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열만 잴게요
이마에 맞닿은 손바닥 겉표면은 젖어 차가웠지만, 이윽고 열기를 내뿜었다. 온기가 와서 닿자, 거짓말처럼 리아의 화가 풀렸다.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특히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자 더 그랬다. 천천히 깜빡이는 눈 사이로 그의 긴 속눈썹이 보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리아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퍼, 퍼스 님…?”
이마에 손이 올라간 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퍼스는 손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아가 조심스레 그를 부르자,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천천히 손을 뗐다.
“아, 죄송합니다. 아직 열은 없네요.”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리아의 양 볼에 열이 올랐다. 부끄러움에 리아는 시선을 피했다. 후원의 비는 한참을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비를 두 사람 모두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대로면 정말로 감기에 걸리십니다.”
“하지만 이 후원을 가로지르지 않으면 기숙사로 가기 어려워서요. 젖은 채로 왕자 궁을 통해 지나갈 수도 없고요.”
“그럼 잠시 제 집무실에 들르시겠습니까? 닦을 거라도 드리겠습니다.”
퍼스의 집무실이라면 들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버지인 페넬로페 백작과 함께였다. 지금은 혼자였고. 그와 단둘이 집무실에 들어간다면 안 그래도 두 사람 소문에 목마른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지 몰랐다.
“소문이 신경 쓰이십니까?”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는데 퍼스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어차피 소문이 어떻게 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던데요.”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어조와 다르게 까칠한 말투였다. 마치 리아가 소문을 신경 쓰지 않는 게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하긴 최근의 소문을 생각해보면 그가 기분이 나쁠 만도 했다. 퍼스가 리아에게 차이고 미련이 남아 그녀를 따라다닌다는 얘기였으니까.
“퍼스 님도 신경 안 쓰시잖아요.”
리아는 새침하게 대답한 후, 먼저 그의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어쩌면 리아가 집무실로 가게 하기 위해 퍼스가 일부러 말을 꺼낸 걸지도 몰랐다. 알면서도 이미 내디딘 걸음을 무를 수가 없었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집무실 안은 실내여서인지 바깥보다 좀 더 따뜻했다.
“깨끗한 겁니다.”
책상 뒤로 간 퍼스가 천을 꺼냈다. 깨끗한 흰색 천이었다. 그가 내미는 게 더러울 거라곤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천을 받아든 리아는 머리카락부터 닦았다. 옷에서 물이 떨어져서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퍼스가 옷을 닦다 말고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옷이 젖어서….”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퍼스는 천 하나를 더 꺼내 의자 위에 깔았다. 그러곤 자신의 몸을 닦던 수건도 다른 의자에 깔고 앉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몸만 닦고 나가려던 리아도 별수 없이 퍼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참을 서로 물을 닦는 소리만이 났다. 리아는 이 침묵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얼마 전까지 직접 피해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후원에서 마주친 것도 모자라, 이렇게 단둘이 집무실에 앉아있는 것도 불편했다.
“후원에서 정기적으로 물을 줄 때 비를 내리는 능력자의 힘을 빌립니다. 원래는 후원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진행하는데 이번에는 놓친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왜 퍼스 님께서 사과하세요?”
“왕자 궁 대부분의 관리는 제가 하고 있으니까요.”
남의 실수도 사과할 줄 아는 게 의외였다. 상관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리아 양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또 사과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동안 리아에게 와서 했던, 사과를 위한 사과가 아니었다.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리아 양이 왜 기분이 상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얻었습니다. 리아 양은 제게 배신감을 느꼈던 거라고. 맞나요?”
정확했다. 마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하지만 리아는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고 지그시 퍼스를 응시했다. 그는 자신의 추론에 확신이 있었다. 누군가 제 마음속에 대해 직접 가르쳐준 듯했다.
“저도, 저도 리아 양과 지냈던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일이고 거래라는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그 시간이 오기만 기다릴 때도 있었죠. 사실 친구가 있었던 적이 없어서 이런 감정이 무언지 처음 알았습니다.”
정확히 리아가 듣고 싶었던 말을 그가 꺼내고 있었다. 점점 리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마음이… 많이 아프셨죠. 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사과만 해서. 그동안 저희 둘 사이에 있던 시간이 다 거짓말 같았을 거고요.”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으면서, 퍼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조용히 퍼스를 응시하기만 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 이 말을 하기 위해 리아를 집무실로 데리고 온 듯했다. 그는 진심을 담아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장갑이 젖어 여전히 맨손인 상태였다. 수건에 닦아 물기가 없어진 손을 그녀에게로 뻗었다. 손이 닿기 직전, 퍼스는 잠시 주저했다.
리아는 사람과의 접촉을 꺼렸던 그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진심일지도 몰랐다.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리아로서는 그를 다시 믿어도 될지 불안했다. 한번 겪고 보니, 그를 다시 믿는 게 두려워졌다.
퍼스 또한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손을 더 뻗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맞게 말한 건지 슬쩍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아무런 말 없이 시간이 또 흘렀다. 리아는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억지로 입을 열었다.
“또 퍼스 님의 말을 믿었다 속으면 이제 제가 정말 크게 상처 입을 거 같아요.”
“진심입니다.”
“마음은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믿어요.”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증명합니까?”
이 와중에도 그는 한마디도 지려 들질 않았다. 리아가 노려보자, 입을 다물긴 했지만.
“좋아요, 그럼. 두 번째 사람은 꼭 제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해주세요.”
“원래도 리아 양의 취향에 최대한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알폰스 님처럼 따로 만날 일은 없게 해주세요.”
“그렇지만 그건 백작님께서 내건 조건에 부합하지 않습니다만.”
“스쳐 지나가든! 제가 가는 동선에 있는 사람이든 제 업무시간을 빼서 만나야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일해서 제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하거든요.”
누구 덕분에. 뒷말은 삼켰지만 퍼스는 이미 알아들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를 용서해주시는 건가요?”
“제가 퍼스 님을 용서를 하고 말고 할 사람인가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입니다. 리아 양에게 미움받는 건 생각보다… 힘들어요.”
퍼스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만큼은 왠지 진짜 같아 보였다.
“이제 비는 다 그쳤을 겁니다. 이걸 좀 걸치시죠. 기숙사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은데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조금이라도 리아 양에게 잃어버린 점수를 딸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는 여벌로 준비해둔 망토를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어느새 퍼스는 다시 흰 장갑을 낀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제야 젖은 옷을 입은 상태로 오래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퍼스 님도 옷 갈아입으셔야죠. 젖은 옷 입고 계시면 감기 걸리실 텐데.”
“지금 저 친구로서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같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거예요.”
이상하게 솔직하게 사과한 이후로 퍼스가 조금 능글맞아진 것 같았다.
“알폰스 왕자님 닮아가세요?”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솔직하게 말했더니, 퍼스는 정색했다. 그는 상관인 알폰스를 위해 리아의 친구도 되고, 안 좋은 소문까지 듣고, 자존심을 구기며 사과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싫어하는 게 우스웠다.
“그런 분을 소개해준 건 누군데요.”
이제 그 한 달도 다 되어 알폰스는 후보군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본인은 후보에 오른 사실도, 제외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다 눈앞의 이 사람, 퍼스 베르시에 때문에.
“효율적인 첫 만남을 위해서였죠.”
비록 사과는 받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기숙사로 오는 내내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았다. 리아의 몸은 몹시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해졌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게 단순히 퍼스와 보내는 이 시간이었단 것을 그는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지라도 않는 이상.
***
믿을 만한 첩보원은 진작 곳곳에 심어두었다. 덕분에 리아의 동향을 파악하는 건 쉬웠다. 그녀에게 사과하러 갈 때도 유용하게 써먹었다. 눈치가 빠른 케빈과 눈이 자주 마주치는 게 불쾌했지만. 이제 마지막일 터였다. 온실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리아의 움직임만 파악하면 됐다.
그녀의 움직임은 거의 실시간으로 퍼스에게 보고되었다. 심지어 온실 내에서 이동 중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알면 또다시 기함할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계속 이해시켰다. 매번 그렇게 리아의 식사 시간, 휴식 시간에 맞춰 가서 사과했다.
어떠한 소문이 나든 상관없었다. 이 또한 계획에 포함되는 일이었으니까. 결전의 날. 그는 일부러 리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일같이 오던 사람이 오지 않으면 신경 쓰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리아가 진심으로 퍼스가 싫어서 피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신경이 쓰이고 쓰인 그녀가 갈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후원에 물 주셨나요?”
퍼스는 일부러 후원 관리 담당자를 찾아가, 따지듯 물었다. 그는 평소에는 정원 관리 일을 하다가, 이 주에 한 번 물을 주는 날에는 능력을 사용해 비를 내리게 했다. 어차피 오늘이 후원에 물을 주는 날이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다가 갑자기 와서 자신을 들볶는 상사를 담당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점심 먹고 주려고 합니다만.”
“그거 말입니다만. 저녁 이후에 주시죠.”
“네? 왜….”
왜냐고 물으려던 그는 험악한 퍼스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퍼스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퇴근 이후니 초과수당은 지급하겠습니다.”
“네, 저녁 이후에 주겠습니다.”
“제가 후원에 사람이 없도록 해놓을 테니 저녁 드시고 바로 지체없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언지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업무상 중요한 일인 듯했다. 담당자는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산 관리 담당자인 퍼스를 거슬러봤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알겠습니다, 퍼스 님.”
준비는 완벽했다. 퍼스는 돌아서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누군가 봤다면 기분 나쁘다고 할 만한 웃음이었다. 그는 집무실에서 쌓인 일을 처리하면서도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마음에 걸리는 찝찝한 일은 해결하고 보는 게 맞았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다시 저와 눈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저녁 시간이 무척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