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적인 초능력을 위하여 (14)화 (14/75)

#14. 성실하게

“조건이요?”

예상치 못했던 말에 퍼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는 게 재밌어서 리아는 살며시 웃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니, 다시 퍼스의 눈 크기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눈에서 경계가 풀리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불신은 쉽게 풀리지 않는 부분이었다.

“뭘 원하십니까?”

퍼스는 거래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거래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데 능했고. 이번 리아와의 거래 또한 그녀가 원하는 걸 주고,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 합리적인 거래를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 속내를 모르고, 리아는 천진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침부터 퍼스가 찾아온 건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퍽 즐거웠다.

“제 친구가 되어 주세요.”

친구? 미처 예상치 못했던 조건에 퍼스는 눈만 깜빡였다. 평생을 그런 존재가 왜 필요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친구라는 존재를 왜 리아가 원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왕궁에서 산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가 있으면 마음도 놓이고 좋을 듯해서요. 퍼스 님은 이야기도 잘 들어주시고, 함께 있으면 재밌어요.”

난생처음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게 재밌다는 말을 들은 게. 항상 무표정하고 냉철한 그를 인형이라거나, 기계라고 부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자신도 그게 편했고. 누군가와 어울리겠다는 마음 자체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리아는 너무나 쉽게 제게 마음을 열었다. 제게 다가오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고. 게다가 친구라니? 평생 친구라는 존재가 생길 거라곤 예상치 못했었다.

“싫으신가요? 그럼 저도 알려드리기 어려운데요.”

리아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먼저 걸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다. 진짜 친구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그녀의 정보를 쉽게 캐기 위한 거래 조건이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다시 차가워졌다.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친구.”

제 입에서 나왔지만 몹시도 생소한 단어였다. 퍼스의 입에서 나온 친구라는 단어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리아는 활짝 웃었다.

“좋아요!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리아가 앞으로 내민 손을 퍼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는 그였다. 실수로라도 닿지 않기 위해 항상 흰 장갑을 끼고 다녔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손은 왠지 잡아야 할 거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머뭇거리던 퍼스는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리아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꽉 힘주어 마주 잡았다.

“이제 친구가 되었으니 뭐든 대답해드릴게요. 대신 한꺼번에 뭘 가르쳐드려야 할지 모르니까 퍼스 님이 매번 제게 질문을 생각해 오시는 걸로. 그 질문에 제가 성실히 대답하고, 마지막으로 저흰 친구니까 퍼스 님도 같은 질문에 꼭 대답해주셔야 해요?”

“두 번째 거래 조건입니까?”

“아뇨, 우리는 친구니까요. 정 대답하기 싫은 질문이라면 안 해주셔도 돼요.”

살며시 손이 떨어졌다. 분명 사람과 닿는 건 불쾌한 감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퍼스는 저도 모르게 흰 장갑을 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친구가 되고 리아에 대한 정보를 듣는 게 왠지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정확히 친구는 뭘 하면 됩니까?”

“혹시 친구 없으세요?”

별로 숨길 만한 일도 아니었다. 바로 끄덕이는 퍼스를 보며 리아는 난감해했다. 친구라는 존재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리아는 최대한 이상적인 친구에 대해 설명하려 애썼다.

“음… 친구는 대략 서로 고민이 있으면 들어주고, 힘들 때 함께해주고, 아무 이유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주죠.”

“아무 이유 없이?”

퍼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대가 없는 희생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였다. 그러니 리아의 설명이 납득이 가지 않을 만도 했다. 하지만 친구의 정확한 정의가 어쨌든, 리아가 원하는 친구는 그런 존재일 터였다.

“싫으세요?”

“아뇨. 이미 하기로 한걸요.”

퍼스는 딱 잘라 말했다. 굳은 결심을 한 표정이었다. 왠지 그에게 버거운 제안을 했나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리아는 기뻤다. 거래 조건이기는 해도 힘든 왕궁 생활에 마음 붙일 곳 하나는 생겼으니.

금세 온실 입구에 도착했다. 정작 리아에 대한 질문을 한 가지도 못한 게 아쉬웠지만, 앞으로 개수 제한 없이 그녀에 대해 질문할 수 있으니 어느 정도의 성과는 달성한 셈이었다. 아쉬움이 남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그에게 리아는 웃어 보였다.

“그럼 점심에 후원에서 봬요. 뭐 물어보실지 질문 생각해오시고요!”

리아는 달려가며 끊임없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따라 손을 흔들다가, 퍼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에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급하게 주변에 누가 보고 있나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리아 외엔 아무도 없었다. 퍼스는 황급히 몸을 돌려 왕자 궁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낯설고도 간지러운 기분 때문에 목구멍이 가려웠다. 퍼스는 괜히 목 주변을 쓰다듬어 보았다.

“꽃가루 알레르기인가….”

***

식당에서 점심을 받고 있는 리아에게 메이가 다가왔다.

“아침에 퍼스 님이 널 찾아왔다며?”

“아, 네.”

“무슨 일이었는데?”

“저한테 좀 물어볼 게 있으시대요.”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메이가 퍼스를 싫어한다는 걸 떠올린 리아는 말을 아꼈다. 아니나 다를까, 퍼스 얘기를 꺼내자마자 메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인간은 인내심이란 게 없대? 굳이 아침부터 찾아올 게 뭐야.”

“성실하신 분이잖아요.”

굳이 아침, 점심, 저녁을 희생하게 된 퍼스를 떠올리니 조금 딱했다.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지만 제 친구 노릇까지 해주는 건 사실 좀 너무한 요구였나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메이는 리아가 퍼스를 감싸자 못마땅했는지, 말을 우물거렸다.

“너무 성실해서 문제지.”

아직도 퍼스가 불편한 눈치였다. 리아는 퍼스라는 사람은 편했지만, 상관이라면 불편했을지도 모를 터였다. 그러니 메이의 마음이 이해도 갔다. 너무 일을 잘하는 상관도 때로 불편하기도 하니까.

“익숙해지면 좀 낫지 않을까요?”

메이나 저나 아직 수습이었다. 리아의 말이 조금 위로가 되었는지, 메이의 인상이 펴졌다.

“그래, 아직 우린 수습이니까. 상관이 마음에 안 들어도 대처할 방법을 잘 모르는 걸지도 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메이가 왠지 대견했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아의 행동에 낯설어하던 메이는 이내, 저도 리아의 머리를 매만졌다.

“우리 둘 다 힘내자.”

“네.”

메이는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도 같은 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리아는 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먹진 않아도 되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받은 뒤, 익숙하게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먼저 도착해서 식사를 하고 있는 퍼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번 밥을 먹을 때마다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걸어가면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리아는 그가 놀라지 않도록 인기척을 냈다.

“어, 오셨습니까.”

분명 자신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퍼스는 유난히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리아는 조심스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왠지 모르게 머쓱해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식사만 했다.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무슨 맛이 나는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어제 핀 작은 꽃들에서 달짝지근한 향기만이 퍼질 뿐이었다.

“질문… 생각해왔습니다.”

막 빵을 입에 넣는데, 퍼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리아는 입안 가득한 빵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말해보란 뜻이었다. 리아의 허락에도 퍼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뭘 좋아하십니까?”

대강 예상했던 질문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광범위했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보아, 퍼스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한 질문인 모양이었다. 리아는 질문을 지적하는 대신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식물 키우는 거 좋아하고요, 홍차 마시는 것도 좋아해요.”

퍼스는 식사도 멈추고 뚫어져라 리아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필기라도 하고 있는 듯한 자세였다.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듣는 건 또 처음이었다.

“음… 그리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말해놓고 보니 ‘너무 평범한가’ 하는 생각에 리아는 퍼스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더 말해보라는 듯, 퍼스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 이상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말없이 퍼스와 눈을 마주하던 리아는 결국 부담스러움에 먼저 눈을 피했다.

“또 뭘 좋아하십니까?”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정보로는 퍼스의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리아만의 취향이라도 고백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게 있던가. 능력도 그렇고, 취미도 그렇고 여러모로 리아는 스스로가 특출난 구석이 없는 인간 같았다.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리아는 자신 없는 태도를 보였다. 스스로가 좋아하는 걸 말하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일 줄 몰랐다. 그녀는 혹시나 퍼스의 기분이 상할까 끊임없이 그의 기색을 살폈다. 분명 점심을 받으러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에 술술 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답하려니 잘 떠오르지 않아 미칠 노릇이었다. 또다시 퍼스와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리아는 눈을 피한 채로 식사를 계속했다. 스프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해요. 잘 안 떠올라요.”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 스스로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무니까요.”

의외로 퍼스는 선선히 반응했다. 자신을 이해해줬다는 생각에 리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퍼스는 애초에 그렇게 이해심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 취향이 없다는 말 듣고 대강 짐작하긴 했습니다. 아마 스스로의 호불호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으실 거라고. 그래서 제가 주변에서 친구까지 하면서 리아 양의 취향을 대신 관찰하는 거니까요.”

“아, 네….”

분명 대신 자신의 취향을 파악해주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왠지 리아에게는 그동안 네 취향 하나 생각 안 하고 뭐 했냐는 말로 들렸다.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하며, 이번엔 리아가 되물었다.

“그럼 퍼스 님은 뭐 좋아하시나요?”

“비물질적인 거라면 정적, 고요를 좋아합니다. 아니면 합리적인 것이나 효율적인 것이요. 물질적인 거라고 한다면 시계를 좋아합니다. 시간은 무엇보다도 합리적이고 공정하니까요.”

너무도 퍼스다운 대답에 리아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그는 이 대답도 리아에게 묻기 전부터 준비해왔을 터였다. 분명 자신이 물어볼 거라 했으니까. 그는 이렇게 효율적이고 공정한 걸 좋아했으니까.

“멍하게 있는 것도 좋아하시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갑작스런 리아의 질문에 퍼스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멍하게 있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개 심각한 저의 표정 때문에 사색을 즐긴다 착각하기 일쑤였다. 그 생각을 정정하기도 뭐했고.

“아까 오면서 봤어요. 아무리 봐도 뭘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요.”

“보통은 모르던데요.”

“멍하니 있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눈의 초점이 풀리고 입이 살짝 벌어지는 경향이 있거든요.”

“관찰력이 좋으시군요.”

“아! 사람 보는 것도 좋아해서요.”

퍼스와 대화하다 보니 스스로가 좋아하는 걸 하나 더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장점을 찾아내 칭찬해주었다. 리아는 역시 그와 친구가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퍼스 또한 영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그의 모습을 리아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좋아요. 그렇게 하나씩 알려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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