자 궁으로 옮기는 게 나으실까요?”
“아뇨, 리아는 괜찮습니다. 제 몫은 못 해도 반은 하고 있으니까요.”
리아는 케빈의 제 몫은 못 한다는 말이 불만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내치지는 않는다는 말에 안심했다. 말로는 기회만 되면 내칠 것처럼 굴더니 또 이럴 때 알기 어렵게 칭찬하는 게 케빈다웠다.
퍼스는 다른 부분이 거슬렸다. 단순히 ‘리아’라고 부르는 호칭이. 아무리 상관과 부하의 관계라지만 저렇게 친근하게 이름만 부를 건 또 뭐란 말인가. 티 나지 않게 아주 미세하게 퍼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 찰나를 케빈은 보고 말았다. 친구 사이니 뭐니 하더니. 소꿉장난도 아니고. 얼마 전 리아가 기분이 나빴던 것도 그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케빈은 퍼스가 리아를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뭐 어떻게 하면 되나요? 당장 오늘부터 일 마치고 따로 만나면 되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업무시간은 업무에 집중해주시고, 일주일에 한 번 잠깐 식사 정도만 같이 해주시면 됩니다. 저도 동석하겠습니다.”
“중매 이런 거면 둘이서 따로 먹는 게 낫지 않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닙니다. 제가 백작님께 보고드릴 필요는 있으니까요.”
미묘하게 사이가 나빠 보이는 둘이었다. 리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두 분 뭔가 잊고 계시지 않으신가요?”
두 사람이 동시에 리아를 돌아보았다. 뭐가 문젠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둘 다 이렇게나 둔해서야! 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제 의사는 안 여쭤보시고 이야기를 멋대로 진행하시다니요?”
“아.”
“죄송합니다, 리아 영애.”
퍼스는 빠르게 사과했다. 이미 신임을 잃은 전적이 있는지라 더욱 빨랐다. 혹시나 여기서 더 점수가 깎였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나름대로 리아를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또 자신이 잘못해서 앞서나가 버렸다.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왜 이렇게 안 하던 실수가 잦은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아버님께서 상대 선정을 퍼스 님께 맡기긴 했지만, 애초에 일을 진행하시기 전에 제 의사도 물어보셨어야죠. 애초에 당사자는 저잖아요?”
“예, 다음부터는 꼭 그러겠습니다.”
눈앞에서 퍼스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케빈은 웃음이 났다. 이 사람에게 경멸, 무시 외에 다른 표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사람들 모두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케빈 님도요. 승낙하시기 전에 제가 어떤지는 생각해보셨어요?”
“나까지 뭐라고 하는 거야?”
“이건 개인적인 문제잖아요. 상관이셔서 저를 위해서 희생해주시려는 건 감사하지만 제가 케빈 님 도움을 바라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내가 싫다는 거야?”
아니 또 왜 말이 그렇게. 리아는 싫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 좋다고 하기도 애매해서 입만 벙긋거렸다. 케빈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럼 된 거지.”
“그렇게 간단하게….”
“그럼 잘 부탁해. 앞으로 한 달 동안.”
이야기를 마치며, 케빈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 손을 내려다보며 리아는 고민했다. 퍼스가 내민 조건도 맞았고, 케빈이라면 알폰스 왕자 때처럼 친한 척 가식을 떨 필요도 없었다. 좀 복잡한 상황이긴 했지만.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