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소문은 소문일 뿐
“고기, 채소 중에서는요?”
“음. 채소일까요. 하지만 토마토는 싫어요.”
“그럼 밀크티랑 홍차 중에서는요?”
“홍차요.”
이제 어느 정도 퍼스의 질문에 익숙해진 리아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의 질문 덕분에 리아는 스스로에 대해 더 자세히 생각하게 되었다.
“자, 이제 퍼스 님 차례예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방금 한 질문을 되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퍼스는 어딘지 긴장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긴장할 만한 질문이 있단 건지. 심지어 본인이 꼽은 질문들이었다.
“음… 식품의 호불호는 없는데요.”
리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애매한 대답은 하지 않는 게 둘의 원칙이었다. 그 점을 충분히 잘 알고 있어서 퍼스는 더 곤혹스러웠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딱히 없는 그였다.
“글쎄요. 에너지 면에서 더 효율적인 건 아무래도 고기일까요.”
“홍차랑 밀크티 중에서는요?”
“저는 새로 들여온 커피가 좋은 것 같습니다.”
제3의 선택지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리아는 너그럽게 퍼스의 대답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벌써 한참이나 그와 서로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았다. 큰 것에서부터 사소한 것까지 질문은 끊이질 않았다. 과장을 좀 더 보태 부모님보다 서로에 대해 더 잘 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 식당을 나서는 순간, 늘 그렇듯 퍼스가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점심과 저녁에 후원에서 만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자, 왠지 퍼스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았다. 생각보다 퍼스도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자들이었다. 성실히 퍼스의 대답하고, 응했을 뿐인데 성 내에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점점 발 없이 천 리를 갔고, 메이의 귀에 들어갔다.
똑똑.
“네.”
갑작스런 노크 소리였다. 침대에서 막 쉬려던 리아는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그녀의 이웃인 메이가 서 있었다. 어쩐지 그녀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가가 실룩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쉽게 꺼내질 못했다.
리아는 조심스레 문에서 비켜섰다. 그러자, 메이가 리아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침대 한쪽에 자연스레 걸터앉았다.
“언제부터였어?”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메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뭔지 몰라도 그녀가 리아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퍼스 님이랑 사귄 것! 언제부터였냐고!”
“예에?”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리아는 펄쩍 뛰었다.
“퍼스 님이랑 제가요? 사, 사귀… 무슨 말씀이세요! 전혀 아니에요!”
메이의 말에 리아는 민망하고 황당했다. 퍼스와 저는 단순한 친구였다. 그것도 리아가 억지로 하자고 해서 된 사이였지만. 당황해서 그런지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라고?”
“아니에요!”
“정말이야?”
“메이 양,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하실 수 있어요?”
메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리아를 노려보았다. 리아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리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닌가 보네.”
한참을 리아의 태도를 살피던 메이가 결론을 지었다. 그러곤 뒤로 누워 몸을 침대에 푹 묻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안심한 듯했다.
“다행이네. 아니어서. 난 또 너랑 퍼스 님이랑 그런 관계인 줄 모르고 괜히 너한테 퍼스 님 욕만 잔뜩 늘어놨다고 생각했잖아.”
“틀린 말은 안 하셨는데요, 뭐…. 그런데 정말 그런 황당한 오해는 어떻게 하게 되신 거예요?”
“들었어. 소문이 파다하더라. 퍼스 님과 네가 사귄다고. 나야 궁 안에 아는 사람이 몇 없으니 늦었고.”
“소문이 퍼졌다고요?”
“그래. 하루 종일 같이 있는다며?”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어요. 그저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시간에 잠깐 만나는 거예요.”
리아의 대답에 메이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를 보며, 리아는 자신이 또 뭘 잘못했는지 고민했다.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을 같이 있는다고?”
“네.”
“그럼 역시 사귀는 게 맞잖아.”
“아니라고요! 퍼스 님은 제게 볼일이 있으신 것뿐이에요.”
“볼일? 그게 뭔데?”
리아는 잠시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다. 퍼스가 알폰스의 명령으로 뒷조사를 부탁받아서 자신에 대해 묻고 다닌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려면 제1 왕자인 알폰스와 자신이 어떻게 연관되었는지 설명해야 했고. 그에 앞서 퍼스와 백작 그리고 저 사이에 오간 계약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했다.
미혼 남성 3명을 소개받기로 한 것. 객관적으로 놓고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리아가 귀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메이와 거리감이 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메이가 자신을 이해해줄지 의문이었다.
“들어도 화내거나 저한테서 멀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리아가 조건을 다 말하기도 전에 메이가 대답했다. 사건의 전말이 어떻게 된 건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을 보니 더욱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사실은….”
리아는 천천히, 퍼스가 페넬로페 저택에 찾아왔던 순간부터 설명했다. 메이는 듣는 내내 뭐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인내심 있게 참으며 리아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리아에게도 스스로의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럼, 정리해보자. 현재 제1 왕자님을 소개받아 만나는 상태고.”
“알폰스 왕자님은 이 사실을 몰라요. 퍼스 님과 저만 형식적으로 알고 있는 거죠.”
“그 알폰스 왕자님이 너에게 관심이 있고.”
“정확히는 제 아버지죠.”
알폰스 왕자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질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리아에게 그는 왕자이기 이전에 약혼자가 있는 남자였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서 그가 뒤에서 여러 여자를 만나는 게 묵인된다고 해도, 그 대상이 자신인 것은 싫었다.
“너한테 관심이 있을 수도 있잖아?”
한 번도 메이에게 인상을 찌푸린 적 없는 리아였다. 하지만 이번 말만큼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요.”
“왜? 왕자님도 나름 매력적이지 않아? 나름대로 인기도 많던데.”
“약혼녀가 있다고요!”
“낚아채 버려.”
“그럼 제 타입이 아닌 걸로 해주세요.”
단호한 거절이었다. 자신의 남자 취향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알폰스는 아니라는 것. 그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팩 하니 고개를 돌린 리아를 보며 메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폰스 왕자에 대해 잘 알아? 정말 별로인 사람이야?”
“…그런 건 아니지만요.”
사실 무도회에서 본 것 외엔 궁에서 얘기한 게 다였다. 그에 대해 판단한 것도 떠도는 소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메이의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제게 잘 대해주려고 한 사람인데 선입견을 갖고 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너무했나요?”
어느새 리아의 목소리는 작아져 있었다. 자책하는 리아를 보고, 메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랑에 대해선 본능이 더 정확할 수 있지. 싫으면 그냥 말아.”
“메이 양은 왠지 연애 경험이 많은 것 같아요.”
“책을 많이 읽은 것뿐이야. 연애소설을.”
“연애소설만 읽고도 그렇게 조언을 잘할 수 있나요?”
“원래 현실보다 소설이 더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좋거든.”
어느새 기숙사 소등 시간이 다가왔다. 메이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리아와 함께 자기로 했다. 리아는 친구와 밤을 함께 보내는 게 처음이었다. 침대가 좁았지만, 메이와 밤새 떠드는 게 즐거웠다. 메이 덕분에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꼭 붙어 자야 했기 때문에 살짝 스치는 온기가 조금은 낯설었다.
“그럼 퍼스 님은 어떻게 생각해?”
“음, 생각보다 좋은 사람. 좋은 친구요?”
잠시 메이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불을 당기며 괜히 리아에게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그 인간 사무실에서 어떤 줄 알아? 정말 필요한 얘기 아니면 입을 열지도 않는다고. 심지어 ‘안녕하세요’랑 ‘퇴근해보겠습니다’ 두 마디밖에 안 할 때도 있어! 실수라도 하면 눈으로 욕하는데 얼마나 살벌한 줄 알아?”
“퍼스 님 정확하실 것 같았어요. 저도 상관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지만 말하며 리아는 제 상관인 케빈을 떠올렸다. 그러고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면 상관이란 존재가 원래 부하의 마음에 들기 힘든 존재일지도요.”
“너희 상관도 만만치 않다고 그랬지?”
“적어도 퍼스 님은 귀족 여성이라고 근성을 시험해보지는 않으시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출근할 걸 생각하면 일찍 잠들어야 하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수다가 재밌기도 했고.
“혹시나 퍼스 님에게 마음 생기면 꼭 말하고.”
“메이!”
메이는 틈만 나면 리아를 놀려댔다. 한참을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도, 소문은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원래 당사자의 해명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소문이란 것의 속성이었다. 그리고 기어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알폰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퍼스.”
그는 집무실에 노크 없이 들어선 알폰스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상관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다면 더더욱.
“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퍼스는 성실하게 그의 말을 이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업무 시간 외인 쉬는 시간까지 바쳐가며 리아에 대해 조사했다. 그날 조사한 내용은 자기 전까지 보고서로 작성하여 매일 아침이면 알폰스의 집무실 서류 맨 위에 놓고 있기까지 했다.
“요즘 궁에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아나?”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궁에서 소문이 도는 건 당연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고, 비밀이 많은 곳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소문이 연애나 치정 관련 소문이었다. 다만 어떤 소문은 귀 기울일 필요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퍼스도 궁에 떠도는 소문을 알아두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소문은 퍼스가 당사자였다. 그렇다 보니, 소문을 흘리는 사람들도 조심을 기했다. 알폰스의 질문이 뭘 말하는 건지 그로서는 딱히 감이 오지 않았다.
“자네와 페넬로페 영애가 각별한 사이라는 소문이 돌더군.”
저와 리아가 친구 계약을 맺었다는 걸 다들 안단 말인가? 퍼스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소꿉장난 같은 이야기로 알폰스가 직접 여기까지 행차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
“설마 리아 양과 제가 사귀기라도 한단 소문입니까?”
“맞네.”
알폰스는 퍼스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로,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들어 올렸다. 리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터였다. 오늘 알아낸 건 식사 취향이었다. 얼마 후 있을 알폰스와의 만남을 식사하는 자리로 꾸밀 의도였다.
“아닙니다. 저는 왕자님께서 시키신 대로 성실하게 조사만 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자신은 리아에게 3명이나 되는 미혼 남성을 소개시켜 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것도 충분히 번잡한데,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니. 억울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 하긴 자네같이 재미없는 인간이 여성에게 흥미를 가질 리도 없지. 혹시나 해서 물어봤네.”
“굉장히 무시하시는 것 같지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럼 영애는 혹시 자네를 좋아하나?”
아니라고 답변하려던 퍼스는 잠깐 멈칫거렸다.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고, 인간적인 의미라면? 적어도 자신을 알폰스를 볼 때처럼 대놓고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 조금은 궁금해졌다.
“그 부분도 조사해보라고 하시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