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은밀하게
해가 완전히 진 집무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촛불을 몇 개만 켜두니 방 안이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했다. 돌아선 등에도 그림자가 져 있었다. 분명 해가 져서 바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뿐인데, 알폰스는 굳이 돌아서서 창문을 향해 있었다. 퍼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이해하고 말고가 아니었다. 알폰스는 그의 상관이고, 현재 기분이 몹시 나쁘다는 게 중요했다.
“자네, 이번 사건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
알폰스는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좀 전의 일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목이 탔다. 퍼스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할 뿐이었다. 사건? 단어 선택이 잘못되었다. 리아의 호감을 사지 못한 건 사건이라는 단어로 분류될 급의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었다.
“글쎄요. 저희가 너무 리아 양을 만만하게 본 걸까요.”
물론 대부분의 여성들은 알폰스의 이런 계략에 넘어가곤 했다. 처음 장난을 친 것부터 시작해서. 안 넘어가는 여성도 많았지만, 알폰스의 말에 의하면 거의 완벽한 성공을 이뤄낸 작전이었다. 리아는 자신이 머리를 쓴 계략이라고 오해하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퍼스는 협조를 했을 뿐 아이디어를 낸 게 아니었다.
일부러 머리를 써서까지 필사적으로 유혹하려는 알폰스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가만히만 있어도 멀쩡한 외모에 왕자라는 배경 덕분에 줄을 서는 여성이 왕궁 밖까지 이어질 텐데. 그는 굳이 한 명의 대상을 정해 반드시 넘어오도록 수를 쓰는 걸 즐겼다. 한때 술에 취한 솔직한 그의 고백에 의하면 답답한 왕궁 생활에서 유일하게 가진 취미라고 했다.
“그래. 언젠가 아바마마께서 세상엔 여자 수만큼의 공략법이 있다고 했지.”
그의 말처럼 왕 또한 알폰스와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국의 왕이면서 이런 취미가 왜 필요하냐고 물으면, 글쎄. 그 또한 그의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전해 듣기론 그는 알폰스보다 더욱 위험한 선을 즐겼다. 타국의 사신이 방문하면 그의 아내를 유혹하는, 아주 위험한 선. 심지어 이 모든 것은 비밀로 이루어져야 했고, 왕의 수많은 후처는 그렇게 생겼다.
“글쎄요.”
퍼스는 그런 왕 또한 별로 좋아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높은 것들은 시간 낭비를 참 좋아한다니까-’ 가 그의 감상 전부였다.
“또한 아바마마께선 말씀하셨지. 자고로 상대를 알아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몸을 돌려 퍼스와 마주한 알폰스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이게 그렇게 진지할 일인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퍼스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리아 양에 대해 알아봐.”
“제가요?”
뜨악한 마음에 퍼스는 상관의 말에 토를 달고 말았다. 평소라면 그저 ‘네, 알겠습니다.’로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반하게 하고 싶은 상대를 위해 안 그래도 바쁜 부하를 뒷조사나 시키다니. 반감이 일었다.
“그럼 내가 직접… 뒷조사를 하러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나, 자네?”
“그건 아닙니다만.”
퍼스는 머릿속으로 잠시 알폰스가 리아의 미행을 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화려한 금발인 데다 이 왕궁 안에 그를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왕자가 한낱 수습의 미행을 하고 있다고 하면 온 왕궁이 금방 발칵 뒤집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직접 그녀를 뒷조사하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퍼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굳이 그녀한테 집착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나 좀 알고 움직이자는 취지였다. 알폰스가 엉뚱한 일을 시키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일을 시키려면 이유를 설명해줬으면 했다. 그래야 이 귀찮은 일을 빠르고 확실한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알폰스는 퍼스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자네도 알지 않나, 우리 상황.”
제1 왕자인 알폰스가 처한 상황이라면 명확했다. 왕비 소생의 첫째 왕자라 왕위계승권은 명백히 그에게 있었지만,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부족했다. 왕에게는 알폰스 외에도 몇십이나 되는 자녀가 있었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피가 반이 섞였든, 반의반이 섞였든 친척이라는 존재들은 다 알폰스의 적이었다. 왕좌는 그만큼 탐낼 만한 것이었다. 알폰스가 가장 경계하는 건 대대로 왕실의 외척인 페르디난드 가였다. 그의 약혼녀이기도 한 아비게일의 가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얌전하고 출신마저 완벽한 예비 왕세자 비였다. 태어날 때부터 왕비로 길러졌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약혼녀를 볼 때마다 알폰스는 숨이 막혔다. 그래서 더 염문설을 뿌리고 다닌 것도 있었다. 물론 천성적으로 여자를 좋아했지만.
“물론 저희 상황에 페넬로페 백작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의 딸과 그는 다른 사람입니다만.”
알폰스의 입장을 보좌관인 퍼스가 모를 리 없었다. 페넬로페 백작은 딱 중립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중립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백작가에 대단한 권위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거리가 있다면, 알폰스의 말처럼 리아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왠지 퍼스는 내키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건 자네 의견이야.”
“…그랬습니다만.”
“그리고 백작과 그녀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없지. 어쩐 일로 왕실에 들여보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하나뿐인 막내딸이지 않나.”
하나뿐인 막내딸이니 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도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알폰스의 말대로 처음 이 계획을 떠올린 것은 보좌관인 자신이었다. 퍼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 날 좋아하는 건 분명한데 말이야. 입장 때문인지 튕겨도 너무 튕기는군.”
가장 기본적인 명제부터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굳이 반박하고 싶지도 않았다. 퍼스는 대답 대신 깔끔하게 인사를 한 뒤,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
“안녕, 리아.”
한창 식사 중이던 리아는 메이의 인사에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메이 양.”
“오늘은 얼굴이 좀 낫네.”
얼마 전, 메이에게 걱정을 끼친 뒤로 그녀는 이렇게 종종 리아의 상태를 체크했다. 신경 써 주는 게 고마워서 리아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어제 푹 잤거든요.”
“또 상관이 괴롭히면 말해. 슬쩍 상관 물건이라도 날려줄 테니까.”
메이는 결국 리아에게 캐물어 며칠 전 사건을 알아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상관인 퍼스에게 불만이 많았던 그녀는 케빈의 이야기를 듣자 더욱더 불같이 화를 냈다. 그의 연구실인 천막에 있는 물건을 모두 날려버리겠다는 걸 리아가 겨우 말렸다. 대신 혹시 또 염력 능력자가 필요한 일을 시키거든, 메이에게 꼭 말하기로 약속했다.
“감사해요. 말만으로 이미 든든해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왠지 평소와 똑같은 아침 식사도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문을 열고 나가던 리아는 익숙한 얼굴에 깜짝 놀랐다.
“퍼스 님.”
“좋은 아침입니다, 리아 양.”
퍼스는 그곳에서 리아를 꽤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듯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아침부터 찾아올 거라 예상하지 않아서 리아는 적잖이 놀랐다. 리아의 뒤로 출근하려는 직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몇몇은 퍼스의 얼굴을 알아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쩐 일이세요?”
“일단 출근지까지 가실까요? 보는 눈이 많으니.”
보는 눈이 많은 걸 신경 썼다면 일단 식당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왕실 근무자들 대다수가 아침을 먹는 곳이니까. 하지만 리아는 토를 다는 대신 얌전히 퍼스의 뒤를 따랐다.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자, 퍼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부터 리아 양에게 조금 폐를 끼치려 합니다.”
“폐요?”
“리아 양에 대한 걸 최대한 많이 알고 싶습니다. 특히 남자 취향이나, 좋아하는 행동이나 이런 것들을요.”
“저도 잘 모른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래서 직접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리아 양의 곁에서.”
곁에서, 라는 말에 리아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감시 같은 걸 하시겠단 건가요?”
“원래는 뒷조사에 가까웠는데, 아무래도 뒤에서 하는 것보다 당당하게 앞에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뒷조사라는 말을 하는 표정조차 평이해서, 리아는 그만 ‘아, 그러시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왜 제 뒷조사를 할 필요가 있으신데요?”
사람에 대한 접촉도 꺼렸던 퍼스였다. 갑자기 리아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났을 리 없었다. 게다가 가능한 한 타인과 함께하고 싶지도 않아 보였다. 그 생각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필요하시다고 합니다. 리아 양에 대한 정보가.”
주어가 없었지만 금세 알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폰스 왕자의 얼굴이 빠르게 리아의 머릿속을 스쳤다.
“굳이 또 저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는군요.”
전혀 달갑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제 아버지인 페넬로페 백작을 들먹이며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존재였다. 리아는 왕자라는 그의 타이틀도, 그의 외모에도, 재력에도 하다못해 인간적으로도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왕궁에서 일하기 위해서 퍼스가 소개한 남자와 한 달간 만나라는 조건만 없었다면, 최대한 알폰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터였다.
“이게 다 퍼스 님 때문이에요.”
리아는 공연히 퍼스에게 투정을 부렸다. 사실 퍼스의 죄라면 알폰스 왕자를 소개해준 죄밖에 없었다. 오히려 왕궁에서 일하게 해주고, 명분뿐인 소개를 해줬으니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퍼스는 리아의 부당한 탓하기에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예, 그러니 최대한 솔직하게 밝히고 협조를 구하는 겁니다.”
흘끔 고개를 돌려 퍼스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여상한 그의 표정 속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어내기 어려웠다.
“…그냥 한번 말해봤어요. 괜히 탓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앞으로 귀찮게 할 사람은 저인걸요.”
그렇지만 지금 누구보다 귀찮아하고 있을 사람은 퍼스였다. 상관의 명령으로 리아를 궁에 데려오고, 백작과의 계약으로 그녀에게 남자를 소개해야 했다. 게다가 이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그녀의 취향까지 파악해야만 했으니. 곰곰이 생각하던 리아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냥 거짓말로 제 취향을 말하면 안 되나요?”
“허위 정보는 금방 들킵니다. 대부분의 진실과 약간의 거짓을 섞어야 그럴듯한 거짓말이 되니까요.”
그녀의 귀엔 ‘대부분의 진실을 얻기 위해 앞으로 리아 양과 함께할 겁니다.’라고 들렸다. 리아야 퍼스와 함께하는 게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귀찮은 일을 맡게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퍼스가 리아를 싫어할까 염려가 되었다.
“알겠어요. 앞으로 시시때때로 퍼스 님께서 따라다니시면서 제 취향을 파악해주세요.”
“승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