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16)화 (16/75)

#16. 미처 생각지 못한 질문

사막의 기적은 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물을 주지 않은 채 한참이 지났지만, 더 이상 시든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식물은 원래 자라는 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 리아는 좀 더 끈기를 가지기로 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계속해서 먼저 사막의 기적을 연구했던 이들의 기록을 살폈다. 케빈도 벌써 한 종은 말려버렸다고 했다. 그에게 자료를 요청했더니, 서슴없이 내어줬다. 까칠하게 굴 줄 알았던 그가 선선히 연구자료를 내밀자, 오히려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수록 리아의 표정이 파래졌다. 전직 기사단 부단장 출신인 그는 원래 보고서 작업에 익숙지 않았다. 덕분에 개발새발로 기록된 내용을 알아보려면 해독 작업이 필요했다.

“뭘 봐?”

눈으로 호소했지만, 케빈은 그 내용을 설명해줄 마음 따윈 없어 보였다. 뒤돌아서서 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사막에 있는 모든 식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오늘 리아의 업무는 그런 케빈의 지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는 리아에게 무엇을 할지 전혀 지시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책상이라도 치워드릴까요?”

그는 여러 책을 펼쳐서 겹쳐 놓았다. 그 위에도 특유의 글씨체로 쓴 여러 연구자료가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손도 댈 생각 하지 마.”

덕분에 리아는 정말 할 일이 없었다. 그의 책상 옆 보조 의자에 앉아서 사막의 기적 관련한 연구자료를 해독하는 것밖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글씨는 포기하고, 그림 먼저 해독해보기로 했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케빈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이었다.

그림과 몇 알아보지 못하는 글자로 추리해보건대, 물을 너무 많이 줬을 때 공통점은 뿌리가 아닌, 밑동부터 썩는다는 점이었다. 점점 검은색 반점이 올라오는 게, 아무래도 물이 제대로 마르지 않아 곰팡이가 피는 모양이었다.

케빈은 물 양에 관련하여 많은 연구를 해본 듯했다. 특히 그가 비를 내릴 수 있는 능력자라서 더 그런 듯했다. 페이지를 넘기니 사막의 기적 말고도 다른 사막 식물들과 비교해놓은 내용도 있었다. 빽빽하게 기록된 글자들이 그가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었다.

한참을 미간을 찌푸리며 해석하고 있자, 케빈이 슬쩍 뒤를 돌아 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 때문에 위로도 아래도 비춰보며 갸웃거렸다. 케빈도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각은 있는 터였다. 그녀가 뭐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 금세 눈치챘다.

“어디가 궁금한 건데.”

슬쩍 묻자, 리아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별로 살갑게 대하지도 않는데도, 가끔 이렇게 웃는 걸 보면 실낱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다요.”

하지만 이렇게 꼭 성질을 돋우는 말을 해서, 망치곤 했다. 케빈은 리아를 노려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정말 글씨가 악필이셔서 알아보기 힘들단 말예요!”

“귀중한 자료를 넘겨줬더니 하는 소리라고는.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군.”

“그럼 이것만 읽어주세요. 사막의 기적이랑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식물들.”

“이름 알아서 뭐하게. 네가 알아야 하는 건 키우는 방법 아니야?”

비협조적인 케빈의 태도에 대번에 리아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케빈이 봐주는 법은 절대 없었다. 여전히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리아 또한 어쩔 수 없이 그의 글씨를 연구하는 데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다.

“왜 물을 그대로 주는데도 시들하지?”

케빈은 주로 사막 기후 관련 식물들에 맞는 조건을 지정해주는 관리자였다. 실무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 실무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했다. 그가 지정해준 조건을 이행한 실무자들의 피드백에 따라 더 나은 조건을 연구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온실 안은 기후 능력자에 의해 적정 온도로 관리되고 있었지만, 매일같이 완전 동일한 조건일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어제까지는 같은 조건으로도 생생했던 식물이, 어느 날부터인가 시들해지곤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딱히 모든 식물을 살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맡은 일은 그게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케빈이었다. 커다란 나무부터 작은 풀 한 포기까지 사막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이라면 모두가 그의 소관이었다.

“물 외에 다른 문제가 생긴 것 아닐까요?”

케빈의 혼잣말을 들은 리아가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무시했지만, 그 내용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 외에 다른 문제라면 햇빛인가? 하지만 기후 능력자의 관리로 이 온실은 철저하게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어느새 등 뒤에까지 다가온 리아가 어깨 너머로 그의 자료를 훔쳐보았다. 평소라면 금세 화를 냈을 터였지만, 생각에 빠진 케빈은 눈치채지 못했다. 리아는 또 어깨 너머 악필 자료 틈바구니에서 그림을 통해 그의 고민을 이해했다.

“아주 커다란 나무가 시들시들한 거군요? 나무가 시드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풀과 달리 나무는 뿌리가 워낙 튼튼하니까요.”

뿌리? 그녀의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짐작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서둘러 짐을 챙겨 나무가 자라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향했다.

“저도 데려가세요, 케빈 님!”

아무래도 케빈은 오늘 하루 자신이 그의 보조를 맡기로 한 걸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사라지는 그를 좇기 위해 리아는 최선을 다해 서둘러야만 했다.

***

오아시스 지역은 사막 기후 식물이 가장 다양하게 자라나는 곳이었다. 그만큼 종수도 많아서 사막 기후 관리 부서에서 인원이 가장 많이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케빈이 나타났다.

총관리자인 그에게 차례대로 인사했지만, 그는 모두 무시했다. 하지만 그가 무시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다들 그대로 일을 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리아는 속으로 직원들을 동정하곤 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건 한 나무 앞이었다. 커다란 나무라고 하기엔 조금 모자란 편이었지만, 두 사람의 키보다 두 배는 높았다. 끝만 살짝 뾰족한 동그란 이파리는 하나둘씩 말라 있었다. 이미 마른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속이 쓰렸다.

“그림으로는 종까지는 모르겠던데, 올리브나무였군요.”

리아 또한 마음 아픈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튼튼하기로 유명한 이 나무가 이렇게까지 시들기도 어려웠다. 특히 이 나무는 온실 안에서 철저한 관리를 받고 있을 터였다. 이파리가 이렇게 시들 때까지 내버려뒀다는 게 더 놀라웠다.

“도대체 뭐가 문젤까요?”

보자마자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물도 케빈의 말에 의하면 일정하게 주었다고 한다. 온도도 기후 능력자의 능력으로 조절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있다면 토양인데, 이 또한 사막에서 가져온 모래였다. 한참을 올리브나무를 훑어보던 케빈은 미친 사람처럼 땅을 파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몰라? 땅 파잖아.”

“모래도 사막에서 공수해온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대로일 것 같은데….”

“맞아. 내가 확인하려는 건 흙이 아니고.”

가만히 보고 있기도 뭐해, 리아도 삽을 들었다. 괜히 다칠까 걱정되었는지 케빈이 말렸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이거라도 해야 밥값을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말리길 포기한 케빈은 리아가 땅을 팔 위치를 지정해주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필요한 얘기 외 정말 별말을 안 한 채로 한참 땅만 팠다. 분명 체온 조절 기능 있는 목걸이를 차고 있는데, 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리아는 팔을 걷어붙이고, 거치적거리는 치마를 끌어 올려 무릎 위로 묶었다.

땅을 파며, 케빈은 흘끗 리아를 바라보았다. 처음 귀족 여식이라고 무시한 것과 다르게 그녀는 근성이 있었다. 제법 근성이 있는 모습에 케빈이 마음도 슬슬 풀리고 있었다. 물론 가감 없이 튀어나오는 그녀의 솔직한 말투 때문에 다시 심술이 나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퍼스 님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던데.”

나름 용기 내어 친한 척 한마디 던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꽤 기분이 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바로 열심히 하던 삽질을 멈추고, 바닥에 콱 소리가 나도록 세게 삽을 박았다.

“그런 헛소문을 믿으세요?”

“다들 사실이라고 믿더군.”

“그래서 케빈 님도 사실이라고 믿고서 물어보시는 건가요?”

사나운 그녀의 표정을 보며, 뭔가 말을 잘못 꺼냈음을 짐작했다. 아무리 이쪽 방면으로 눈치가 둔한 케빈이라도 그 정도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수습하기 위해 눈동자를 또르륵 굴리며 대안을 찾았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닐 거라고 생각하시면서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상관으로서 부하직원의 소문을 관리하는 건 당연한 거다. 이것도 직원 관리 업무 중 하나니까.”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퍼스 님과 만나는 걸 줄이기로 했으니까요.”

그럼 그동안은 꾸준히 만나왔다는 말이 된다. 소문이 아예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은 아닌 모양이었다.

“퍼스 님이 널 왜 만나지?”

“제1 왕자님의 명령으로 조금 알아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셔서 도와드렸어요.”

리아는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도, 퍼스와의 거래에 대한 이야기도. 다행히 케빈도 더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다. 다시 묵묵히 바닥을 파는 데 더 집중했다.

케빈은 자신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무리 궁에 들어올 때 안내해준 사람이 퍼스라지만, 저보다 그와 리아가 더 가까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뭔가 모르게 불편했다. 아마 제 부하직원을 퍼스의 밑으로 강제 파견 보낸 듯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결론을 내린 케빈은 잡념을 떨치기 위해 계속해서 땅을 팠다.

한참을 땅만 파고 있다가,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 못한 채 점심시간이 되었다. 온실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뎅그렁 뎅그렁 울리기 시작했다. 입구를 관리하는 문지기가 울리는 것이었다. 땅을 파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던 리아는 힘겹게 허리를 폈다. 잠시 삽질 좀 했다고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프다는 티를 내면 또 케빈이 귀족 여식이 어쩌고 무시를 할까 봐 티 낼 수 없었다.

“일단 점심부터 먹고 하지.”

“네.”

하지만 리아는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원래는 퍼스와의 약속이 점심마다 있었는데, 아침에 그로부터 전령을 받았다. 대강 질문을 마쳤다며, 이제는 집무실에서 식사를 할 테니 기다리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저도 소문이 신경 쓰여 만나는 횟수를 줄이자는 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먼저 들으니 왠지 또 속이 상했다.

점심시간만 되면 번개같이 달려 나가던 리아가 조용했다. 서둘러 식당으로 가는 기색도 없이, 제자리에서 묶었던 치마를 풀고, 걷었던 소매를 내릴 뿐이었다. 아마 점심시간에 빨리 나갔던 이유도 퍼스 때문이었던 모양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이제 만나는 걸 줄이기로 했으니,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는 거고. 너무 오래 땅을 파느라 잠깐 이성이 나간 걸까. 케빈은 지금껏 생각해본 적도 없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같이 먹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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