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시놉시스는 훌륭한데
어떤 일에 필사적이라는 것은 가끔 고집과 오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리아는 최근 필사적으로 퍼스를 피하고 있었다. 그에게 차갑게 대할 때마다 오히려 자신이 괴로웠다. 그가 사과하려는 걸 알 때마다 더욱 그랬다.
퍼스를 무시하라고 조언해준 건 메이였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피해야만 했지만, 이제 고집과 오기로 버티는 게 되었다.
사과하러 올 때마다, 퍼스는 진심으로 뭐가 미안한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점점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퍼스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확고해졌다.
“표정.”
“네?”
갑작스레 머릿속 상념을 깨는 케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오아시스 구역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나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곰팡이 같은 게 피어난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현장조사를 나온 참이었다.
리아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는 항상 그렇듯 찡그린 얼굴로 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리아의 미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요즘 왜 그렇게 미간에 주름을 새기고 다녀? 그 나이부터 주름 생기고 싶어?”
“숙녀에게 주름 얘기는 하면 안 되는 거 모르세요?”
“그러니까 인상 펴고 다니란 말이야.”
제 미간을 매만지며 리아는 살포시 웃었다. 케빈의 친절은 정말이지 알기 힘들었다. 요즘 걱정거리 있느냐, 무슨 일 있느냐고 솔직히 물어보면 될 것을 가지고. 괜스레 표정 지적이나 하고.
하지만 요즘 사막의 기적 연구나 일을 함께하면서 그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까칠하고 괴상한 성격과는 달리 그는 일에는 철저했다. 식물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고. 가끔은 식사도 잊고 일에 열중해서 리아가 배달해주는 일도 허다했다. 성격은 괴팍했지만, 일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배울 게 많은 상사였다.
“퍼스 님 때문이야?”
그는 커다란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물었다. 리아는 대답 대신 그의 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주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물이 들거나 더럽혀지지는 않는 옷이었지만. 그는 가만히 그녀가 하는 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오아시스 지역에 있는 식물들이 의외로 자주 문제가 생기네요.”
“뭐 물이 적어도 문제지만 물이 너무 많거나 해도 문제니까.”
그녀는 노골적으로 말을 돌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케빈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퍼스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고 싶어하지 않는 걸. 알폰스 왕자와 식사를 한다고 다녀온 이후, 그녀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잠시 틈이 생기면 퍼스가 온실 근처를 기웃대는 모습이 보였다. 리아의 휴식 시간을 귀신같이 알고 오는 걸 보면 온실 내부에 정보원이라도 심어둔 게 분명했다. 하여간 케빈은 퍼스의 그런 점을 싫어했다. 항상 모든 것을 알려 하고, 머리로만 생각하는 점.
퍼스와 리아가 사귄다는 소문에 이어, 이제는 두 사람이 헤어졌고, 퍼스가 매달리는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케빈은 두 사람에 관한 소문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온실 내에서 얘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모를 수도 없었다.
당사자인 리아는 소문이 들리는지 마는지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전보다 더 일에 매달리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가끔 보이던 웃는 모습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물론 케빈 앞에서 자주 보여주는 모습은 아니었다. 뭔가 고민하는 듯한 그녀가 왠지 케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케빈 님,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해결된 건 아니니까. 일단 원인을 알아보고 오도록 하지. 그간 나무에 따로 물을 주거나 했나?”
“아니오. 정기적으로 비를 내리는 것 외엔 없었습니다.”
“그럼 일단 주변 나무들도 같은 증상을 보이나 확인해봐. 추가로 발견될 시 연락하고.”
“네.”
오아시스 지역 담당 관리자는 허리를 숙여 케빈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는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관리자도 머쓱해하지도 않고 돌아섰다. 다만 그의 시선이 잠시 리아에게 머물렀다. 그 시선에 약간의 호기심이 섞인 것도 눈치챘지만, 리아는 애써 무시했다.
퍼스와 저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눈치챘다. 심지어 제가 퍼스를 차버려서 그가 매달리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직원들도 진위에 관해 제게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바로 옆에 케빈이 있는지라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원래 부서별로 돌아가서 근무해야 하는 일정이었는데, 최근 케빈이 연구할 거리가 많아 보조가 필요하다면서 리아를 천막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리아에게 물어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호기심을 키울 뿐이었다.
천막으로 돌아가는 케빈의 발걸음은 무척 빨랐다. 키가 머리 하나 이상 차이 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항상 그렇게 빨리 걸었다. 리아는 케빈을 따라가느라 필사적으로 발을 뻗었다.
오아시스 구역을 벗어나자 푹푹 꺼지는 모래 지역이었다. 리아의 걸음이 뒤처지기 시작했다. 한 달 가까이 오가는 길이어서 익숙해졌지만 케빈의 걸음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랬지?”
걷다 보니 문득 배고파진 케빈이 물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힘겹게 걸어오고 있는 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에 빠져 걸음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걸 잊어버렸다. 케빈은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열심히 걸어오는 리아의 모습을 보았다.
“하여간 뭐든 열심히 한다니까.”
안 그래도 작은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녀가 일개미처럼 보였다. 곱게 자란 귀족 주제에 저렇게까지 열심일 필요는 뭐란 말인가. 도대체 뭐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단 말인가.
멍하니 그녀의 모습이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케빈은 자신의 안에 있는 궁금증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게 올수록 제 안의 무언가가 차오른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기다려주신 거예요? 다 와가니 이제 출발하셔도 돼요!”
“한 발만 더 가까이 와.”
“네? 왜요?”
물어보면서도 리아는 한 발 더 내디뎠다. 케빈과 그녀의 거리가 비로소 팔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가 되었다.
“딱 그 정도에서 따라와. 뒤처지지 말고.”
케빈은 먼저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리아도 이내 따라갔다. 이번에는 그를 따라 걷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가 걷는 속도를 맞춰준 탓이었다.
“하여간 알기 어렵다니까.”
“뭐라고?”
“그냥 혼잣말입니다.”
***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선 리아는 입구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일같이 서서 리아를 기다리던 퍼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그녀에게 사과하는 걸 포기하는 듯했다. 기다릴 때는 일부러 무시하기 힘들더니, 없으니 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포기도 빠르셔라.”
비꼬는 듯 한마디 내뱉은 후, 망설임 없이 기숙사로 향했다. 리아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내내, 툴툴거리듯이 퍼스의 험담을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 자꾸만 서운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에게 서운해하는 자신도 이상했다.
분명 기숙사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발걸음을 멈추고 보니 어느덧 후원 한가운데였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 퍼스와 식사를 하던 곳이 보였다. 왜 갑자기 여기로 왔는지, 스스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더 이상한 것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한때 두 사람이 식사를 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처음 함께 식사를 하면서 리아가 피웠던 꽃은 이미 저버렸다. 바닥에 남은 꽃잎으로 흔적만 확인할 수 있었다. 흰색 꽃은 밟히고 짓물러 갈색으로 바래졌다. 처음에 정갈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은 모두 꿈이라는 듯이.
리아의 능력에는 그녀만이 아는 비밀이 있었다. 식물을 키우는 것에 그녀의 감정이 많이 반영되었다. 그녀가 기뻐하고 있을 때는 꽃을 피울 수 없는 식물에서도 하나둘씩 꽃이 피어났다. 그때도 분명 저도 모르게 감정이 들어간 게 분명했다. 기쁘고, 설레서.
“알 수가 없네.”
곧 해가 지려고 해서 후원에 노을이 졌다.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았지만, 노을이 진 후원은 아름다웠다. 리아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려, 항상 퍼스와 앉았던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어차피 옷은 더러워지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바닥에 댄 양 손바닥이 차가웠다. 후원에 물을 준 지 좀 됐는지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흙이 말라 있었다.
“슬슬 물을 줘야 할 거 같은데.”
툭. 마치 리아의 말을 들은 것처럼, 하늘에서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비인가…?”
미처 피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물방울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러더니 방금까지 맑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흐려졌다. 그것도 후원 바로 위만. 능력자가 일부러 내리게 하는 비가 분명했다.
“피해요!”
리아가 이제 막 피해야겠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녀를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팔이 붙잡힌 채로 정신없이 뛰어야만 했다.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비는 금세 소나기로 바뀌어 있었다. 빗길이 워낙 거세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따라가야만 했다. 왕자 궁 복도에 들어서서야 앞을 볼 수 있었다. 얼굴에 맺힌 빗물을 닦아내자,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졌다. 잠깐 사이에 어찌나 많은 비를 맞았는지 온몸이 젖어 있었다. 옷은 더럽혀지지는 않지만, 물에 젖지 않는 건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리아는 그제야 제 팔을 붙잡고 달린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방금까지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퍼스였다. 긴 머리부터 의복이 모두 젖어 있었다. 그는 안경에 묻은 물을 털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리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네, 전 괜찮아요. 퍼스 님도 다 젖으셨어요.”
그제야 퍼스가 제 몸을 살폈다. 잠깐이었지만 워낙 비가 많이 내린 터라 흠뻑 젖어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탁자에 앉아 서류 작업만 할 줄 알았던 그는 생각보다 몸이 단단해 보였다. 저도 모르게 그의 몸을 보던 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대강 자신의 옷에 묻은 물을 털었다. 그러곤 안경에 묻은 물을 닦을 곳이 없어서 대충 툭툭 털어냈다. 그를 따라 리아도 옷을 털었다. 아무래도 기숙사까지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 할 모양이었다. 젖은 몸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았다.
“추워요?”
물음과 함께 눈앞에 퍼스의 손이 다가왔다. 리아는 그의 손을 반사적으로 피했다.
“잠깐… 열이 있는지만 재려고요.”
어느새 젖은 장갑을 벗어 맨손을 드러낸 퍼스였다. 원래 사람에 닿기 싫어하는 사람이 손으로 열을 재 준다는 게 낯설었다. 리아가 피하자, 물기 어린 안경 너머로 언뜻 상처 입은 표정이 보였다. 그가 상처 입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스쳐 간 표정이 마음에 걸려 리아는 다시 뻗은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