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첫 번째 평가
“아버님.”
“오셨습니까, 백작님.”
두 사람의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리아의 아버지, 페넬로페 백작이었다. 입궁을 위해서 정복을 입은 상태였다. 그는 정복이 불편한 듯 목 부근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인상을 쓴 표정이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을 부각시켰다.
“어쩐 일이세요?”
“왕궁에서 일 좀 했다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잊어버린 거냐? 정기 회의가 있어 입궁했다.”
그러고 보니, 백작은 월에 한 번 회의를 위해 입궁하곤 했다. 그저 외출을 하시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해서 많이 신경 쓰지 않았다.
“궁 생활은 어떠냐?”
백작은 리아를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그의 눈빛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당장에라도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다. 특히 사람. 사람들이 저를 괴롭게 한다고. 특히 눈앞에 있는 사람이.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당장에 끌려갈 판이었다.
“당연히 좋죠.”
“아까 분위기를 보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
“그저 약간 퍼스 님과 의견 차이가 있었을 뿐이에요.”
당장 동의하라는 듯, 리아는 퍼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도 리아의 문제가 크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원해서 말을 맞춰줘도, 리아에게서 잠시 원망스러운 시선이 묻어났다. 백작은 노련했다. 두 사람의 이상한 분위기를 금세 눈치채곤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리아가 숨기고 싶다면 더 캐물을 의사는 없었다.
“그럼 회의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거래 내용이나 확인해보는 게 어떻겠나?”
“알겠습니다. 제 집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
퍼스의 집무실은 왕자의 집무실 근처였다. 리아는 왕자의 집무실에는 간 적 있어도, 퍼스의 집무실은 처음 가는 것이었다. 그곳은 왕자의 집무실과는 다르게 넓지 않았다. 화려한 장식도 없었다. 대신 실용성만을 강조한 책상과 의자가 한가운데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엄청난 양의 서류가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다행히도 구석에 손님을 위한 소파도 있기는 했다. 이 역시 화려한 장식이 없는 소파였다. 집무실 전체에서 퍼스의 성격이 묻어났다.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부탁하네.”
썰렁한 실내에도 다행히 다과는 준비되어 있었다. 알폰스의 집무실과 다른 점은 다과도 차도 퍼스가 직접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퍼스가 차를 내리는 동안, 백작과 리아는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눴다.
“좋다는 말은 거짓말인 거 다 안다. 생각만큼 잘 안 되겠지.”
“직접 보지도 않고 짐작하지 마세요. 정말 좋은 거 맞으니까.”
“그럴 리가.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구나.”
그의 말을 들으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백작은 처음부터 리아가 궁에 적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설마… 알고 계셨어요?”
“뭘?”
“제가 궁에 들어올 수 있던 이유요.”
“내 덕분이겠지. 넌 왜 그렇게 부정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백작은 처음 퍼스가 왔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궁에도 식물 능력자들은 많았다. 전문가들을 제치고 굳이 제어력도 낮은 리아가 필요하다고 할 때부터 퍼스의 제안은 수상했다.
하지만 리아가 원하기도 하고, 궁에서 더 좋은 혼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수락했던 것뿐이었다. 순진한 리아는 제게도 기회가 찾아온 거라고 좋아했지만.
“넌 그저 삼 개월 하고 싶었던 왕궁 수습생 생활 경험 삼아 해보면서 좋은 혼처나 찾으면 된다. 너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느냐.”
리아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다 알고 있으면서 순진하게 좋아하는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다니. 그런 줄도 모르고 리아는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좋아하기만 한 거였다. 화가 나 순간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다행히 그 순간, 퍼스가 차를 내와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리아 양이 끓여주셨던 것처럼 훌륭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못 마실 정도는 아닐 테니 드시죠.”
“고맙네.”
퍼스는 맞은편에 앉으며 두 부녀의 모습을 살폈다. 차를 끓이는 동안 속삭이고 있어 이야기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리아의 표정을 통해 대강 짐작은 갔다. 벌써 표정을 갈무리하고 있는 백작과 달리,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만 보면 그녀는 정말이지 궁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 첫 번째 상대는 누구였나?”
백작은 조금의 덧붙임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평온한 어조였지만, 퍼스는 자신이 시험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긴장되어 찻잔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폰스 왕자님이었습니다.”
“제1 왕자님 말인가? 자네 상관인?”
퍼스의 말에 백작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불쾌해한다기보다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리아는 알폰스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표정이 더욱더 일그러졌다.
“네. 미혼 남성이시고, 사이키델리아국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좋아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추천해드릴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국의 왕자고, 황위 계승권이 있는 데다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약혼녀까지 있지만 조건에는 충족한다 이거구만.”
“네.”
한껏 날이 선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퍼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리아에게도 말했듯 계약에 정해진 조건은 지켰다. 꼭 결혼 가능성이 높은 상대라는 조건은 없었다.
“역시 영악하군.”
“과찬이십니다.”
당연히 칭찬이 아니었지만, 퍼스는 정말로 칭찬이라도 받은 듯 웃어 보였다. 애초에 리아를 궁으로 끌어들이게끔 한 것도 그의 의견이 분명했다. 제1 왕자가 이렇게 복잡한 계획을 생각해낼 만큼 출중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보좌관이 유능한 편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영악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약속했던 한 달간 꾸준히 만나게도 했나?”
“왕자님께서 리아 양의 궁 생활을 특별히 신경 쓰셨습니다. 덕분에 적어도 주에 한 번은 다과를 함께하셨죠. 방금도 두 분이서 식사를 하시던 참이었고요.”
“왕자님께서도 우리 거래를 아나?”
“아뇨, 모르고 계십니다.”
“그럼 왕자님께는 무슨 이득이 있어 우리 리아를 꾸준히 만나주셨나?”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어요, 아버님.”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아가 끼어들었다. 퍼스는 백작의 앞에서도 절대 위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곤란하게라도 만들어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왕자님께 이득이 뭔데?”
“저와 친해져서 아버님께 잘 보이고 싶어하셨어요.”
“나에게 잘 보여서 뭐 하려고?”
“아버님의 도움이 필요하신 모양이던데요.”
“이런 뒷방 늙은이가 어디에 도움이 된다고.”
살짝 비친 왕자의 의도에도 백작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생각대로의 대답이 나오자, 리아는 의기양양해졌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단호한 거절에 퍼스는 입가가 썼다.
“백작님처럼 공정하고 영향력 있으신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왕자님께서는 백작님 같은 경험 있고 능력 있는 어르신들의 가르침이 많이 필요하십니다. 천천히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왕자와 백작의 인연이 끊어지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알폰스가 쉽게 본심을 드러내는 바람에, 리아에게서 신뢰를 잃긴 했지만. 그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더 있었다.
“왕자님께서 좋은 보좌관을 두었군.”
백작은 퍼스의 정중하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아부가 마음에 들었다. 대뜸 왕자를 소개시킨 건 괘씸했지만, 생각해보면 나쁜 선택도 아니었다. 리아는 남성에게 면역이 없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진지한 만남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바람둥이 같은 그와 경험을 쌓아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래, 리아. 너는 어떻더냐? 제1 왕자님과 만나보니.”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첫인상부터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입견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다르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어차피 그와는 되지 않을 게 뻔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화가 나는 일이 있었다. 자신을 왕궁으로 부른 게 식물을 키우는 능력을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배경 때문이었다는 것. 처음에는 화가 치밀었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자신의 탓도 있었다.
애초에 사막의 기적을 키우는 데는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알폰스 왕자는 대놓고 처음부터 제게 친해지자고 요구했다. 모든 것들이 리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리아 자신만 들떠서 아무것도 못 보고 있었다. 아니, 보이지 않는 척했다.
“처음에는 선입견을 가지고 봤지만, 제게는 잘해주셨습니다.”
알폰스가 제게 잘해주려고 한 건 사실이었다. 비록 방법이 이상할 때가 많았고, 민폐 같기도 했지만.
“그래서, 좋아지더냐?”
“아니요, 왕자님은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셔서 부담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친해지고 싶다고 말씀해주셨지만, 저는 아무래도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아요. 게다가 제 타입도 아니신 것 같습니다.”
결과가 뻔했지만, 첫 번째 소개는 실패라는 말이었다. 놀라울 것도 없는 결론이라, 세 사람 모두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인물도 출중하고, 지위도 있고, 경제력도 있는 남자가 네 타입이 아니라는 말이냐?”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저를 ‘리아’가 아니라 ‘페넬로페 백작가의 막내딸’로만 생각하셨으니까요. 저는 저를 온전하게 ‘리아’로만 봐 주는 사람이 좋겠어요.”
“들었나, 자네?”
“네.”
두 번째 사람은 리아의 조건이 반영될 수 있게 고르란 말이었다. 첫 번째 건은 자신의 욕심을 더한 부분도 있는 터라, 퍼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순전히 리아의 입장에서 고려해주길 바라네. 자네의 입장은 섞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난 회의가 있어서 이만 일어나겠네. 리아, 한 달 후에 다시 보자꾸나.”
“예, 아버님. 몸조심하세요.”
백작은 따라 몸을 일으키는 리아의 머리에 잠시 손을 얹었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온기가 리아를 안심하게 했다. 매정하게 굴 때도 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회의실 쪽으로 백작을 배웅한 후, 리아는 기숙사 쪽으로 돌아섰다. 퍼스가 데려다주려 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가면서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세요.”
퍼스는 내심 당황했다. 리아가 제게 이토록 차갑게 군 적은 지금껏 없었다. 사실 그녀가 제게 차갑게 굴어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게 신경 쓰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