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23)화 (23/75)

#23. 그의 진심

능력을 쓸 때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퍼스의 능력은 집중이 필요했다. 그녀의 이마에 손이 닿은 순간, 퍼스의 능력은 저절로 발휘되었다.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녀의 기억이 흘러 들어왔다.

그의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은 깊은 물에 빠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침잠되는 기분이 강해지면, 시야가 저절로 차단되었다. 그리고 마치 직접 겪듯 생생하게 기억이 전달되었다.

처음부터 원하는 정답을 찾을 순 없었다. 가장 처음 보이는 기억은 상대방의 최근 기억 중 가장 강렬했던, 또는 생각했던 기억이었다. 리아의 기억은 후원으로부터 시작했다. 방금까지 후원에 있었으니 당연했다.

- 알 수가 없네.

그녀는 두 사람이 앉아서 식사를 하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원에서는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만 신경 쓰느라 눈치채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니, 아주 잠깐 피었다 져버린 흰 꽃이 보였다.

저 꽃을 보면서 퍼스의 마음도 흔들렸었다. 그녀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 풀렸다. 리아뿐만 아니라 퍼스에게도 의미가 있는 꽃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퍼스와 허물없이 지내던 때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싫은 듯 굴었으면서 내심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니. 역시 퍼스는 리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기억을 봐야 이해가 될 듯했다.

한번 빠져들고 난 이후 다른 기억을 보는 건 손쉬웠다. 거부하려고 해도 끊임없이 밀려들었으니까. 이윽고 그녀의 며칠간 기억을 차례대로 되짚어보게 되었다. 그녀는 밤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매일 힘겨워했다.

억지로 퍼스의 사과를 외면하고 난 뒤, 그가 사라지면 반드시 한 번은 뒤돌아보았다. 핼쑥한 얼굴의 리아를 끌어안은 건 메이였다. 신참이 리아와 친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친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리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 왜 이렇게 울어? 퍼스 그 자식 좋아하기라도 해?

메이의 말이 조금 거슬렸다. 하지만 원래 없는 곳에서는 왕도 욕하는 법이니까. 그는 큰맘 먹고 봐주기로 했다. 그것보단 그녀가 꺼낸 주제가 더 흥미롭기도 했다.

- 그런 건 아니지만요.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알폰스가 알고 싶어하던 정답은 ‘아니오’였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 하지만 퍼스 님은 저를 궁에 들어오게 해주신 분이고, 여러모로 도와주셨는걸요. 저는 진심으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 그 사람 친구가 뭔지도 몰랐다며? 그런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어?

- 메이 말대로 일방적인 생각이었나 봐요. 처음부터 그분에게 저는 그저 거래대상일 뿐이었던 거죠.

다시금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거래로 만난 사이였다. 친구가 되는 것도 합리적인 거래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거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걸까?

- 그래도 저는 믿었어요. 그분과 진심으로 친해졌다고. 알폰스 왕자님에게 보고해야 하는 거였지만, 시시콜콜한 것들을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고. 매일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까요. 어려워할 땐 함께 방법을 생각해주고, 가끔은 제가 푸념하는 것도 들어주셨고요.

- 그 인간에게는 그 모든 게 다 계산이었을 뿐이란 거잖아. 듣기만 해도 화나.

- 그래도 매일같이 사과하러 오시잖아요. 한 번 더 믿어도 되는 걸까요?

- 이유도 모르고 사과하는 사람을? 너도 알잖아. 그 사람 정말로 몰라. 니 기분, 니 감정. 이해도 못 할 게 분명하다고.

메이의 말을 듣는 내내 불쾌했다. 하지만 그녀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 입이 썼다. 의외로 부하가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리아가 퍼스를 용서해야 하나 흔들릴 때마다 그녀를 다잡은 것은 메이였다.

그렇다면 리아가 원하는 것은 대체 뭘까.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것도. 도대체 뭘까. 퍼스는 그 질문의 정답만을 원했다. 다른 기억을 더 보는 것은 리아에게 실례였다.

하지만 원하는 정보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퍼스는 리아와 케빈이 함께 일하는 시간도 봐야만 했다. 그가 없는 시간 동안 케빈과 함께했다는 것도, 그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도 봐야만 했다.

두서없이 전개되는 기억 속에서 드문드문 자신의 모습이 나왔다. 아무래도 리아는 문득, 한 번씩 자신의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자신을 보는 그녀의 마음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 제 친구가 되어 주세요.

- 왕궁에서 산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가 있으면 마음도 놓이고 좋을 듯해서요. 퍼스 님은 이야기도 잘 들어주시고, 함께 있으면 재밌어요.

특이한 사람. 처음에 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퍼스의 감상이었다. 다른 귀족 아가씨들처럼 까탈을 떨지도 않고, 몹시 친근하게 굴었다. 특히 자신과 친해지겠다는 발상이 아주 독특했다. 사람들은 보통 그를 기계나 냉혈한이라고 부르며 멀리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왤까. 그녀가 내민 손은 잡고 싶었다. 흰 장갑 아래로 자신의 본심을 숨겼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개의치 않을 줄 알았다. 그녀와 이야기할 때는 평소의 자신과 다르다는 걸 자각했다. 낯선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거래라는 단어 뒤에 숨어버렸다. 자신은 진심이 아니라고.

- 그럼 퍼스 님은 어떻게 생각해?

- 음, 생각보다 좋은 사람. 좋은 친구요?

자신을 ‘좋은’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적어도 제가 직접 손을 잡아 본심을 확인한 사람 중에는. 아무도. 그제야 깨달았다. 리아가 왜 화가 난 건지. 자신을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처음부터 믿고 있었는데 차근차근 쌓아 올린 그 믿음을 스스로 차버린 셈이었다.

처음부터 널 속이기 위해 접근했다고. 목적이 있었다고. 그녀가 흘린 눈물을 생각하자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 이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자신도 리아처럼 함께했던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 짧은 시간이었지만 리아의 감정을 확실히 느끼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시야가 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리아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직접 보고 들은 것 외에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눈앞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 그녀와 함께 있을 핑계를 만들어냈다.

“아, 죄송합니다. 아직 열은 없네요.”

이제, 퍼스가 진심을 전할 차례였다.

***

한동안 정신이 없어서 사막의 기적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리아는 반성하며, 오후 업무 시간은 사막의 기적 조사에 매진하기로 했다. 케빈이 또 천막에 불러놓고 책상 정리조차 하지 못하게 한 탓이었다. 그는 혼자서 일하는 건 잘해도 부하에게 일을 지시하는 건 젬병인 듯했다. 이런 상관 아래에서는 알아서 잘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선배 직원 하나가 넌지시 조언해줬다.

리아는 알아서 케빈의 연구 자료를 정리했다. 케빈은 필요한 자료가 있을 때마다 ‘여기 어디 있었는데’ 하며 온 책상을 뒤지고 다녔다. 하여간 책상 치우는 걸 허락해달라고 할 때 진작 맡길 것이지. 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넘겨받은 자료를 분류해 그가 찾기 쉽게 표찰을 달았다.

“제 덕분에 일이 훨씬 빨라지셨죠?”

“원래도 네가 일에 익숙해지면 시키려고 했어.”

“저 삼 개월짜린데 삼 개월 다 지나면 그때서나 시키시겠어요. 이러다가.”

처음 케빈이 그녀를 두고 ‘삼 개월짜리’라고 말했던 걸 비꼬는 말이었다. 머쓱해진 케빈은 눈앞의 연구자료를 한 움큼 쥐어 리아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정리나 해.”

“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그녀는 꼭 이렇게 케빈을 할 말 없게 만들었다. 도대체 귀족 여식이라는 애가 이렇게 비꼬기를 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조수로서도 토 달 필요 없이 훌륭했다. 덕분에 원래 여러 부서를 전전하려던 계획에서 벗어나 일찌감치 그의 보조가 된 그녀였다. 온실 직원들도 까다로운 케빈을 다룰 사람이 나타났다며 은근 좋아하고 있었다.

“사막의 기적은 잘 살리고 있어?”

“일단 물을 주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드문드문 주고 있는데요, 파릇파릇하지는 않은데 상태가 좋다고도 하기 어려운 상태예요.”

물 양은 일단 한 달에 한 번 꼴로 주는 게 정답인 듯했다. 너무 많이 줘서 시드는 기색도 보였지만, 물이 마르니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나아졌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일 뿐, 건강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잎끝이 마르기 시작하면 끝이었다. 빨리 방법을 생각해내고 싶은데 잘 떠오르지 않아 초조했다. 업무가 끝나면 다시금 도서관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막에 가본다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식물이 자라는 데 물이라는 요소가 제일 크긴 하지. 하지만 잘 생각해봐. 우리가 상대하는 식물은 물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이야. 그럼 물 외에 다른 요소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겠어?”

케빈이 나지막이 조언했다. 정확한 답은 아니었지만, 여태껏 기존 연구자들과 다를 바 없이 물 양에 관해서만 고민했던 리아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조언이었다. 그제야 리아는 다른 조건도 시험해볼 용기가 났다. 그동안은 자신이 맡은 한 뿌리가 죽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소극적으로 관찰하는 데 집중했다. 이제는 승부를 걸 때였다.

“감사합니다, 케빈 님.”

“뭘. 이 정도는 당연한 건데.”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케빈의 귀 끝이 빨개졌다. 그 점을 놓치지 않은 리아가 놀리기 시작했다.

“의외로 좋은 말도 하실 줄 아시네요?”

호호홋. 리아는 일부러 케빈이 싫어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입을 가리고 귀족 영애처럼 웃을 때마다 케빈이 질색하는 얼굴을 하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만족한 리아는 다시금 소리 내 웃었다. 쑥스러워하는 케빈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사이가 좋으시네요.”

기척도 없이 천막의 문을 걷고 나타난 것은 퍼스였다.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케빈은 순간적으로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반면, 리아는 활짝 웃었다.

“퍼스 님!”

리아의 태도에 케빈은 깜짝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때문에 우울해하던 리아였는데, 전처럼 다시 살가운 태도라니. 그사이 무슨 일이 있던 게 분명했다. 리아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괜스레 화가 났다.

“보좌관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자연히 말투도 퉁명스러워졌다. 퍼스 또한 그의 태도를 눈치챘지만, 평소에도 퉁명스러웠던 터라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퍼스는 천막 안으로 걸어와 리아와 눈인사를 했다. 서로 미소를 지으며 마주 보는 게 영 마뜩잖았다.

“어쩐 일이시냐니까요?”

“케빈 님께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따로 시간 내줄 수 있으실까요?”

그는 안경을 긴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리아를 보던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케빈을 보는 표정은 사무적이었다. 그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용건인지 몰라도 바쁘신 분이 직접 올 정도면 대단히 중요한 용건인가 봅니다. 말씀하시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