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뜻밖의 방문
갑작스런 알폰스의 말에 두 사람 모두 당황했다. 뒷자리에서 무심하게 서 있던 퍼스의 표정에도 금이 갔다.
“왕자님. 그건 제가 해명했습니다만.”
리아와 대화하는 중이라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나섰다. 하지만 알폰스는 개의치 않았다.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뿐이었다.
“자네에게 묻지 않았네.”
리아에게 해명의 기회가 돌아왔다.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왕자에게까지 해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진정하기 위해 알폰스와 마찬가지로 차를 한 번 마신 후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퍼스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죠.”
“소문일 뿐이라….”
왠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진심으로 리아와 퍼스 사이에 뭔가 있다고 의심하는 듯한. 사정을 몰랐던 메이가 의심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알폰스가 의심하는 건 타당하지 않았다. 퍼스에게 리아에 대해 조사를 시킨 것은 바로 그였기에.
“설마 왕자님께서 궁에 떠도는 소문을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저희 보좌관과 함께 따로 만나기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퍼스 님께서 특별히 시간을 내신 겁니다.”
알폰스는 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주한 두 눈에서 그녀의 반응을 살피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정말 그게 다입니까?”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나요?”
리아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일부러 쿠키 하나를 집어 들어 천천히 입가에 가져갔다. 딱딱한 쿠키가 그녀의 입안에서 뽀각 소리를 내며 반으로 부러졌다. 원래라면 소리를 내지 않고 먹었을 터였지만, 지금은 일부러 소리를 낸 것이었다.
퍼스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선명한 눈빛에 담긴 의사를 파악했는지 알폰스는 마주했던 눈을 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스의 의심에 쐐기를 박듯, 리아가 추가적으로 덧붙였다.
“퍼스 님과 저는 친구일 뿐이에요.”
그 순간, 퍼스와 눈이 마주쳤다. 둘 모두 서로에 대해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터였다. 퍼스는 잘 말했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스는 친구라는 단어가 의아했다. 애초에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존재가 성립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둘 사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둘 모두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담담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친구 사이가 분명하든 아니든 서로에게 마음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렇군요. 저희 보좌관이 좀 무심한 편인데 단둘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하니 궁금했을 뿐입니다.”
알폰스의 아무 일 아니라는 태도가 더 거슬렸다. 사람 사이를 다 의심해놓고. 그래서 리아는 일부러 더 톡 쏘듯 말했다.
“바쁘신 퍼스 님 통해 저에 대해 조사하신 이유라도 알 수 있을까요? 저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던데.”
“물론 영애와 친해지고 싶어서죠. 친구 이상으로.”
친구 이상. 퍼스를 두고 일부러 말한 것이었다. 게다가 약혼자도 있는 사람이 노골적으로 친구 이상의 관계를 언급했다. 리아는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참느라 곤혹스러웠다. 퍼스 또한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왕자님과 친구라뇨. 영광스럽지만 제겐 너무 과분한 듯싶은데요.“
일부러 리아는 못 들은 척 단순한 친구로 관계를 격하시켰다. 자칫 잘못하면 왕자와 바람이라도 났다고 오해받을 수 있을 듯했다. 사실 단순한 친구도 되고 싶지 않았다. 백작의 조건만 아니었으면, 퍼스의 소개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마주할 일이 없었을 터였다.
“페넬로페 영애 정도면 충분히 자격이 됩니다. 영애의 아버님께서 사이키델리아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인지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결국 제 아버지 때문에 자신을 곁에 둔다는 얘기였다.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더 기분이 나빴다. 리아는 아버지의 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왕궁에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왕궁에 들어온 것도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성과 위치 때문일지 몰랐다. 좋으나 싫으나 그녀의 아버지였다.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더 어려웠다.
“제 아버지께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리아는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물었다. 예전부터 귀족들의 대화법은 영 제 성격에 맞지 않았다. 숨기고 돌리고 하는 건 특히. 하지만 그 질문이 오히려 원하는 바였는지, 알폰스가 환하게 웃었다.
“아니라고 할 순 없겠네요. 영애가 솔직하게 물어보시니 저도 솔직하게 답변드리겠습니다. 저는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현재 기반이 약한 상태입니다. 왕께 충성했던 귀족들이 모두 제게도 충성하리란 보장도 없고요. 그래서 중립인 페넬로페 백작의 힘이 더욱 필요합니다.”
현재 상황에 대해 말하는 알폰스는 지금까지의 바람둥이 같은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진지하고,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어 리아는 내심 놀랐다. 그래서 그녀 또한 진심을 담아 답변했다.
“왕자님이 오해하시는 게 있는데 아버님께서는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제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으세요.”
페넬로페 백작은 딸을 몹시 사랑했다. 그건 본인인 리아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리아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면에 있어 두 사람은 부딪히는 편이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라고 말했지만, 사실 백작이 제대로 리아의 의견을 들어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장에 궁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그랬다. 평생의 소원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백작은 반대할 뿐이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결혼 때문에. 그런 백작 때문에 원치도 않은 알폰스와의 만남을 이어가야만 했고.
“페넬로페 영애에게 더 높은 위치를 줄 수 있다고 하면 들어주지 않으실까요?”
이게 무슨 소리야. 뚱딴지같은 소리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올려 퍼스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당사자인 알폰스를 앞에 놓고 그에게 따지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았지만, 왠지 이 모든 게 그의 탓인 것만 같았다.
“왕자님, 조금 설명이 부족하셨던 것 아니실지요. 영애가 지금 상황이 의아하신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예상했는지, 그는 태연했다. 그 모습을 보고 리아는 확신했다. 알폰스가 말하는 내용을 퍼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백작님께 잘 말씀해주신다면 영애에게 왕궁에서 높은 직책을 드리겠습니다. 당장 수습도 떼어드릴 수 있고요.”
무려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말이었다. 왕궁에서 일하는 건 리아의 오랜 꿈이었다. 당장 수습 딱지를 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부당한 방법으로는 아니었다.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안 맞기는 했지만, 그의 한 가지 점은 완벽하게 존경하고 있었다. 항상 청렴하려고 노력하고 중립을 지키는 것.
“사막의 기적을 굳이 살려내지 않아도 됩니다.”
망설이고 있는 리아에게 알폰스가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더 확고해졌다. 눈앞에 있는 왕자는 왕비를 위해 사막의 기적을 살려낼 사람을 모집한 게 아니었다. 그저 세력이 필요해 핑계로 자신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궁에… 불러주신 건 감사합니다.”
말은 알폰스에게 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퍼스를 향했다. 이 사실을 모두 알고도 제게 말해 주지 않은 게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냉정한 그의 눈을 안경 너머로 마주하고서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제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폰스의 보좌관일 뿐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저는 사막의 기적을 살려내서 제 능력으로 인정받아 왕궁 직원으로 정식 채용되고 싶습니다.”
“그 식물을 살리는 건 아주 힘들지 않습니까?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들었는데.”
“그걸 하기 위해 절 왕궁으로 부른 분이 왕자님이시지 않습니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저는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효심은 무슨. 처음에 알폰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지극히 생각하는구나 오해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저 왕자와의 만남을 끝내고, 온실로 돌아가 제 일에 충실하고 싶었다. 어차피 한 달도 다 되어가고, 대충 만났다고 거짓말로 끝내면 되겠거니 싶었다.
리아는 다시 한번 알폰스의 뒤에 서 있는 퍼스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에게선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미안해하는 기색도, 곤혹스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리아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알폰스도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모든 조건을 제시했는데 거절당하긴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은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퍼스가 조언한 대로 왕궁에 취직까지 시켜주겠다고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분명 그가 조사한 바로는 그녀가 원하는 건 딱 하나, 궁에서 일을 하는 거라고 했다.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흥미가 갔다. 처음 접근한 목적은 단순히 페넬로페 백작과의 관계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보통 귀족 여성처럼 친근하게 굴지 않는 점이 재미있기도 했다.
자신의 보좌관인 퍼스와 소문이 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자존심이 좀 구겨졌다. 눈앞에 자신에게 들이대는 왕자를 두고, 고작 그 왕자의 보좌관과 눈이 맞다니. 다행히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을 모두 제시한 것이었다.
“왕자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게 아버님께 말을 잘 전해달라는 거라면,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아버님이 제 말을 듣지는 않으셔서요. 그 부분까지 책임져드릴 수는 없습니다.”
알폰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이미 차갑게 식은 차는 떫고 쓰기만 했다. 절로 인상이 써졌다.
“그럼 이제 저는 근무처로 돌아가 봐도 될까요?”
대답 없는 알폰스를 대신해 퍼스가 나섰다. 리아 옆으로 걸어와 문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에스코트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퍼스를 흘겨보았다.
“식사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문밖으로 나서기 전, 리아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두 번 다시 이 왕자 궁에 다시 방문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콰앙. 왕자와 있던 응접실의 육중한 문이 닫혔다. 드디어 왕자의 눈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자, 긴 한숨이 나왔다. 이토록 불편한 식사 자리가 또 있을 수는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퍼스가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왜 안 말해주셨어요?”
“안 물어보셨으니까요.”
따지듯 묻는 리아에게 퍼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평소와 같은 어조인 게 더욱 그녀의 화를 부추겼다.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거래의 일부였지 않습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고요! 퍼스 님도 그렇게 의무적이지만은 아니어 보였으니까.”
원망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며, 퍼스는 고민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 걸까. 처음부터 거래라고 명확하게 밝힌 그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에게 도대체 뭘 바란 걸까. 그녀가 말한 것처럼 제가 의무적이지 않은 감정적인 태도를 보인 걸까. 스스로에게 되물어도 무엇 하나 확신하기 어려웠다. 퍼스는 주먹을 꽉 쥐고 고민했다. 눈 한번 딱 감고 장갑을 벗을까.
“여기서 뭐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