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좋아하는 타입
왜 화가 났냐고? 리아는 퍼스의 물음에 오히려 더 화가 났다. 지금껏 열심히 화낸 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듯했다. 리아는 팩하니 돌아섰다. 긴 머리카락이 지나치게 빠르게 돌아 그녀의 뺨을 때렸다. 퍼스는 잽싸게도 몸을 뒤로 물려 머리카락에 맞지 않았다.
“설명드려봐야 소용없을 것 같은데요.”
그녀는 이전, 메이가 했던 말에 공감했다. 퍼스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냉혈한이 분명했다. 지금껏 그녀가 설명한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화가 나 따지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감정 소모라 판단했다.
그에게는 백작이 한 말처럼 그녀가 궁에 있는 건 이득일 뿐이라 결론 내렸을 게 분명했다. 손익을 따지자면 물론 맞기도 했다. 누구의 힘을 이용하든, 리아는 궁에서 일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리아의 감정은 어찌할 수 없게 상처받았다. 자신의 힘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신을 속인 걸 사과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어차피 너의 능력은 아닌 것이니, 네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용해 승진까지 시켜주겠다면서 자신을 우롱했다.
그녀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더해서 친구라고 믿었던 퍼스가 사실은 제 편이 아니었다는 것도 상처였다. 하지만 구구절절 얘기해봤자 그가 진심으로 이해해줄 확률은 낮았다. 그렇다면 굳이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녀의 시간과 체력을 희생해야 할까. 답은 ‘아니오’였다.
“리아 양.”
뒤에서 퍼스가 불렀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때 저 사람을 진심으로 친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바보였다. 그에게는 철저히 업무였고, 거래였다. 그런 사람이란 걸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상처받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엔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제어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제 능력이 한탄스러웠다. 그 주제에 자존심만 강해서 알폰스의 제안을 찬 자신도 우스웠다. 과연 큰소리친 것처럼 순전히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불안함에 눈앞이 깜깜했다.
“혼자서 사막의 기적을 살려낼 수 있을까?”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당당하게 사막의 기적을 살리고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몹시 자신이 없어졌다. 그저 식물을 키우는 능력밖에 없는 게 맞았다면?
심지어 그 능력은 사막의 기적에게는 통하지도 않았다. 제어력도 현저히 낮았고. 그 능력을 제외하고 정말 아무런 능력이 없는 거라면? 자신은 과연 궁에 남아 있을 자격이 있을까?
리아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최대한 어두운 곳을 찾았다. 아무도 오지 않고, 캄캄한 곳에 몸을 숨기고 마음껏 울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해가 다 진 건 아닌 터라, 곳곳이 밝았다.
후원으로 숨고 싶었지만 혹여 퍼스가 찾아올까 봐 근처로 가지도 못했다. 한동안 퍼스는 후원을 찾지 않았는데도, 마주칠까 걱정스러웠다.
결국 한없이 약해진 자신을 숨기려, 향한 곳은 기숙사였다. 다행히 입구를 지키는 사감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리아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신의 방 이불 속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흐으으….”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도 제대로 모르고, 서러웠다. 이제 겨우 한 달. 궁에서 일하는 것은 리아가 꿈꾸던 것만큼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귀족인 리아를 배척했고, 믿었던 사람은 리아를 배신했다.
완벽하게 혼자라고 생각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안 그래도 조금씩 흐르던 눈물이 이제 시야가 뿌옇게 될 정도로 계속해서 나왔다.
꽉 다문 잇새로 자꾸만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숙사 방음이 잘 되지 않아서, 이대로 조금만 우는 소리가 나도 옆방에 들릴 터였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리아는 이불 속으로 더 깊게 고개를 파묻고 몸을 웅크렸다.
똑똑.
“리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리아는 흐느낌을 멈췄다. 문 앞에 서 있다면 리아의 소리가 들릴지도 몰랐다.
“리아, 안에 있어?”
목소리의 주인은 메이였다. 리아는 재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그러곤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메이에게 울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기다려주세요.”
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 방은 어느새 깜깜해졌다. 이불 속에만 숨어 있느라 등불을 켜지 못한 그녀는 서둘러 불을 켰다. 어두운 방 안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메이가 빠르게 알아챌 것 같았다. 그녀의 눈치는 상당했으니까.
문을 열자, 예상대로 걱정하고 있는 메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리아를 보자마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누구야?”
“네? 무슨 말씀이신지….”
“너 방금까지 울고 있던 거 다 티 나. 누구야? 누가 이랬어? 케빈이야, 또?”
항상 메이는 부모님처럼 제게 따듯했다. 오늘 하루가 길었던 터라 그녀를 보니 더욱 서러워졌다. 그녀를 보자 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메이.”
그녀는 문을 닫고 리아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리아를 침대 구석에 앉히고 끌어안았다. 천천히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자, 리아에게서 조금씩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메이를 만난 건 정말 다행이었다. 진짜 친구는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너무 멀리서 찾은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리아는 메이에게 안겨 있었다.
한참이 지나, 리아의 울음이 좀 잦아들었다. 말없이 등을 토닥이던 메이는 그제야 말을 꺼냈다.
“누군지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뭐가 누구예요.”
“널 울린 사람이 누구냐고!”
그녀는 리아 대신 분노하고 있었다. 대신 화가 난 메이를 보자 오히려 리아의 기분이 풀렸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지 마. 내가 웃겨?”
“웃긴걸요.”
“뭐야? 웃기게 생겼다는 거야?”
메이의 농담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웃음이 터졌다. 리아는 결국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메이에게 털어놓았다. 항상 이렇게 메이에게는 모든 것을 말했다.
“내가 퍼스 님은 냉혈한이라고 했잖아!”
“그래도 아예 나쁜 분은 아니시잖아요.”
“뭘 감싸! 널 울렸으면 이미 나쁜 거야.”
“그분은 아마 제가 상처받을 거란 생각을 못 하셨을 거예요.”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니까. 정말 어딘가 모자란 거 아니야, 그 사람?”
“그분이 메이 상관인데 그렇게 말해도 돼요?”
“그 사람이 내 상관이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야기를 모두 들은 메이는 리아와 똑같이 분노해주었다. 그 사실 하나가 리아를 행복하게 했다. 궁에 적어도 한 사람은 믿을 사람이 있었구나. 리아는 비로소 안심하며 잠이 들 수 있었다.
***
퍼스는 고뇌했다. 리아는 도무지 그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벌써 며칠, 틈만 나면 찾아가 그녀에게 사과하려 했다. 시간이 황금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투자인지 그녀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죄송합니다, 리아 양.’
‘뭐가 죄송한지는 알고 사과하시는 게 맞고요?’
‘압니다. 제가 리아 양이 입궁하게 된 계기에 대해 좀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서 화나신 것 아닙니까?’
리아는 대답 대신 퍼스를 흘겨보았다.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니 그는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제가 업무 중이어서요.’
뭘 잘못했는지 분명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알 수가 없었다. 정답을 알 수 없는 모호함을 그는 제일 싫어했다. 제발 이유가 맞는지 아닌지라도 말해 주고 갔으면 했다. 하지만 업무 중이라는 말에 더 이상 그녀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제발 이유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영애.’
‘말씀드렸잖아요. 말해도 이해 못 하실 거라고요.’
대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이유라는 게 뭔지. 이쯤 되면 이유가 있긴 한 건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저 리아의 기분이 상했고, 그걸 자신에게 푸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리아의 심기가 틀어질까 봐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방법은 하나, 열심히 사과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서류 종이를 한 장씩 넘겨 사인하면서도, 퍼스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리아가 사과를 받아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파스락 파스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집무실 안에 가득했다.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궁에 리아가 들어온 것은 퍼스 혼자만의 생각은 절대 아니었다. 알폰스도 분명 동의한 건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퍼스만을 원망하고 있었다. 물론, 이 아이디어 자체가 퍼스로부터 비롯된 것이긴 했다.
알폰스는 새로운 지지세력을 원하고 있었다. 기존 왕이 가지고 있던 세력이 아닌 제3의 세력. 그게 바로 페넬로페 백작이었고, 백작을 끌어들이는 핑계로 그녀의 막내딸을 선택했다. 마침 그녀가 능력은 있으나, 제어력이 떨어져 입궁이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자연히 퍼스의 머리에서는 리아를 섭외할 계획이 설립되었다.
입궁을 원하는 자에게 입궁할 기회를 준다. 그녀의 아버지인 백작의 거래 조건도 들어주어 환심을 산다. 그녀를 통해 백작과 친해져 왕자는 세력을 얻는다. 그의 계산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거래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의 변수, 리아의 마음만 빼면.
쾅. 리아를 떠올리자, 갑작스럽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쌓여 있던 서류 중 일부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책상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사과도 하고, 설명도 했다. 리아가 자신에게 화를 낼 이유를 퍼스 혼자서는 떠올릴 수 없었다. 별수 없이 퍼스는 자신 나름대로 사과를 전달하기로 했다.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니까.
“딱 한 번만 볼까.”
퍼스는 차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항상 흰 면장갑을 차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맨손은 누구도 볼 수 없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능력은 사이코메트리였다. 손에 직접 닿으면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에게 아낌없이 정보를 전해주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흰 장갑은 수많은 정보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 되었다. 그의 초능력은 가족과 몇 명 외엔 아무도 몰랐다. 정신계 초능력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국가의 철저한 관리를 받는다. 따라서, 주변인들은 정신계 능력자라는 사실만 알 뿐, 정확하게 당사자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알폰스는 그의 능력을 안 후, 어릴 적부터 그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낙점했다. 그리고 베르시에 가문은 기꺼이 그를 왕자에게 바쳤다. 덕분에 퍼스는 아주 어릴 때, 입궁할 수 있었다. 그렇게 퍼스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셈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능력을 싫어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게 그에게는 저주에 가까웠다. 가족들은 모두 그를 기피했다. 닿는 순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알려야만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또한 부모님이 각자 외도 중이라는 사실을 본의 아니게 알게 되었다.
능력을 쓰는 사람과 사용하는 대상 모두에게 상처만 주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 능력을 이용하면 금세 그녀의 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왜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또 그녀의 진짜 타입은 무엇인지. 업무적인 이유가 아니면 되도록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딱 한 번만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한 번에 모든 걸 알아내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