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낯선 조우
“네?”
리아도 놀랐지만, 더 놀란 건 케빈 본인이었다. 말해놓고 아무 일도 아닌 척 땅을 파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의 손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단 걸 다행히 리아는 몰랐다.
“싫음 말든가.”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리아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사막 기후 관리 부서 내에서도 정해진 파트가 없다 보니 선배라고 할 만한 존재가 없었다.
게다가 잘 아는 상관은 케빈뿐이었다. 메이는 자신의 팀원들과 식사를 하니, 같이 먹을 사람은 케빈뿐이란 것도 뻔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동안 그가 리아에게 한 걸 생각하면 거절할 만도 했다. 막 거절하려고 할 때, 메이의 말이 떠올랐다.
- 알폰스 왕자에 대해 잘 알아? 정말 별로인 사람이야?
케빈에 대해서도 똑같았다.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단정 짓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같이 먹어요.”
리아의 승낙에 케빈은 깜짝 놀랐다. 스스로 제안해놓고도 그녀가 거절할 줄 알았다. 의외의 대답을 들으니 한참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입을 떼 대답했다.
“…그래.”
얼떨결에 같이 밥을 먹게 된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잠시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삽질을 몇 번 더 했다.
***
케빈이 식당에 들어서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그가 그동안 연구소에서 식사할 줄만 알았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터였다.
소란스러운 식당을 보자, 리아는 깨달았다. 나름대로 케빈도 유명인이라는 걸. 객관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생김새였다. 기사단 출신이라 덩치도 듬직했고, 외모도 남자다웠으므로. 다만 케빈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리아에게는 그가 잘생겨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랜만의 식당 방문이라 그런지 케빈도 어색해했다. 누군가를 시켜 매일 식당에 있는 빵과 스프를 가져다 먹을 줄만 알았지, 직접 온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덕분에 식당을 이용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리아를 흘끔흘끔 보면서 기억을 더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좀 특별식이네요.”
평소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 케빈은 메뉴를 한참 쳐다봤다. 리아는 스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고기가 들어 있잖아요.”
“아, 그런가.”
사실 스프 내에 뭐가 들었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케빈에게 식사는 그저 끼니 때우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날 스프가 야채 스프이든, 고기 스프이든, 버섯 스프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리아의 말을 의식하고 한 숟갈 떠먹어보니, 확연하게 고기의 질감이 느껴졌다.
“간단한 요리지만 신경을 많이 쓰신 티가 나요. 여기 왕궁 요리사님도 분명 뭔가 능력자이시겠죠?”
“음. 아마도. 기운이 나게 하거나 맛이 나게 하거나 하는 능력을 쓸 수 있는 요리사겠지.”
“그런 걸 보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왕궁에서 일하는 분들은 다 적재적소에 제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가시잖아요.”
리아 또한 그녀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궁에 들어왔다. 하지만 수습으로서의 생활에서 과연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당장 사막의 기적만 해도 그녀의 능력이 듣지 않는 식물이었다. 지금 리아는 보통 인간밖에 안 되는 상태였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만이 능력의 전부는 아니니까.”
“네?”
“예를 들어 저 요리사. 사실 이 요리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을 수도 있지. 하지만 저 요리사가 후천적으로 정말 요리를 잘하는 능력을 갖춘 거라면?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나.”
“그렇죠.”
“한 가지 능력만 믿다간 큰코다쳐.”
여전히 무심한 말투였다. 하지만 지금 초조해하는 리아의 기분을 읽고, 대답해준 느낌이 들었다. 리아는 멍하니 케빈을 바라보았다. 민망한지, 아니면 그저 아무 감정 없이 말했을 뿐이었던 건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스프를 먹기만 했다. 시끄러운 식당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지 가끔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상관은 상관이구나. 리아는 케빈 나름대로 저를 위로해준 거라고 결론 내렸다. 아니라 해도 괜찮았다. 그 말에 실제로 리아는 위안을 받았으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식물을 자라게 하는 능력이 안 듣는다고 해도 괜찮아. 다른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면 돼. 그렇게 멋대로 바꿔서 받아들였다.
“케빈 님은 그럼 비 오는 능력 말고 다른 능력을 인정받아 사막 기후 관리 부서로 오신 건가요?”
“나?”
“네. 원래는 부 기사단장이셨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온실로 오게 되신 거예요?”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방심한 참에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케빈은 헛웃음을 지었다.
“보통은 그런 질문은 좀 조심스럽게 하지 않나?”
“뒤에서 멋대로 추측하고 수군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래. 낫긴 하군.”
하여간 좋게 봐주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지려고 들질 않았다. 순순하게 “네네-” 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 그 점이 신경이 거슬리기도 하고, 나름대로 재밌기도 했다. 그래서 평소라면 무시했을 말에 대답했는지도 몰랐다.
“능력이 약해져서 퇴출당했어.”
“능력이 약해지기도 하나요?”
사실 능력에 대한 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왜 발생하는지, 왜 차이가 나는지, 어떤 규칙으로 유전이 되는지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그 능력의 위력이 약해지거나 강해지는 법 또한 아무도 알지 못했다.
케빈은 잠시 예전을 떠올렸다. 워낙 예전의 일이라 떠올리는 데 힘이 들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매일 전쟁터에서 보냈던 그때를 떠올렸다. 지금은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서 언제든 비를 내릴 수 있는 게 능력이라면, 그때는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폭풍우를 풀러 일으킬 수 있었다.
자연재해에 가까운 그 능력을 인정받아, 부 기사단장 자리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그가 폭풍우로 쓸고 간 자리엔 항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수백, 수천의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한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가 추락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사막 한가운데 피어난 식물이 있었다. 어떻게 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전쟁 중 그 한 포기의 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폭풍우를 일으키면, 분명 그 풀이 흔적없이 뽑혀 사라질 게 분명했다. 잠깐 마음을 빼앗긴 사이였다.
- 위험해!
찰나에 횡으로 그어진 검이 몸통을 크게 가로질렀다. 죽을 수도 있었던 상처였다.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다만 한 가지, 능력이 몹시 약해져 있었다. 이제 그가 가장 강하게 내릴 수 있는 비는 장대비 정도뿐이었다.
“약해지기도 하더라고.”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지 않아도, 무슨 사연이 있다는 것만큼은 짐작이 갔다. 억지로 입을 열게 할 생각은 없었다. 리아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계속했다.
“그럼 강해질 수도 있겠네요! 제 능력이.”
“거기서 더 세지면 뭐하게? 식물로 온 나라를 뒤덮기라도 하게?”
“그럴 수도 있죠. 모두 다 숲속에서 사는 거예요!”
좋은 걸 홍보하듯 리아는 양손을 펴 보였다. 뿌듯해하는 미소를 입에 건 채로. 누가 식물 관련 능력자 아니랄까 봐.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케빈은 식사나 계속했다.
“너나 좋겠지.”
“케빈 님도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네. 케빈 님 연구하시는 걸 보면 식물을 정말 좋아해서 이 부서에 오신 게 너무 잘 느껴지는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차마 뽑지 못한 그 풀 한 포기와 마주한 이후, 사막에서 사는 식물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능력을 잃고, 기사단에서 퇴출당한 후 자진해서 온실 관리 부서로 옮겼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부담스러운 기사일 뿐이었다. 낯선 존재가 부서의 상부에 꽂히니 자연히 모두가 그를 기피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식물들에 관해 연구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아주 나중에야 서서히 느꼈다.
“스프나 먹지.”
“아, 쑥스러워하시는 거죠? 맞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귀끝이 빨개져 있었다.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리아가 놀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방심할 수 없다며 케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식사 자리였다.
***
그리고 얼마 후, 리아는 또 하나의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다. 정중하게 초대장까지 작성하여 밀봉된 편지는 기숙사로 배달되었다. 침대 한가운데 놓인 편지봉투를 집어 든 리아는 발신인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좋네. 요즘 이렇게 밥 같이 먹어주는 사람이 많아.”
점심시간을 떠올리자 더욱 싱숭생숭해졌다. 혼자서 먹지는 않게 되었지만, 앞으로도 케빈과 먹게 되는 건지가 의문이었다. 하루만 같이 먹어준 건지, 앞으로도 같이 먹겠다는 말이었는지.
하지만 리아는 사실 밥 정도는 혼자 먹어도 상관없었다. 저택에 있을 때도 혼자 밥을 먹곤 해서 익숙했다. 오히려 그룹을 찌어 먹는 떠들썩한 식당 분위기가 낯설 정도였다.
상념에 빠졌다 나온 리아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리아 페넬로페 영애로 시작하는 편지는 화려한 미사여구를 자랑했지만, 결국 식사 자리 초대였다. 예의 면담 자리였다. 지난번 메이의 말을 상기하며, 리아는 자꾸 처지려는 어깨를 바로 했다.
“그래.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영 껄끄러운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약혼자까지 있는 사람과 둘이서 밥을 먹는다는 게. 물론 퍼스도 서서 함께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퍼스와도 소문에 대해 들은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얼마나 어색할지 생각만 해도 온몸이 간질거렸다.
혹시 기회가 있다면, 퍼스에게 자신은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다고 꼭 전달하고 싶었다. 혹시나 제가 흑심 품을까 봐 경계해서 멀어진 거면, 그런 걱정 하지 말라고. 나름대로 궁에 와 처음 얻은 친구인데, 이렇게 잃고 싶지는 않았다.
***
식사 장소는 지난번 후원에서 차를 마신 그곳이었다. 시간에 맞춰 가보니, 화려한 장식들과 함께 제자리에 조각상처럼 앉아있는 알폰스가 보였다.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그가 일부러 저 각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퍼스도 알았고, 리아도 그 사실을 짐작했다.
알폰스가 있는 테이블에 가서 마주 앉기 전, 리아는 흘끗 고개를 돌렸다. 알폰스의 뒤에 서 있는 퍼스를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포커페이스여서 감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를 껄끄러워하는지 어떤지조차.
리아는 자리에 앉기 전 알폰스에게 인사했다.
“제1 왕자님을 뵙습니다.”
“아, 영애.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다니까 그러는군. 앉지.”
알폰스는 일부러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띠었다. 굳이 그 웃음이 가짜 같다고 지적할 필요는 없지. 리아 또한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주 웃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전채부터 차례로 요리가 나왔다. 페넬로페 저택에 비해서도 훌륭한 요리였다. 저택에 있는 요리사도 훌륭한 요리사였다. 하지만 이전 퍼스가 한 말처럼, 왕궁 요리사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요리는 어떠십니까?”
“다 맛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요.”
심지어 모든 요리가 리아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나왔다. 퍼스가 음식에 대해서 물어본 것은 오늘의 식사를 위함인 게 너무 뻔했다.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만 나오고 있었으므로.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을 위해 마련된 식사 자리이니 기쁜 게 당연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말없이 식사를 계속하던 와중, 본식이 끝나고 후식이 나왔다. 그제야 알폰스는 리아를 보며 말을 꺼냈다.
“저희 보좌관님이랑 소문이 나셨던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